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같은 글
* 일러두기
- 이 글에서 다루는 게임은 아직 출시되지 않았다. 현재 시나리오 마감을 앞두고 있는 상태이고, 7~8월 출시를 목표로 잡아놓은 상태이긴 한데, 직접 개발하는 입장이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하여간 돈 받고 쓴 것이니 언젠가 출시가 되긴 할 것이다.
- 이런 과정을 통해 '아주 대단한 게임이 등장할 것'이라며 설레발을 떠는 글이 아니며(애당초 그만한 규모의 프로젝트도 못 된다), 많은 기대와 사전예약을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글도 아니다. 홍보가 목적이었다면 이보다 손이 덜 가는 방법을 썼을 것이다.
- 쓰는 데에 굳이 이유를 들자면, 게임 시나리오를 작업하면서 느끼거나 경험한 것들을 기록해두자는 의도 + 이렇게 하면 시나리오 마감작업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나 혼자 생각하고 쓴 내용이기에(당연한 말이지만) 게임개발사 및 관계자들의 동의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게임 타이틀 이외에 개발사의 이름, 이해관계자들의 신상 등은 간접적으로만 표현했다.
- 게임이 출시되고 나서도 '아 이게 그 게임이구나' 하고 한 눈에 알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일개 시나리오 외주작가일 뿐이고, 게임 출시광고를 하더라도 내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이 강조될 일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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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라는 일은 대개 뭉뚱그려져 생각되곤 한다. 가령 '누구누구가 글을 꽤 쓴다더라'고 하면, 그 사람이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 분야가 아닌 자기소개서나 졸업논문 그리고 기안서까지도 잘 써내리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똑같은 글쓰기인데 거기서 거기 아니냐? 그래도 글을 써버릇하던 사람이 쓰면 보통보다는 잘 쓰지 않겠느냐?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글에 대한 장르적 배려가 유독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문체라는 건 그림체나 촬영기법처럼 직관적으로 구분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의 종류는 정말 다양하지만, 눈으로만 봐서는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칼럼과 수필, 엽편소설과 산문시를 구분하는 것에 비하면 일러스트레이터와 만화가, 유튜브 콘텐츠와 장편영화를 알아보는 쪽이 쉽다.
소설을 쓰는 것과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범주에 있는 작업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 만화를 잘 그리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 그림을 못 그려도 만화는 잘 그릴 수 있고, 만화를 잘 그려도 그림은 못그리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소설과 시나리오도 그 엇비슷한 관계 같아 보인다. 요컨대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도 있게 꾸미는데 집중할 뿐이지만, 게임 시나리오의 경우 플레이어의 경험과 플랫폼 스타일에 따라 고려해야할 소재가 많다.
'생각해보니 딱히 글을 잘 써야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게임이야 재미만 있으면 그만인데……'
그건 제법 일리있는 생각이었다. 책과 달리 게임에선 글 말고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인터페이스, 조작감, 일러스트레이션, 그래픽, 상호작용 등등. 비문이나 맞춤법 오류가 몇 군데 있었다고 게임성이 아주 박살나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맞춤법이며 문장진행이 어색하다고 욕을 먹는 게임이라면…… 이미 다른 요소들로도 욕을 먹는 게임들 아닐까. 결국 '좋은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데 뛰어난 문장력이나 기발한 플롯구상이 아주 필수적인 요소는 아닐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한 상황은 조금 특수하다고 볼 수 있었다. 게임이 그냥 게임이 아니고 '텍스트형 로그라이크' 게임이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글을 어떤 방식으로 쓰는지가 게임 분위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무턱대고 달려드는 것보다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었다. 나는 연구삼아 개발사의 전작들을 설치해 하나씩 플레이해보았다. 몇 시간쯤 쭉 하다보니 어떤 스타일의 게임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글이 중요한 정도가 아닌데……?'
아닌게 아니라, 게임내 화면 대부분이 글로만 구성돼 있었다. 유저 인터페이스와 가끔씩 나오는 일러스트레이션 정도를 제외하면, 정말로 글밖에는 없었다. '텍스트형' 로그라이크라더니 과연 그랬다. 지랄맞을 정도로 글분량이 많았다. 왜 글작가를 찾는데 애를 먹었는지도 이젠 알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이걸 한 사람이 쓰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로그라이크 게임이라면, 플레이 회차에 따라 다양하고 지루하지 않은 전개를 다수 짜놓을 필요가 있었다. 너무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동시에 플레이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구상해야 했고, 뻔하지 않은 서사를 가져가되 지나치게 개연성이 없어서도 곤란했다. 여기까지만해도 충분히 골치가 아팠지만……
나로선 게임개발팀이 이 시나리오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딴에 아무리 잘 썼다고 쳐도. 정작 개발하는 입장에서 안 좋게 느껴진다면 '좋은 게임'이 만들어지긴 어렵지 않겠는가. 처음 의도와 다르게 완성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소통과정에서 크고 작은 마찰을 빚을 우려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외주 시나리오 작가인 주제에 '나는 내 방식대로 쓸 테니까, 너희는 내가 쓴 대로 만들기나 해' 라는 인상을 줘선 안 될 것 같았다. 개발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써갈겨대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나도 귀찮아진다. 할거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입장을 명확히 교환한다음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어수선한 와중에, 개발팀 사무실로 찾아가 직접 미팅을 가지기로 했다. 아무렴 전화나 카톡으로는 온전한 의사전달이 되지 않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람이랑 같이 하는 일'이라는 느낌을 받기 위해선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 무렵 개발팀은 새 게임 출시시기가 겹쳐 조금 바쁜 상황 같았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흔쾌히 업무미팅시간을 내준 것에, 세 명씩이나 나와서 내 기획에 귀기울여준 것에 살짝 감동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랬다.
내가 생각했을 때, 그 회사에 있어 나의 입지란 사이드 프로젝트에서의 업무관계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내게 너무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내가 이 일을 허투루 맡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좋은 게임'을 만드는데 상당한 열의를 가지고 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개발사와의 첫 미팅에서, 나는 A4 수십장 분량의 시나리오 샘플을 인쇄해 가져갔다. 그 중 한 뭉텅이는 내가 읽기 편하려고 제본을 맡겼다. 한데 다 뽑아놓고 내 것만 하기가 좀 민망했다. 두어부 정도 제본을 더 해서 가져갔더니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쪽에선 내가 이렇게나 많이 써서 가져올 줄 몰랐다는 눈치였다.
"처음부터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닌가요? 나중에 지치면 어떡하시려구……" 개발팀장(으로 보이는 분)이 농담섞인 질문을 했다.
"저야 글 쓰는 게 일이니까요. 돈을 받았으니까 뭘 쓰긴 써야죠" 내가 대답했다.
"알아보기 좋게 작업을 해놓으셨네요. 다른 데서도 게임 시나리오 작업을 하신 적이 있나요?" 마주앉아있던 기획자가 내가 준 서류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퍽 흥미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아뇨. 이게 처음이에요. 어렸을 때 게임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요……" 나는 어쩐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책도 낸 적이 있기는 해요. 《이번생 플레이 가이드》라고……"
"그게 뭔데요?"
"몇 년 전에 출간한 수필집이에요. 그러니까, 컨셉을 잡고 쓴 에세이죠. 우리가 사는 인생이 '엄청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 게임'이라면 어떨까, 하고"
"아. 저도 그런 생각한 적 있는데. 그, 실제로 게임 속 세상에 사람들을 만들어서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처럼요"
"「심즈」?"
"아, 맞아요. 「심즈」. 게임 정말 많이 하시긴 했네요. 어떻게 저보다 더 잘 아시고" 개발자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네, 뭐…… 어렸을 때 워낙 많이 하긴 했어요. 죄다 옛날 게임들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 책의 내용이 뭔가요? 대충 요약하면. 인생을 게임처럼 공략하는 방법 같은 건가요?"
"아뇨.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비슷한 게 나오긴 하는데 제가 뭐 잘난 게 있다고 인생 공략법을 알려주겠어요. 그보다는 사실관계를 재밌게 풀어냈다고 해야하나요……" 어떤 사실요,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중요하다고요. 그게 인생이든, 게임이든지요……"
"그래서 시나리오도 그런 내용인 거네요? 후회되는 인생을 몇 번이고 다시 살아보는"
"네, 맞아요. 《나비효과》라는 영화랑도 비슷해요. 후회되는 순간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거. 우리 세대에 그런 게 많잖아요. 그 때 학교에 안 갔다면 어땠을까, 공부를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것만 했다면 어땠을까, 늦게라도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봤다면 어땠을까…… 그걸 어떻게 '로그라이크'…… 아니, 하여간 그 비슷한 방식의 게임으로 풀어내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거 괜찮은데요" 기획자가 말했다. "딱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전개방식만 잘 가져가면 재미있게 나올 것 같아요. 제목은 직접 지으신 건가요?"
"아, 네. 그건 그냥 임시로…… 언제든지 바꿔도 상관없어요. 정말 생각나는대로 갖다붙인 거라서요" 나는 지레 당황한 채 대꾸했다.
"아뇨. 이것도 괜찮아요. 원래 제목은 생각나는대로 짓는 거니까요. 나쁘지 않아요"
"표지에 영문 표기를 같이 써놓으셨는데. 발음하는 방법이 있어요?" 옆에 앉아있던 다른 기획자가 물었다.
"따로 있지는 않아요. 그냥 읽히는 대로 발음하시면"
"「이즈라이프 IZ LIFE」?"
"……네, 맞아요. 그거에요" 내가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