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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r 25. 2021

영원에 관하여, 미켈란젤로

7. Michelangelo Buonarroti

1. 서울 소재의 한 초대형 재벌기업 L. 오랫동안 그 기업의 회장을 역임해온 G씨는, 어느덧 인생의 황혼을 바라볼 나이가 됐다. 그러다 문득 '세상에 내가 있었던 흔적을 확실하게 남겨야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자신의 이름… 아니, 성을 딴 '온라인 플랫폼' 하나를 크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돈이며 건물은 썩어돌 정도로 많지만, 그걸 전부 싸들고 무덤에 들어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생전 해보지않은 혁신을 일으켜보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 같았다.


 그런데 웬걸, IT회사라고는 하지만 웹디자인만을 전문으로 하는 직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웹쪽이 주력도 아니었다. 그래도 뭐 돈 좀 주고 기획안이나 몇 개 받아보자 했는데, 회사 내외로 주문한 수백 개의 시안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한데 어느 날. 저기 어디 위쪽에 파주인가 어딘가 하는 곳에서 디자인 하나는 기깔나게 하는 프리랜서 B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어디보자. 온라인에 올라온 포트폴리오를 보니까 이 놈 이거 영 심상치가 않다. 장인의 기운이 물씬 느껴진다. 선 한 줄, 색깔 한 점 허투루 다룬 것이 없다. 그래, 이 녀석이다. 내가 스티브 잡스라면 이 녀석이 조너선 아이브다. 이 놈에게 시키면 나도 제프 베조스가 될 수 있을 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전부 대머리이다)


 그래서 그 웹 디자이너인지 뭔지에게 연락을 보내 구두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당장은 맡고 있는 일도 있고, 플랫폼이면 기획도 오랫동안 해야하니 반 년 뒤에나 서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잡힌 일정이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지. 하고 반 년이 지났다. 웹 디자이너는 마침내 서울로 올라와, 건물 맨 꼭대기에 위치한 G의 집무실에 찾아갔다. 그런데 뭔가 말하는 태도며 얘기가 달라졌다. 포털사이트는 됐고, 그냥 자기의 업적이며 발자취를 남기는 뜻으로 작은 웹사이트나 하나 만들어달라는 거다. 그냥, 웹사이트…….


 그동안 회사 사정이 좀 바뀌었던 모양이었다. 대규모 신사옥 건설 계획이 앞당겨지면서, 무슨 초대형 플랫폼 같은 걸 만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일러는 물론 스케치며 제플린까지, 바로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온갖 준비를 다 해서 먼 길을 왔더니 쪼매난 기념 웹사이트나 하나 만들어달라고? 그거 때문에 날 불렀단 말인가? 기분이 잔뜩 상할대로 상한 B는 대답 한 마디 안하고 파주로 돌아가버린다. 뭔가 잘못된 걸 알아차린 A가 메일을 보내서 달래보려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꼬우면 니가 내 작업실로 오든가'는 것이다. 아니. 지가 뭔데 국내 유수의 재벌기업 회장에게 제발로 오라는 말인가? 대한민국 재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G에게, 일개 프리랜서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는 소식이 나라 전체에 퍼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파주시 쪽에서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L사의 주요 생산공장이 파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운영방침이 바뀌면 시 전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파주시장이 G에게 공문서(를 가장한 추천서)를 보낸다. 'B 있잖아요. 금마가 나쁜 애는 아닌데 걍 말하는 방식이 좀 그래요…… 그래도 실력은 최고니까 한 번 믿고 맡겨 보시죠?' 


 그래서 마지못해 G씨는 원래의 대형 플랫폼, 까진 아니더라도 꽤 규모가 있는 온라인 서비스 디자인을 B에게 맡기기로 한다. B는 그 일을 안 맡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자신은 웹 디자이너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프런트엔드 개발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G씨도 이번엔 꿋꿋하게 제안을 지켰고, B는 별 수 없이 '작은 온라인 서비스'를 4년 동안 적당히 개발해 내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구글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초상' (1544), 다니엘 다 볼테라.




2. 제목에서 얼추 눈치챘겠지만, 위 내용은 16세기 교황과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우리나라 사정에 맞게 각색해본 것이다. G는 교황(Gyohwang), B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Buonarroti), 구글은 대충 '천지창조'로 알려진 시스티나 천장화에 빗댔다. 서울은 로마, 파주는 피렌체인데 서로간의 위치도 얼추 맞는다.  故 구 회장님이 16세기의 교황과, 구글이 천지창조와 비교할만한 대상일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 시대에서 대단한 흔적을 남겼다'는 면에서는 일맥상통한 것 같고. 마침 이탈리아도 반도 국가니까 나로선 제법 괜찮은 메타포였다고 생각한다. (웃음)


 다만 여기서의 핵심은 미켈란젤로를 일개 프리랜서 '웹 디자이너'로 소개한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켈란젤로 씩이나 되는 거장을 외주 웹 디자이너에 갖다대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라고 여겼다면, 내 의도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 셈이다.  

 지금이야 예술계 전반에 대한 사회적 명예며 권위가 익숙해진 시대이지만, 르네상스 시기 이전만 하더라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회화 쪽은 예술보다는 그냥 기술적인 작업에 가까웠다. 왕실이나 교회에서 필요할 때 불러서 시키는, 굳이 말하자면 인테리어 업자에 가깝게 취급됐다. 화가의 개성적 화풍이나 영감을 표현하는 건 어림도 없고,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작품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중세시대 서양미술에 '작가미상'이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인체 스케치 (1508)



3. 예술Artistry과 기술Skill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기술과 달리 예술에는 정답도 없고, 모범도 없다. 정해진 양식도 없다('무슨무슨 주의' 같은 것도 나중에 분류상 갖다 붙일 뿐이다). 완벽의 기준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가 하면, 무엇부터 시작해 무엇으로 끝내야할지도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술과 기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사업주들이 그렇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것이다. 쟤는 그림 한 장 그리는 데 한 시간 걸려서 2만 원을 버는데, 니가 3만원을 받았으면 한 시간에 한 장하고도 반쯤은 더 그려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글쓰기나 그림그리기 같은 작업이 옷핀 만드는 일과 같이 취급된다. 작업자의 기획과 영감, 눈에 보이지 않는 창작적 고민은 일절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구상을 하고 있으면 '왜 아직 눈에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냐?' '시안이라도, 하다못해 기획서라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실질적인 창작을 도맡고 있는 사람을 들볶고 채찍질한다. 지금의 서비스 기획자, 디자이너, 앱 개발자가 겪는 이런 대우를 과거의 위대한 미술가들도 비슷하게 받았던 셈이다. 그래서 제아무리 창작욕구가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외주같은 걸 받으면 일종의 서류작업처럼 '기계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물주들은 정해놓은 기간동안 정해놓은 분량을 해놓는 걸 원한다. 그런데 거기에 기막힌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눈에 띄어야 한다…… 매번 어느 정도의 창작성을 요구하면서도 꾸준한 성과를 내야하는 직종. 그런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간극으로부터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 옛날 미술가들도 그랬다. 이름없는 그들의 작품은 지금 전 세계 국립 박물관이며 시립 미술관에 고이 전시돼 있고, 메디치는 그런 미술가들에게 돈을 대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네기는 그냥 콘서트장 이름이고... 역사적으로 돈 좀 있다 하는 분들이 예술에 이른바 '묻지마 투자'를 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되려 돈이 어중간하게 있으니까 이것저것 따지게 되고,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아무 것도 안 남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역시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 수두룩하다.



다비드David (1504). 다윗이 다비드랑 똑같다는 걸,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4. 이렇다보니 그 당시 그림쟁이들에 대한 대우야 말할 것도 없었는데, 미켈란젤로의 등장을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기껏해야 그림이나 그리고, 대리석이나 깎는 노가다 십장 같은 놈이(실제로 그렇게 생기긴 했다) 무려 교황에게 개긴 것이다! 이것은 더 적절한 비유가 없었을 뿐이지, 일개 웹디자이너가 재벌가 회장에게 개긴 것보다도 더 엄청난 일이었다. 종교개혁(1517) 이전의 교황은 일국의 왕보다도 신성한 존재였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천지창조》, 그러니까 시스티나 채플의 천장화가 위대한 미술가의 초인적인 열정으로 완성된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본디 피렌체에서 작업하던 미켈란젤로가 로마까지 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영묘 건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조각상들을 맡기려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현신인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지었던 것처럼, 기독교 세계의 대왕에게도 그에 걸맞는 무덤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뭐 그런 착상이었던 것 같다.


 회화보다 조각과 건축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던 당시의 미켈란젤로는 그 제안에 혹해서, 채석장까지 찾아가 조각하기에 적합한 대리석을 몇 달간 찾아댔다. 근데 반 년이 지나고 나서 로마에 가니까 교황이 말하는 본새가 좀 이상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느라 교황의 영묘 '따위'는 지을 장소도 돈도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면죄부까지 팔아서 예산을 충당하다가, 루터에게 극딜당하면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다)


 "야, 생각해보니까 여기 졸라게 큰 성당을 짓잖아. 내 영묘까지 지을 자리가 없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걍 못하게 됐어. 이렇게 돼서 나도 참 유감이야"


 "야이 씨발놈아" 라고 직접 말은 안했겠지만, 속으로나마 그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그길로 단단히 삐진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 틀어박혀서 '꼬우면 니가 와'라는 식의 편지를 교황에게 보냈고, 피렌체의 시장이 그 상황을 중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교황은 바티칸에 있던 작은 예배당―시스티나 소성당(채플)이라 불리는―의 새 천장화를 제안하는데, 여기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 근데 제가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거든요? 그래서 그림은 좀 그러네요ㅎㅎ;"





《천지창조》로 알려진 '시스티나 천장화의 일부분' (1512)




5. 하지만 교황은 완강하게 버텼고, 미켈란젤로는 '하는 수 없이' 조수들을 구해서 소성당에 처박혀 몇 년간 그림을 그렸다. 원래는 열두사도를 그리는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었는데, 미켈란젤로의 생각으로는 '어차피 조각을 못할 거라면 그림으로 조각해버리자'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 같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천지창조》, 훗날 똑같은 성당의 제단쪽 벽면에 그린 것이《최후의 심판》이다. 현재의 시스티나 소성당은 새 교황을 뽑는 선거, '콘클라베'가 이뤄지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뭐, 결국 미켈란젤로도 '시키는 대로 그린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교황에게 개긴다…… 그건 두둑한 배짱이나 자존심같은 데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에서 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그저그런 '기술자'로 명예로이 살아갈 것인가, '예술가'로서 불행하게 죽을 것인가? 미켈란젤로쯤 되는 인간이라면, 자신이 미켈란젤로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말의 고민조차 있었을리 없다.


 미켈란젤로는 개겼다. 부득이하게 맡은 일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냈다. '시키는 일을 군말없이, 원칙대로 정확하게 한다'와, '시키는 일에 개기다가, 결국 하게 자기 방식대로 완벽하게 해낸다'는 건 뭐가 낫다 할 필요도 없이 아예 다른 작업이다. 전자에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자로밖에 제 역량을 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전자는 행정가나 사업가 타입이고, 후자는 예술가나 발명가 타입인 것이다.  


 이런 미켈란젤로를 전후하여 '미술', 그리고 '미술가' 전반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존중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교회나 왕실, 혹은 귀족 가문에서 '선택받는' 입장이었던 미술가가,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어디서 어떻게 작업할 지를 '선택하는' 입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일례로 미켈란젤로의 직후 세대인 티치아노Tiziano는 그림 그리다 떨어뜨린 붓을 뒤에 있던 '황제' 카를 5세가 직접 주워줄 정도의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와우. 이런 걸 글로 치면…… 음. 헤밍웨이가 샷건 때려 고장난 타자기를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고쳐다준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시스티나 소성당의 내부', CC BY 3.0, Jörg Bittner Unna




6.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인가? 물론 그런 건 없다. 어차피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누구도 아닌)내가 여기서 찾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렇다. 정말이지 몇십 년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가 않다. 나 역시 글을 쓰며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사업주며 출판사, 편집자와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 때로는 영 내키지 않는 작업을 해야할 때도 생긴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 교실에서부터 차곡차곡 성장하며 배운다. 사람은 원하는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원치않았던 일들이라도, 뒤늦게 필요한 방향으로 고쳐가며 나아갈 수는 있다. 나는 집에 처박혀있는 인간치곤 사업상 미팅에 익숙한 편이고(그야 창업을 했었으니까), 서로의 입장에 맞춰 적당한 결론을 내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살면서 분명히 '그렇게 할 바에야 안 하는 게 낫겠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쯤 했다. 그래서 한 몫 챙길 수 있었(을 것 같)던 기회도 여러차례 놓쳤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쓸데없이 자존심만 부린다고, 그렇게 살면 제 명대로 못 살고 굶어 죽을거라고 핀잔을 줬다. 그래, 그렇게 살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나는 말했다. 하기야 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말을 믿을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나는 그 모든 순간에 진심이었다. 


 한 번은 미팅―엔젤투자자와의 미팅이었다―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도 있었다. 혈기왕성했던 이십대 초반이어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사람은 대화 도중에 수시로 말허리를 끊고 들어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어간 내 사업계획서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또 뭐라 그랬더라? 생각이 너무 나이브naive하다고 했던가? '당신이 말하는 게 그렇게 좋은 아이디어라면 네이버나 카카오가 왜 안 했을 것 같냐'며 비꼬았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그걸 할 거냐고 물었다. 또 계획이 너무 추상적이고 비즈니스 모델이 부실하다고 했다. 아니. 사업을 시작할 자본이 있고, 당장 실행할만큼 구체적이고 명확한 모델이 있었으면 나도 당신에게 투자나 조언따위를 받으러 왔겠냐고. 그때 맘 같아선 내가 앉아있던 의자를 들어서 내던져버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불법이니까 그냥 집에 와서 침대 매트리스에 머리를 펑펑 처박는 걸로 대신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글로 쓸 정도가 됐지만. 그땐 화가 정말 많이 났었다. 정말 많이.


 ……해서, 나는 때때로 말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일이지, 을이 아니라고. 나는 절대 미켈란젤로가 아니지만(그럴 필요도 없고), 당신도 교황이나 황제가 아니라고. 거래처든, 사업주든, 출판사든, 편집자든,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할 권리는 없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자존심이나 가오따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속성이었다. 출신이나 성별 같이, 타고난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겨우 그런 것들로 비난받고 고통받는다면. 죽지않고 버텨라, 끝끝내 살아가라는 말도 잔혹한 명령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이리 골치아프게끔 만들어진 것일까. 아마도 그건 태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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