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Murakami haruki
1. 미리부터 얘기해두지만 나는 하루키의 팬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낸 책은 소설이고 수필이고 가리지 않고 거의 다 읽었다(글을 엄청나게 많이 쓴 인간이다). 그럼 팬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손자병법에 나오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이하는 생략하겠다.
2. 왜냐하면 나는 진지하게 하루키를 경쟁상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꽤 그럴듯한 문장이나 문단을 쓰고 나면 '아 이건 하루키보다 잘썼다ㅋㅋ' 하고 속으로 자화자찬하곤 했다(가끔은 입으로도 말했다). 글을 잘 쓰다가도 '어, 잠깐. 방금은 하루키처럼 썼잖아. 다시 써야겠다……'하고 문단 전체를 없애버린 적도 많다. 어째서 하루키냐? 이유는 딱히 없다. 굳이 하나 말하자면 아직 정정하게 살아계셔서인 것 같다. 오래전에 죽은 작가들과는 경쟁하기가 조금 애매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랑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고(총이 있으니까), 도스토옙스키는 탈모가 있으며, 톨스토이는 지주 귀족이다. 그런가하면 하루키는 폴 매커트니 같은 리빙레전드이므로, 대충 비벼봄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그러기에 용이하기까지 하다.
3. '너 따위가 뭔데 감히 하루키씩이나 되는 작가와 경쟁을 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대중적'이고 '야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하루키를 고급야설작가 쯤으로 치부했던 국내 여론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대학생 시절에는 여학우 하나가 '1Q84'를 들고 있는 걸 보면서 '저건 그냥 고급 야설이잖아. 저딴 걸 왜 읽지?' 라고 말하던 놈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학창시절 베르나르 베르베르 '씩이나' 읽었던 자기네들은 아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놓고 얼마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니까 입을 닥쳤다.
4. 한가롭게 책이나 들여다볼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요즘 사람들, 은 다 그런 식이다. 맨부커상(=노벨문학상에 비견될만큼 대단한 문학상)을 받았으니까 《채식주의자》를 찾아서 읽고, 백희나 씨가 랜드그렌상(=아동문학계의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니 《구름빵》의 저작료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 지루한 '만인보'를 전부 읽고 고은의 팬이 된 사람은 없다(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도 없었다). 노벨문학상을 받나 마나 하는 얘기가 나와서 팬이 됐다가, 성추문이 도드라지면서 안티가 된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웃음)
5. 하여간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별로 해명하고 싶지 않다. 당신들은 좌절을 원하는 거지 해명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글을 유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옆나라 한국의 이십대 개좆밥 글나부랭이가 속으로 늘 '하루키보다도 대단한 글을 써보겠어' 하고 생각하는 것을, 그는 기분나빠할 사람이 아니다.
6. 한 번은 꿈에 하루키가 나와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네 글에서는 느껴지지가 않아. 잘은 설명할 수 없지만.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아주 매력적이기까지 하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이 빠져있어. 마치 '안이 텅 비어있는(요 일곱글자에 강조점을 찍어주어야 한다)' 바바리안 필드 도넛같아."
"왠지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내가 말했다.
"그야, 꿈이니까" 하루키는 왼쪽 네번째 발가락 윗부분을 손톱으로 긁으며 말한다. 나도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거기는 가끔씩 가려운 부분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인류 역사에 몇 안 남은 미스테리 중 하나일 것이다. "꿈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어. 무슨 일이든지 말이지"
"아, 그럼 꿈 속 세계에서는《노르웨이의 숲》이 한국에서도 잘 팔렸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제일 많이 팔린 책 중에 하나야. 얼마나 팔렸는지 세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많이 팔렸어. 한국에서도 많이 팔렸을 걸."
"아니, 아니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한국에서 많이 팔린 건 《상실의 시대》라고요.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아니 이런 씨발놈이"
하루키가 말했다.
꿈은 거기서 깼다. 내 인생 통틀어 제일 유쾌한 꿈 중 하나였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이 부분을 일기에 적어두었다.
7. 하여간 나는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 적이기 때문에. 구태여 평론 비슷한 걸 하자면 이렇다. 일단 하루키는 '시간을 들여' 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번역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정말 많이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마 둘 다 아닐까). 사정이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서사적 필요에 의해 등장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글에는 도스토옙스키나 피츠제럴드에게 없는 동양적 감수성(나는 '구질구질함'이라고 한다)이 있다.
8.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압박감(나는 '프롤레타리아 감성'이라는 말을 즐겨쓴다)은 거의 없다. 하루키 쯤 되는 작가라면 그런 걸 관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에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겠지만…… 왜냐하면 하루키 자체가 꽤 사는 집 사람이기 때문이다. 와세다 문학부(우리나라로 치면 고려대 국문과쯤 되지 않을까)출신이고, 번역일과 재즈바 운영을 하다가 야구장에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 나는 다섯 살부터 호로자식에 어머니는 알콜중독자였고, 돈이 없어서 대학교에서 중퇴했다. 자, 이제 진짜 씨발놈이 누구지? ……물론 농담이다. (웃음)
9. 가령《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의 주인공을 예시로 들면 이렇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냥 시계가 '태그호이어'인데,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더니 마침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 명의의 '남는 아파트'가 하나 있어서 거기서 그냥 산다. 월세는 당연히 없고. 이발비와 병원비에 대한 얘기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 고즈넉한 별장같은 게 꼭 한 채씩 있다. 차 얘기도 많이 나오고, 재즈와 클래식 음악 처럼 교양이 뚝뚝 묻어나는 소재가 즐비하다. 하기야 하루키의 젊은 시절이라고 하면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 이전이었으니, 소설 전반에 느긋하고 우아한(적어도 지금 관점에서 보면) 뉘앙스가 느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오히려 요즘 젊은 세대가 가진 또 다른 차원의 상실감이며 우울감을 '흉내'내려고 했다면, 하루키의 작품세계는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을지 모른다. 그건 작가의 역량이 어쩌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10. 내 책의 리뷰 중에 '20대의 하루키가 글을 썼다면 꼭 이랬을 것 같다'는 평이 있었다. 하루키의 팬인데도 그런 표현을 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내겐 과분할 정도의 극찬이었을 거다. 다만 하루키를 진심어린 '적'으로 인식하는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 때부터 '하루키와 다르게 쓰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내게는 다른 방식으로 이기고 싶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11. 무라카미 하루키 씨(왠지 여기서부턴 존칭을 쓰고 싶다) 는 1949년 출생으로 지금은 칠순이 넘었다. 내게 단기적인 꿈이 하나 있다면 내 이름으로 된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 씨가 내 글을 읽을 가능성이 단 1프로라도 있었으면 한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랬던가? 정말로 슬픈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모든 걸 가졌지만 남은 시간이 없을 때라고. 아, 하루키 씨. 당신은 JBL 백로드혼으로 클리퍼드 브라운을 듣는다고 했었죠. 알고 계시겠지만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JBL은 삼성의 계열사가 됐고요. 저는 보스 사운드링크를 쓰는데, 이건 선도 연결할 필요가 없어요. 줄이 없으니 힘도 없는 것 아니냐고요? 그래도 체임버스의 베이스는 기가 막힙니다. 요즘은 안드레아 모티스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요. 언젠가 뵐 수 있길 바랍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