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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Dec 24. 2021

영원에 관하여, 피츠제럴드

12. F. Scott Fitzgerald


"Magnum Opus"



1. 피츠제럴드를 생각할 때면 으레 현기증이 난다. 물론 그는 내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껏 내가 읽었던 장편소설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사석에서는 피츠제럴드나 그의 작품― 특히『위대한 개츠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다. 좋아하는 것들이니만큼 즐겁게 얘기를 꺼낼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웬만해서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그건 그와 그의 소설이 충분히 위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방식으로 위대해졌기 때문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산층으로, 평생동안 자기 소유의 집을 가져본 적 없이 세들어 살다가 죽었다.



2. 창작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속칭 '작가양반'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은 무엇일까? '재미없다'나 '수준이 낮다', '재능이 없다' 같은 말로는 부족할 것 같을 때, 어떻게든 이 자식의 창작욕구며 예술적 성향 같은 것들을 때려 부숴 가루로 만들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어떤 말을 해야 가장 효과적일까? 내가 알려주겠다. 그건 바로 작가들의 인생이며 창작물들을 도매금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아~~ 피츠제럴드? 한 번 읽어봤는데 글이 너무 찌질하다고 해야하나, 문장이 길어서 별로던데?"

 "맞아. 난 헤밍웨이가 더 낫더라."

 "『위대한 개츠비』도 반쯤 읽다가 지루해서 다 못 읽었어. 그래도 영화는 볼만하던데."

 "나도 그건 봤어. 늘 생각하는 거지만 레오는 연기를 참 잘하는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런 유의 대화가 나오고 있을 때, 나는 일인칭 피츠제럴드 시점에 이입하지 않고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진이 빠졌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됐다. 피츠제럴드를 너무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는―그의 삶과 소설에 너무 깊게 이입한 나머지―그런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의 머리통을 술집 테이블 모서리에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이 빡대가리 새끼야!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한다는 소리가 겨우 '데이지 썅년' 이나 '아 개츠비처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일단은 성공해야되는데' 같은 것 뿐이냐? 넌 씨발 그 책을 읽은 게 아니야, 이 좆병신아! 그냥 있어보이는 외국 작가 이름에 고전 타이틀이 붙은 장르소설을 읽었을 뿐이지!! 기껏해야 영화나 보고, 인터넷에서 그 영화를 짤라 만든 짤방이나 몇 번 보고, 내용 요약된 영상이나 위키항목이나 좀 읽었다고 니가 『위대한 개츠비』를 다 이해했다는 듯이 지껄이지 말라고! 좆같다고!! 아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3. 나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저 자체가 주제넘는 발언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말에는 명분조차 확실지않다. 나는 정말로 피츠제럴드 대신 분노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세상이 다 아는 마스터피스를 앞에 놓고 '너희같이 저급한 개돼지들은 이런 명작을 이해할 능력이 없어' 따위의 말들을 지껄이며 알량한 문학적 허영을 누리려는 것인가? 정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면, 구태여 내가 나서서 변호할 필요가 있는가? 난 대체 뭐때문에 책을 읽는 것인가? 문학이 좋아서인가, 아니면 글을 읽어 남들보다 우아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흡족함 때문인가?


결국은 "맞아, 개츠의 아버지는 루터교 신자였지……" 같은 헛소리로 어물쩍 넘어가버렸다. 





데뷔 초기 피츠제럴드의 모습. 1920년.




4.  실제로『위대한 개츠비』를 탐독하는 데에는 서구문명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부분이 많다. 가장 폭넓게 알려진 이해라고 하면 미국으로 유럽계 이민자들의 동경과 모순 정도인데, 그걸 거슬러 올라가면 기독교 신앙의 분리와 아일랜드(더 넓게 보면 켈트)계의 인종적 영향도 연관된다. 그래서 아무 배경지식 없이 봤을 때는 '데이지가 개년이네' '사람들이 못 됐네' 정도의 감상으로 시작하더라도,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아득한 문학적 깊이를 실감하게 된다. 당장 '서쪽이 동쪽을 부러워한다'는 방향성만 알고 있더라도 달리 보이는 것들이 많다. 개츠비가 옥스퍼드라는 학력에 집착하는 이유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까지도 한데 엮는 게 가능해진다. 피츠제럴드Fitzgerald라는 성이 앵글로-노르만 계열로 분류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Fitz-'는 중세유럽어로 'Son of-'라는 뜻이다. 만일 그의 성이 제럴슨Geraldson이었다고 해도 『위대한 개츠비』와 똑같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우리가 다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큰 힘이.




말년의 피츠제럴드는 돈이 궁해 단편소설을 연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어떤 평론가들은 피츠제럴드를 역사상 가장 미국적인 소설가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만큼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서구중심적이며, 순전한 '그 시절 미국인'의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이 동양의 작은 반도국 사람들이 이렇다할 감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것은 사우디 사람들이 『소나기』를, 스위스 사람들이 『운수좋은 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 『위대한 개츠비』같은 소설을 피상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그들을 마땅히 미워하거나 무시할 이유가 될 순 없는 것이다. 그 때 내가 울적했던 이유는 피츠제럴드의 글과 그 술자리에서의 대화 내용이 놀라우리만치 겹쳐보인다는 점이었다. 


―시대는 이천이십년. 바다건너 미국의 치세를 동경하는 한국에서. 갈수록 번지르르해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단편적인 감상들이나마 지적소양으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 고독함이라고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지나쳐가는 음악들. 저마다 뚜렷한 행복으로 점철된 광고들. 세련되고 우아한 레스토랑의 영어 간판들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촌동네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온 어떤 소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해 청담동에 펜트하우스를 마련하고, 인기 DJ와 연예인들을 초대해 매일같이 파티를 벌이게 되는…… 언젠가 우연히 만났던 평창동 출신의 그녀를 그리워하며, 한밤중 발코니에 서서 남산타워의 불빛을 바라보는. 지금 어딘가에 살고 있을 대한민국의 개츠비를.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 1923년.



6. 마지막 문단에 와서 고백하자니 좀 낯부끄럽지만, 이 글은 얼마든지 더 길게 쓸 수 있는 글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는 자극적 소재는 그야말로 방대한 수준이어서, 이 부분에서는 친구인 헤밍웨이조차 거뜬히 능가할 정도다. 가령 지금은 가장 높이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가 작가생전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었으며, 피츠제럴드 생전에 거뒀던 가장 큰 성공은 데뷔작이었던 『낙원의 이편』이었다는 것. 중산층이었던 그가 베스트셀러 출간 직후에 귀족집안 자제인 젤다 세이어와 결혼에 골인한 사실이나, 그런 그녀의 낭비벽이 너무 심해서 잡지에 단편소설을 연재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는 것 등등…… 이더라도 나는 괜히 남겨두고 말 것이다. 왜냐니. 그야 나는 피츠제럴드 얘기를 하는데 익숙지 못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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