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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12. 2022

영원에 관하여, 스탠리 큐브릭

13. Stanley Kubrick


1. “그 새낀 씨발놈이야.” 커크 더글라스는 스탠리 큐브릭과 함께 일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재능 있는 씨발놈이지.”     



스탠리 '씨발놈' 큐브릭. 1963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촬영 당시의 모습.



2.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나 한 번쯤 제목은 들어보았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나때는 교과서에서도 언급이 될 정도였다. 아무튼 그게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영화구나’ 라는 건 보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장르에 환장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는, 얼마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화면 앞에 앉아있었다. 《스타워즈》나 《마션》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이건 뭐랄까. 대체 뭐 때문에 그런 충격을 받게 되었는지도 설명하기 어렵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타이틀. 요한 슈트라우스의 '그 음악'이 삽입되었다. 들으면 다들 안다.



3. 말해두지만 그건 뭇 스릴러 영화에 등장하는 반전 같은 게 아니었다. 고의적으로 엿을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실없는 농담 따먹기도 아니다. 그 충격적인 ‘결말’ 전반에는 실로 비장하다고 해도 좋을 진지함이 일관되어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심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그 순간만큼은 개연성의 결핍이 무시되고, 영상이 가진 ‘무자비한’ 불가해성으로부터 압도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곧 큐브릭의 모든 영화를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큐브릭의 영화를 연속해서 보는 건 개인적으로 추천할 수 없다.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이 그런데, 이 양반의 영상은 대체로 머릿속에 있는 오만 잡다한 것들을 분자단위로 쪼개놓는 느낌이 든다. 시리즈로 볼만한 것들은 절대 아니다(대체로 러닝타임이 길기도 하고).  

   

4. 여하튼, 큐브릭의 세계에 난해한 점이 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만한 사실이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친절하거나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는 영화들뿐이다. ‘그렇게들 명작이라고 하길래 나도 봤는데, 솔직히 너무 지루했고 이해도 안 됐어’하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그건 당연한 현상이다. 제각기 가진 영화취향이라는 게 있는데다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호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인물이 ‘대중영화나 찍는 주제에 예술병 걸려서 천재놀이나 했던 감독’ 쯤으로 폄하되는 건 속상한 일이다. 만일 큐브릭이 무슨 척 같은 걸 했다면―깊이도 재능도 없는 감독이 예술적인 척을 한 것이 아니라―아는 게 지나치게 많은 감독이 대중적인 척을 했다는 쪽에 가깝다. 큐브릭만큼 매니악하고 집착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이, 대중성‘까지’ 갖춰나가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납득시키는 것이다.      



1975년.《배리 린든》을 촬영할 당시의 모습. 영화촬영에 너무 몰입해 탈모가 온 것 같다.



5. 스탠리 큐브릭은 병적인 완벽주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요소를 통제하려고 했고, 중요해보이지 않는 장면을 수십 번이나 다시 찍었으며, 영화적 연출과 편집에 지나치게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촬영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연기로 잘 알려진 《샤이닝》에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큐브릭은 여자 주연을 맡은 셜리 듀발에게 유달리 짜증스럽게 대했고, 모든 스태프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며 왕따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녀의 웬디가 늘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한 인상을 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쳐버린 잭 토렌스가 화장실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 얼굴을 들이미는 그 장면에서, 진심전력으로 경악하고 절규하는 웬디의 모습은 그렇게 탄생했다. 결과적으로는 큐브릭의 집착적인 디테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됐지만, 배우 본인이 겪었을 상처를 생각하면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싶기도 하다. 말그대로 유능한 씨발놈이다.     


6. 그래도 꿈보다 해몽이라고, 결국은 잘 된 다음에 이런저런 주석을 갖다 붙이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사실 이건 영화뿐 아니라 거의 모든 형태의 현대예술에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다. 한데 큐브릭에 대한 평가가 늘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던 같다. 《2001》 개봉 당시, 한 평론가는 ‘큐브릭 영화에서 뭔가 찾아낸다면, 아마도 마리화나를 빨아서 그럴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심지어 그의 영화에 투자한 영화사 경영진들도 “젠장 돈 날렸네” 하고 단체로 극장을 빠져나갔다. 지금이야 후대 영화감독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거장으로 남아서 각양각색의 해석과 음모론이 쏟아지는 상황이지만. 그가 ‘예술적으로 해석될 권리’를 얻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1957년. 감독 커리어 초창기. 《영광의 길》을 촬영할 때.



7. 큐브릭은 여러 분야의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재즈와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영화에 삽입됐고,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현대적인 조형미술을 카메라에 담았다. 또 18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한 《배리 린든》에서는 햄릿에서의 한 장면을 오마주하는가 하면, 자연조명의 사용이나 구도 등에서 베르메르와 호퍼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씬도 있다…… 사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다. 기왕 보는 거 눈치 채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지만, 그때그때 캐치하지 못한다고 해서 교양이며 독해능력이 부족한 인간이 되는 건 아니다.

     

8. 가령 큐브릭과 체스를 한 판 둔다 치자. 백으로 선공을 잡은 당신은 킹 앞에 있던 폰을 앞으로 두 칸 전진시킨다. 그럼 큐브릭은 삼십 초쯤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있다가, 오른쪽 비숍열의 폰을 두 칸 빼는 것이다…… 이것은 체스에 대해 잘 모르거나, 적당히 서양식 장기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소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다. 승부가 결정되는 중후반도 아니고, 첫 수부터 그렇게 고민하는 걸 보면 속이 답답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서 체스 좀 뒀다 싶은 사람이라면, 그 평범해 보이는 행마가 널리 알려진 오프닝 전술―즉, 시실리안 디펜스Sicilian Defense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나아가 공격기회를 쉽게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건 자신의 관심분야에서 찾을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큐브릭은 자타가 공인하는 체스 매니아이기도 했다. 윙크.   



1949년. 큐브릭은 '룩'에서 사진작가로 일했다.



9. 소비자가 ‘자신의 이해범주를 넘어서는 콘텐츠’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흔한 일이다. ‘대체 이게 뭐지? 나만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건가’ 라는 당혹감은 ‘지랄하고 있네. 이딴 병신같은 거에 지나치게 의미부여하는 니네가 이상해’ 같은 적개심으로 이어진다. 내 생각에 이런 현상은 어느 한 쪽의 잘못이 아니다. 그보다는 예술적 소양에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회분위기와, 그 속에서 무지한 인간으로 취급되고 싶지 않은 개개인의 충돌 같다. 하루가 다르게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가는 현대사회가 아닌가. 사람들에게는 자잘자잘한 것을 오랫동안 생각할 여유가 그다지 없다. 여가시간을 쪼개서 보는 영화에, 드라마에, 보다 단순명료한 재미를 바라는 건 잘못이 아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조로 말할 때는, 이것이 혹 교묘한 폭력이나 오만함의 표상이 되지나 않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0. 큐브릭의 영화를 본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는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상업 영화감독이니까. 반면 큐브릭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요즘 기준으로는 개봉한지 수십년 된 옛날 영화이고, 낯선 주제들에 상영시간도 길어 손대기 힘든 작품들이니까. 어쩌다 영화를 보긴 봤지만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래도 주눅들 필요 없다. 대다수는 당신과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보다보니 뭔가 재밌는 것 같다면, 평범함 속에 늘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마음에 든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본인 취향에 딱 맞는, 때마침 위대하고 독특하기까지 한 영화감독을 한 명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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