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Billie Holiday
1.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유튜브 영상 두 개를 잠깐 보자.
아래 두 곡은 똑같은 노래(재즈 스탠다드)인 'All of Me' 를 두 여성 재즈 보컬이 연주한 것이다. 한 명은 '3대 여성 재즈 보컬' 중 한 명으로 뽑히는 엘라 피츠제럴드이며, 그 다음 역시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빌리 홀리데이다.
―가사를 전부 번역하기에는 자신도 없고, 스크롤만 잡아먹기 때문에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너 없이 나 못 사는 거 알지 않냐, 왜 한시라도 빨리 내 모든 걸 가져가지 않냐?' 라는 내용이다. 비록 가사의 디테일은 다르지만, 뉘앙스 자체는 원더걸스의《이 바보》와 비슷하다(고 나는 느꼈다). 참고가 되길 바라며.
2. ……좋다. 감상은 잠깐 제쳐두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세 손가락 안에 무언가를 꼽는 일, 소위 'Top 3'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하루이틀일이 아니다. 고대 로마의 삼두정치부터 시작해서, 올림픽 등 스포츠 대회에서도 3위까지에게만 메달을 수여한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선 아예 3김 시대가 있었다. 최근에도 원피스의 3대장, 헬스장의 3대 500이라는 기준까지. 어째서 3이라는 숫자에 그토록 집착하고, 안정감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아무래도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y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게 분명 존재한다. 어느 장르에서든 가장 위의 세 개를 뽑고. 비교하는 관습이.
3. 아무튼 위에서 언급했듯이, 재즈에서도 3대 여성 보컬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백이면 백.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사라 본sarah vaughan의 트로이카를 꼽는다. 물론 이 세 명의 보컬이 재즈 역사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를 제각기 수치화한다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매우 불필요한 일이다. 매우 불필요하다. 재즈에서는 더욱이. 그러나 우리는 비교할 수밖에 없다. '3대 XX'이니까. 학창시절까지도 김범수와 나얼과 박효신을 비교했듯이 말이다.
4. 그러나 이 셋을 비교하는 것은―불가능하고 불필요할 뿐 아니라―불공평하기도 하다. 그것도 단 한 곡으로? 당신은 위의 두 곡을 비교해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내 생각에 2020년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누가누가 노래를 더 소름돋게 잘 부르나'식의 경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엘라 피츠제럴드의 손을 들어줬으리라 짐작해본다. 나도 그랬으니까. 시대를 초월하는 청아한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스피커를 뚫고 뛰쳐나올 것 같은 음역대, 접신 수준의 스캣. 발랄하기 그지없는 가사와 세션. 반면 빌리 홀리데이의 보컬은, 뭐랄까 뭔가 느껴지기는 하는데 영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엘라의 연주와 비교해 '다 늙은 할머니'가 부른 것 같다는 인상마저 받았다.
5. 그렇다면 이건 그냥 시대의 차이 아니냐? 엘라가 좀 더 발전된 연주를 했을 뿐 아니냐? 그것도 아니다. 빌리는 1915년, 엘라는 1917년생이다. 엘라가 두 배 정도 활동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이 둘은 동시대의 보컬이며 활동 시기도 명백히 겹쳤다. 그런데도 빌리가 재즈 보컬로서 엘라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사실이 당신은 의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면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해서, 빌리 홀리데이의 다른 앨범을 찾아보았지만 엘라 만큼의 스킬을 보여주는 연주는 없었다. (사실, '엘라만큼의 연주' 같은 건 없다. 엘라 피츠제럴드식의 연주를 엘라 피츠제럴드만큼 잘 하는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테니까)
6. 한데 이제와서 내 생각은 이렇다.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피츠제럴드는 '다른 악기'인데 '연주자'도 다른 케이스라고. 후자가 테디 윌슨의 피아노라면, 전자는 레스터영이 부는 '바리톤 색소폰'이라고 할까(공교롭게도 윌슨과 영은 함께 앨범을 낸 적이 있고, 이 중 트랙에도 'All of Me'가 수록돼있다). 물론 이들은 음악이며 재즈일 뿐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둘 다 적절한 비유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 이야기는, 애초에 이 둘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는 것이다. 3대 여성 재즈 보컬? 아니. 빌리 홀리데이는 빌리 홀리데이이고, 엘라 피츠제럴드는 엘라 피츠제럴드다. 당연히 사라 본은 사라 본이고.
7. 누가누가 더 고음을 잘 쓰나? 누가누가 더 소름돋는 애드립을 뽑아내나? 이런 1차원적 비교를 하게 되는 이유는, 보컬이라는 '악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만큼 1차원적이어서가 아닌가 싶다. 보컬은 악기다. 그냥 가사가 있고, 그 진동과 소리의 근원이 인간의 목일 뿐이다. 그런데 유독 보컬에서는 '얼마나 높은 음을 낼 수 있느냐' 라는 것이 기술적 완성도와 동일시 된다. 바이올린이나 기타, 피아노로 똑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해보라. 누군가가 피아노 제일 오른쪽의 건반을 띵띵 눌러보더니, '자, 어때?' 하는 눈빛으로 당신을 쳐다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은가? 나는 이럴 것 같다. 아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중요한 건 그걸로 얼마나 아름다운 선율을, 얼마나 적절하게 연주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느냐에 있지 않느냐고.
8. 물론이다. 빌리 홀리데이의 기구한 인생역정에 대해, 나는 이보다 더 앞에 있는 단락에서 언급할 수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가 태어나던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거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친척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구박받았고, 열한 살때는 이웃집에 살던 중년의 백인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그러나 경찰은 빌리를 보호 명목으로 소년원에 구금시켰으며, 출소 이후에는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다가 할렘에서 매춘부 일을 했다. 그러다 방세를 못내 길거리를 배회하던 중에, 한 나이트클럽에 나이를 속이고 들어가 우연히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청중은 그녀의 서투르지만 우울한 음색에 깊이 감동받았다. 그 때가 1929년이었다. 빌리는 열 네살이었으며, 때마침 미국은 대공황 시대에 접어든다.
9. 재즈 보컬로 크게 성공한 뒤에도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투어 도중에도 식사와 숙박을 따로 해결해야했으며, 사랑했던 남편은 마약중독자였던데다가 어느 날엔 남은 돈을 모두 갖고 도망쳐버렸다. 빌리는 수시로 감옥에 드나들었고, 옛날에 함께 일했던 전설적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찾아가 돈을 구걸하기도 한다. 1959년, 44살을 일기로 사망했을 때 그녀가 남긴 재산은 1000달러에 불과했다. 사인은 마약중독에 의한 건강악화, 간과 심장질환 등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런데, 뭐? 그녀는 재즈 아티스트였고, 그녀의 업적은 그녀의 목소리로서 평가받아 마땅하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비교, 그리고 사실…….
10. 여기 'Everything happens to me' 이라는 곡이 있다. 'All of Me'와 똑같은 사랑노래이지만, 내용은 사뭇 다르다. '불운하게 태어난 나는 살면서 별 일이 다 일어났어. 그러다 널 만나서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인생에서 단 한 번 사랑에 빠졌는데, 그게 하필 너였다니. 역시 나한테는 별 일이 다 일어나네...' 같은 느낌이다. 조금 더 미저리같은 뉘앙스가 있다.
시작할 때와 같이, 두 곡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하겠다. 똑같은 곡, 다른 연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