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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r 13. 2021

영원에 관하여, 빌 에반스

4. Bill Evans




< Autumn Leaves (1960) >. 들으면 다들 '아, 이거?' 하는 곡이다. 성경 같은 스탠다드.


1. 한동안 빌 에반스Bill Evans의 연주에 푹 빠져 지냈다. 전업작가가 되기 전에도, 뭔가 집중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면 항상 재즈를 틀어놓았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가사가 있는 음악을 선호하지 않는다. 좋은 노래는 따라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건 노래방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배경으로 깔리기에는 너무 강렬한 소리다. 음도 있는데 내용도 명확하다. 



<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 에반스는 'Kind of Blue'를 함께 작업한다 (1959). 재즈 역사 최고로 꼽히는 명반이다. >


2. 나는 음악이나 악기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지만. 악기마다 제각기 정해진 역할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농구로 치면 가드와 포워드, 그리고 센터와 코치의 역할이 전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재즈 연주에서 트럼펫 주자는 '칼잡이Chopper'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트럼펫 소리는 아름다운 호루라기 같아서, 주위의 온갖 다른 소리들을 찢고 날카롭게 저며들어온다. 등장하는 순간 귀를 사로잡아 버린다. 물론 트럼펫 연주에서도 강약은 존재하고, 마술 같은 기교를 부리며 소리를 섞는 장인도 많지만. 악기 자체가 다른 소리를 집어삼킬만큼 강렬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 노르웨이의 콩스베르그에서 찍은 사진 (1970). 베이스는 에디 고메즈. > 



3. 내가 유독 피아노 연주를 즐겨듣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아노는 트럼펫처럼 한없이 날카로워졌다가도, 베이스처럼 뒤로 완전히 빠져서 보좌해주는 것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올라운더다. 왜, 그런 애들 있지 않은가. 농구나 축구 같은 걸 하면, 수비를 엄청 잘하는데 필요할 때면 득점도 꼬박꼬박 해주는 그런 친구 말이다. 내겐 피아노가 그렇게 들린다. 그리고 빌 에반스는, 그런 다재다능함이 가장 돋보이는 연주자다. (앨범커버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 'Portait in Jazz' (1960)의 앨범커버. 운전면허증 사진 갖고와서 쓴 듯> 



4. 아무튼.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일할 때 재즈를 즐겨듣는다. 잔잔한 스윙감, 악기간의 조화가 느껴지는, 키보드를 경쾌하게 두드릴 수 있는 곡들을 주로 들었다.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의 '악단'을 '소리를 줄여서'들었다. 리듬감이 느껴지되 일할 때 방해는 안 됐으면 해서 말이다. '그럼 차라리 메트로놈을 켜고 일하지 그러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방법을 나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근데 그건 너무 정신병자 같지 않은가? 실제로 정신질환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걸 굳이 티를 내가면서까지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 가장 잘 알려져있는 빌 에반스의 모습. (1961) >



5. 빌 에반스 트리오의 연주를 듣다가 보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일으키는 부분들이 몇 군데 있다. 이 피아니스트는 관중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음을 연주해주다가도, 적당한 시기에 쏙 빠져서 다른 멤버들에게 바톤을 넘기는 기술이 남다르다. 상상해보자. 타고난 공격수가 환상적인 드리블로 상대편 수비를 다 제쳐놓았다. 골대가 앞에 있고, 누가봐도 슛을 때릴 것 같은 타이밍에―빌 에반스는 아름답게 패스한다. 중계 화면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와이드 오픈 상태의 팀원에게 공을 넘겨준다. 



<빌 에반스 (1964) >




6. 많은 사람들은 스타를 원한다. 왜소한 행성들을 집어삼키고, 홀로 눈부시게 빛나는 슈퍼스타에 열광한다. 그가 아닌 뜻밖의 선수가 득점을 기록하면, '뭐 앞서나가니까 좋기는 한데, 왜 저기서 패스 같은 걸 한 거야? 지가 해결해도 될텐데'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다.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다. 왜 본인이 밥을 다 해놓고 남한테 먹여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야말로 팀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중요한 순간에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팀이다. 



< 위와 동일 인물이다. (1978) >




7. 슈퍼스타가 있는 팀은 그 한두 사람만 틀어막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하나의 유기체로서 작동하는 팀. 각자가 자신이 필요한 상황과 해야할 일을 알고 있는 팀은, 훨씬 막기 어렵다. 빌 에반스는 자신에게 몰린 관심을 스콧 라파로Scott Lafaro에 넘기길 주저하지 않는다. 베이스도 드럼도 어떤 순간에는 조연 아닌 주연이 된다. 나는 빌 에반스를 통해 베이스와 드럼을 듣게 됐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하모니의 원리를 조금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 Waltz For Debby (1961) >. 빌 에반스와 스콧 라파로, 폴 모티안이 함께한 마지막 라이브였다.



8. 리드 악기에 뒤지지 않는 호전적 연주. 이례적인 천재성을 지닌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는, 빌 에반스와의 전설적인 라이브 앨범 두 장을 녹음한지 한 달만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헤로인에 깊이 중독된 빌 에반스는 1980년에 온갖 병변으로 고통에 휩싸인 채 죽었다. 그런 에반스의 죽음을 두고,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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