어쩌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을 위하여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경제성장률이 바닥을 치고, 별의 별 말과 행동이 디지털 기록으로 남는 시대에, 타인의 실수를 너그러이 포용하기란 참 어렵다. 더구나 그 실수의 주체가 공인, 나아가 어떤 형태로든 남들의 시선을 끌고 부러움을 사던 인물일 경우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욕을 퍼붓는 사람들도 생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서는 이런 현상들이 일부 악플러로부터 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지금이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범지구적 전염병에, 전례없는 가치관의 충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휴 그러게 착하게 좀 살지 쯧쯧" 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일도, 최근 들어선 "뭐야 씨발놈아 니가 뭔데 크리넥스를 두 장씩이나 쓰냐?" 하고 반응하게 된다. 이건 뭐랄까, 사회적 똘레랑스의 부족을 넘어서 우리 스스로에게도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게 되는 상황이다. 이러나저러나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내가 안타까운 것은 유명인―지금으로서는 '공인'이라는 표현이 무의미하다―들의 실수, 나아가 그 실수에 대처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간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나면 페북이며 인스타그램에 일정길이 이상의 반성문을 올리는 게 통례처럼 돼있는데, 이 반성문이라는 것이 또 복잡하고도 미묘한 장르다.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중학생 시절 PC방가려고 담장을 타넘다가 국어선생님에게 걸린 이후로 수도 없이 많은 반성문을 써왔다. 유독 남들보다 등신 같은 짓을 많이 하고 다닌 것도 있는데(사실 이게 크다) 예나 지금이나 할 줄 아는 거라곤 글쓰기 밖에 없다. 평소에 잘 하고 다녔으면 누구 하나 두둔이라도 해줬겠지만. 성격도 별로고 인간도 비호감이다. 내 딴에는 반성문이라는 게 유일하고도 필사적인 입장표명 방식이었던 셈이다.
이러다보니 나중에는 스스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글로 써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지경에 다다랐다. 나는 최선을 다해 고찰했다. '어떻게 써야 사람들을 잘 구슬리고 설득해서, 이 상황을 얼랑뚱땅 넘어갈 수 있을까?' 따위가 아니고. '내 이런 진심어린 사죄의 마음을, 처절한 자책과 도덕적 고통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이걸 읽고 사람들이 용서를 해줄지 말지, 하는 것도 이제는 내게 중요치 않다. 내가 쓴 반성문에 내가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나로선 그것이야말로 진정 고통스러운 일이다.
좌우지간 나는 반성문에 매우 진심인 편이다. 그런데 몇몇 사물인(편의상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인물'을 줄여 부르기로 한다)들이 반성문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는 건 고사하고 몹시 통탄스럽기까지 하다.
그야 물론 사물인도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다. 나름대로 진심어린 반성도 고뇌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성의 마음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해서야. 써올린 사람도 읽는 사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어떤 것들은 '차라리 올리지 말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 반성문을 다 읽고나니 문득 적개심이 생긴다(이건 내가 이상한 것일수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텍스트에는 표정이 없다. 글자 자체만으로는 뉘앙스도 제스처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모티콘이라는 것도 있기야 하지만 일상적 언어에서나 쓸 수 있는 레벨이지, '반성'처럼 고차원적인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대판 싸웠던 친구가 다짜고짜 울고있는 어피치콘을 보내온다고 상상해보라.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건 사과가 아니라 도발이다. 사과하는 당사자는 진심일지 몰라도. 그걸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편집자에게서 '작가님 건강하세요^^' 라는 카톡이 온다면, 작가는 '참을만큼 참았다. 조만간에 마감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수도 있다' 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인다. 진심이야 아무렇든간에.
그러니까 내 생각은 이랬다. '반성문 쓴 꼬라지 보니까 아직 정신 못차렸네'가 아니라, '엄청 반성하고 있기는 한데, 표현방법이 서툴 뿐이구나', '그동안 반성문을 써볼 기회가 없었구나' 라고……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 언어의 한계상 통렬한 사죄의 마음을 온전히 다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큰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사태를 악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온 시공간의 사물인 그리고 예비 사물인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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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물어보자. 대충 당신이 사물인이 되었다 치고, 뭔가 크게 느끼는 게 있어 그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쓰는 것이 반성문인데…… 어떻게 써야 '좋은 반성문'이 되는 걸까? 이게 참 골때리는 문제다. 글을 잘 쓴다는 것과 반성문을 잘 쓴다는 건, 글이라는 것만 똑같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해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반성문이라는 건 '잘 쓸 필요가 없다'. 왜? 애초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성문은 '글을 잘 쓸수록' 쓰기 어렵다. 자꾸 생각을 하게 된다. 아, 어떡해야 그럴듯하게 표현하지? 어떻게 이 등신같은 짓을 괜찮게 포장할 수 있지? 하지만 제 아무리 글 쓰는 게 능숙한 사람도 반성문을 쓰는 것만큼은 쉽지가 않다. 등신짓은 그냥 등신짓이니까…… 살다보니 그런 실수를 했다. 이제와서 뭐 어쩌겠는가? 반성문은 내가 그걸 저질렀으며 그래서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표명하는 글이다. 거기서 '잘 쓰려고 노력한 것 같은'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그건 '진정성'이 아니라, 어떠한 '기술'로서 상황을 모면하려는 행위다.
때문에 나 역시 어떠한 '기술'로서의 반성문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기술'의 'ㄱ'이 들어가는 순간 반성문은 반성문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반성문을 쓸 땐 기술이며 기교며, 목적이며 상황판단 같은 것들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쓰다보니 또 뭔가 장황한 얘기가 됐는데,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크게 두 가지다. "반성문 쓸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의외로 해도 괜찮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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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은 서류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사적인 문서, 말하자면 편지에 가깝다. 그것도 판사님이나 후원자한테 쓰는 그런 편지가 아니라. '나한테 정말 친한 친구나 가족한테 큰 잘못을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든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쓰는 편지'같은 것이다. 거기엔 정해진 양식이 없다. 남의 것을 참고할 필요도 없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이라면 어떤 틀에 맞춰 써야할 지 같은 건 고민하지 않아도 좋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잘못한 마당에 셀카 같은 걸 올릴 순 없으니까, 새카만 정사각형으로 인스타 업로드를 한다. 조금쯤 틀에 박힌 느낌이기는 하지만 여기까지는 괜찮다. 페이스북과 달리 인스타에는 사진이 있어야 글을 올릴 수 있으니까. 별달리 방법이 없는 부분이다.
한데 '~한 데에서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표현은, 지나치게 상투적이어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진짜 뼈가 저릴만큼 후회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글을 써서 SNS같은데 올리지 않는다.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질질 짜고 있겠지. '아 씨바…… 내가 왜 그랬지?' 하고 탄식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건 최악이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반성문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 지 몰라서, 혹은 정말로 반성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서 쓰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선 어쩐지 '어휴 내가 두 번 씩이나 사과한다' 라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같은 마무리가 본문의 내용 전체를 망쳐버린다. 이 사람이 반성이라는 행위를 '미처 몰랐던 잘못을 인지하고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현실적 문제로 인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반성문을 밀린 숙제처럼 쓰지말란 얘기다. 진정한 반성은 빈도가 아니라 깊이에서 온다. 단순히 '죄송하다' '미안하다' 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고 용서가 되진 않는다. 비록 짧은 반성문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진심이 깃들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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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당신이 유명 연예인이고, 소속사가 있으며, 따라서 당신의 평판에 따라 여러 경제적 이해관계가 꼬이게 되는 상황이라면…… 제발 부탁이다. 주위 사람에게 '이거 반성문 괜찮은 것 같냐'고 묻지 마라. 회사 관계자들한테도 컨펌받지 마라. 애초에 그들은 이해 관계자이지 당사자가 아니고, 반성이라는 건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 글이 관계자의 컨펌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정도는 대번에 알 수 있다. 뭐 소속사 측 입장도 십분 이해는 된다. 그 반성문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따라 회사주가며 업계평판 같은데서 상당한 영향을 받을테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반성이 아니라, 분별을 하고 판단을 한다. 러브레터를 외교문서로 바꿔놓는다. 연예기획에서의 전문가이지, 솔직한 마음을 풀어놓는데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실망감이나 안타까움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이 반성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당신 스스로 반성문을 쓰고, 읽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건 기술이 아니라 도리이고 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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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간부로 뭘 그만두겠다, 사퇴하겠다, 은퇴하겠다,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좋다. 어쨌거나 당신이 사물인이라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야 불특정 다수로부터 욕을 먹는 건 실로 마음이 아픈 일이다. 때문에 한순간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일은 해야 먹고 살 것 아닌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법적인 처벌과 관계자들의 판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상황이 다 터진 다음에 그런 말을 해봐야 '책임진다'는 느낌보다는 '도망친다' 는 인상만 남길 뿐이다. 심한 경우 '아 드러워서 내가 그만둔다. 됐냐?' 라는 메시지로 비쳐질 수도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당신이 생업을 잃고 굶어 죽는 모습이 아니다. 잘못된 것을 알고, 창피함을 느끼고, 무언가 깨닫고 더 실망시키지 않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원한다. 평소 당신에게 진짜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결국엔 라이프 고즈 온이다. 욕을 먹든 처분을 받든, 사물인이 됐다고 해서 인생 자체가 끝난 게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차라리 하던 일을 계속 하다가, 그걸 프로답게 잘 처리해냈을 때는 '도덕적 결함은 있지만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능력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병헌도 법정출두하면서 배우 일은 계속했고, 탈세논란이 불거졌던 메시도 꾸준히 경기에 출장했다. 연기 잘하고 해트트릭하면 칭찬까지 받았다. 아, 그렇다고 'XX로 속죄하겠다'는 말은 하지마라. 능력이 출중하면 '그나마 용인되는 것'이지, '그래서 용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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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억은 생각보다 믿을만한 게 못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물인이 되면 누구라도 당혹스럽고, 억울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설령 있더라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라고 확신한 채 글을 쓰는 것은 곤란하다. 그건 반성이 아니라 협상이 된다. 사물인들이 흔히 하는 생각은 이렇다. 자신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며, 무죄라는 걸 증명만 하면 대충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글쎄, 법을 어겼을 때 받아 마땅한 것은 그에 따른 처벌이지, 불특정다수로부터의 욕지거리는 아니다. 욕하는 사람들은 판사나 배심원처럼 엄격한 증거와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대체로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가령 학교폭력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당신이 학폭관련 사물인이라면? 뭐. 어렸을 때 애들이 좀 치고받고 싸울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런 것 가지고…… 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학창시절 전체를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하거니와, 폭력의 기준은 매우 상대적이다. 법적으로 들어가자면 폭행죄는 '신체 접촉이 없더라도' 성립이 된다. 가해자야 '야, 난 이렇게 툭 하고 쳤을 뿐인데. 그걸 폭행이라고?' 라고 생각하더라도, 피해자의 시점은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정말 별볼 일 없어서, 증거가 없어서 무죄로 풀려난다고 한들 사물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건 법과는 아무 관계 없다. 무죄 판결은 처벌을 면하는 것뿐이다. 용서받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타인에게 엄격하고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또 우리의 기억은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지점까지 왜곡되기도 한다. 철없던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된 사람과, 어른이 되고도 철이 없는 사람 중에 뭐가 될 것인지를 고민해보라.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용서받고자 하면, 당신 역시 진심으로 반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고 '나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 뿐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법정에서 판검사니 변호사니 똑똑한 양반들 다 불러다 앉혀놓고 '그날 니가 하고 있던 넥타이 색깔이 뭐냐' '다른 색도 있는데 굳이 빨간색 색종이로 학을 접은 이유는 뭐냐' 처럼 하찮은 논쟁을 몇 년 씩이나 주고 받아야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같은 해괴한 해명을 내놓게 되는 것이고.
좀스러운 폭로전을 원하는가, 아니면 깔끔한 사죄와 반성, 나아가 당사자의 용서를 원하는가? ……어느 쪽을 원하든 간에, 그런 소재를 '반성문'에서 다루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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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나는 반성문을 일종의 편지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일상적인 표현을 쓰라'는 건 그 연장선상에 있다. 중요하고 필요한 내용, 사실관계만 딱딱 써 내놓는 건 서류다. 그건 기관이나 회사가 할 일이다. 반성문은 오히려 거기에 담을 수 없는 내용들, 즉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 내용들도 포함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서류상으로 표현하기에는 같잖기까지한 내용들이, 진솔한 표현방식을 거쳐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때가 돼서야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 한다. 당신이 마음 속 깊이 반성하고 있다면, 사람들도 마음으로서 판단하게끔 표현할 필요가 있다.
당장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주요 과제인 광고를 예시로 들어보자. 미국의 전설적인 광고업자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롤스로이스 안에서 제일 큰 소리는 전자시계 소리입니다'라는 카피 한 줄로 시중의 롤스로이스 모두를 품절시키고, 아예 공장을 하나 더 세우도록 만들었다. 만약에 이걸'우리 롤스로이스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 독일의 다임러사가 개발한 최신형 파워트레인을 탑재했습니다' 라고 썼다면? 소비자는 구매하기 전에 "그래서 내장재는 얼마나 좋은 걸 썼는데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복잡하게 설명하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과정 역시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금 간단한 예로 들어보자.
1. 저는 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심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에 대해 폭로한 그 사람은, 거기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습니까. 애초에 저는 그 사람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입니다. 기껏해야 몇 번 이야기를 나눈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자세한 내막은 법정에서 판가름날 것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2. 저 스스로에게 화가 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한 번만 생각해봤더라도 이런 문제가 불거지진 않았을 텐데요...(중략)...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되다니 내가 나이를 참 헛먹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견딜 수 없을만치 부끄럽습니다. 이 일의 경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언젠가 당사자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무심함으로 상처받고 실망하신 분들께, 뭐라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는 데 있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반성문이라고 함께 분류될 뿐이지,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가? 1번은 무죄를 확신하는 피고처럼 느껴지는 반면, 2번은 대판 사고친 바보똥멍청이처럼 느껴질 뿐이다. 마치 옆집 할머니 큰손주가 사람 때려서 유치장 갔다더라, 하는 느낌이다. 왜인지 "아이고. 평소에도 지 성질 못 이기더니 결국에는 사고 쳤구만. 쯔쯔. 이번 기회에 좀 정신을 차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핵심이다. 우리가 실수했을 때 '표명'하지말고 '표현'해야하는 이유다.
*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는 느낌을 주어도 곤란하다. 속상하고 힘들고 슬프고. 듣다보면 뭐 그럴 수 있는데,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불쾌한 골짜기에 이른다. '뭐야, 왜 이렇게 구구절절하지? 그냥 척하는 건가?'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지점을 판단하는 것은, 몇 번 얘기하지만 당신의 진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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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등 중요하지 않다. 편집자들이야 그런 걸 신경쓰겠지만, 사람들은 사물인에게 작가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는 게 아니다. 반성문에서 드러나는 당신의 서투름? 표현의 어색함? 비문과 맞춤법 오류? 다 괜찮다. 당신의 반성이 의심할 여지없는 진심이라면, 모든 것이 알아서 참작될 것이다. 일부러 할 필요는 없겠지만은. 평소에 말을 잘 못하던 사람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마자 완벽한 문장을 구사한다면 그게 더 이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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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정말 억울하다. 그것이 잘못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게 당신의 진심이라면. 차라리 쓰지 말길 바란다. 쓰는 사람도 진심이 아니고, 읽는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면 그냥 안 쓰는 게 백번 낫다. 만약에 당신이 정말 잘못한 게 아니다? 그럼 소신을 지켜라.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라. 악의적인 댓글들이 제 아무리 인민재판을 시도해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개 생각없이 욕을 한다. 당신이라는 인간이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그 불합리한 비난여론을 감내하기 위해서는 '난 나름의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행동했어. 난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아'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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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비(정지훈)가 '깡'으로 한 몫 잡았다, 기사회생했다고 얘기들을 하는 것 같지만. 몇 년간 묻혀있던 '깡' 뮤직비디오가 발굴된 초창기만 해도 '이건 너무 심한데' 싶은 댓글들을 많이 봤다. 돈 실컷 벌어놓고 대체 이딴 건 대체 왜 하는 거냐. 저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거냐. 아직도 자기가 트렌디한 줄 아냐. 주변에 자기 아부하는 사람밖에 안 두냐. 제발 박진영한테 가서 다시 받아달라고 해라. 김태희도 이런 건 다 못 봐주겠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만 해도 이 정도다. 기사만 많이 안 났을 뿐이지 거의 사물인 수준이었다.
만약에 비가 이때의 비난적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반성문을 썼다면, 혹은 해명문을 썼다면 어땠을까. '아, 화려한 조명 좋아해서 진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좀 어두운데서 지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오히려 비는 방송에 나와서 '나는 화려한 조명은 포기못한다'고 말했다. 왜? 그건 잘못이 아니니까. 연예인이 조명 좋아하는 게 무슨 잘못인가? 스포트라이트를 원하고,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이 될 수 있는가? 비는 변명하지 않았다. 해명하지도 않았다. 대중 앞에 나와서 솔직하게 대꾸했다. 대중들은 언뜻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그 결과물들이, 얼마만큼의 노력을 통해 탄생했는 지를 다시 보게 됐다.
물론 나는 비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느꼈다. 그가 자신의 직업에 얼마나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 그동안 흘려온 땀에 얼마만큼의 믿음을 갖고 있는지를. 요즘 같은 세상에 부당한 비난에 기꺼이 '버틸 수 있고' '핑계대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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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나도 두려웠다. '글쓰는데 왜 이렇게 쉼표를 많이 쓰냐. 쉼표 없이는 글을 못 쓰냐?' '제대로 등단도 못 한 주제에 왜 소설을 내려고 하냐?' 같은 댓글과 메시지들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정말 잘못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돼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의심과 고뇌가 우후죽순 솟아나 잠못들던 밤도 있었다.
지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고 싶을 때 쓴다. 아주 가끔은 내가 써놓고 너무 뿌듯한 글들도 몇 개 있다. 글을 쓸 때 가장 나 다울 수 있고, 가장 행복한(정확히 말하면 덜 불행한) 사람이라 느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동료의식을 가지고, 다들 안 그런 척 해도 엇비슷한 고독을 지닌채 살고 있다고 여긴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다. 당신이 내게 힘이 되는 만큼, 나도 당신이 느끼는 외로움에 위안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절대, 절대 잘못이 될 수 없음을 믿는다.
그래서 누가 내 글에다가 뭐라고 해도 별 생각이 안 든다. 지금 좀 못 썼으면 다음에 더 잘 쓰면 된다. 그건 내게 자부심이다. 내 글을 쓰는 일에 대해서라면. 나는 누가 어떤 비난을 해도 감내할 자신이 있다.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여전히 칭찬은 기분좋고, 독설은 속상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만약에 누가 나를 너무 미워해서, 글을 못 쓰도록 팔다리를 부러트린다면. 나는 머리나 혀끝으로라도 계속 쓸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무인도에 가둬놓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쓴다. 글쓰는 게 잘못이 아니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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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솜씨로 다소 장황하게 글을 써놓았지만, 결론은 단순명료하다.
반성문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을 때 써라. 만약에 반성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억지로 쓰지 마라. 너무 긴 터널을 지나다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된다. 모든 터널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혹시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는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있는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 모두가 당신을 죽도록 미워한다고 느끼는가?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믿어라.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통받는 인간들이며, 진심으로 당신이 죽길 바랄만큼 당신을 잘 알지 못한다.
끝으로 나는 당신이 가급적 반성문을 쓸 일이 없기를…… 있더라도 당신 인생의 떳떳한 과정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비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쉽지만, 부끄러운 자기 자신에게선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짧은 인생에서나마 내린 결론이 있다면 이렇다. 철없던 시절의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 미워 상처주기 바빴다. 세상 역시 나를 미워했다. 다들 내게 어떻게든 상처를 주려고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가끔(꽤 자주) 그렇게 느끼긴 하지만. 뭐가 됐든 주고 받는 사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내가 여태껏 많은 실수를 해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저렇게 실수하며 살아가리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아마 반성문도 몇 번은 더 쓰게 될 것이다. 난 단지 그 모든 실수와 반성의 결론이, 어떤 형태로든지의 사랑이고 용서이길 바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