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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26. 2022

습작

백여든아홉번째


햇살 좋고 쌀쌀한 날

광명야구장 뒤꼍의

연초록색 풋살장 아저씨들

검은색 골무모자에 

깡마른 새치 듬성한 아저씨들     


난간 근처로 와서 침뱉고 헉헉거리고

발칵발칵 포카리 마신다음 이렇게 말한다

이야 이것 참 오늘 슛이 잘 안되네

먼젓번 찬 공은 잘 떴는데 말야

회전이 착착 감겼는데 말이야     


그게 프로리그 선수들이 쓰는 거야

그런 건 공이 하나에 수십만 원 짜리야

동네에서 뭔 짜가로 나온 거 차다가

그거 한 번 차면 돌아갈 수가 없다니까

평범한 공으로는 축구를 못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축구도 안 한지 오래 됐구나

남자애들은 이미 두 개씩 달고 다니면서도

공같이 생긴 동그란 걸 보면 사족을 못 썼는데

대뜸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오래된 것들이 축 늘어지며 떠올랐다     


구형 중의 구형 중의 구형

분명 살 당시에는 하얀색이었을

암울한 먼지색 아반떼 바퀴 옆에

늘 뒤룩뒤룩 살찐 길고양이처럼 

콱 박혀서 기다리고 있던 공     


주인이 누구인지

브랜드가 뭐였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아무한테나 뻥뻥 채이고 뜯겨서

털가죽이 수북하고 지저분했던 공     


또 그만큼 낡은 콘크리트 상가 건물에다

나흘 째 도깨비슛 연마에 정진하다가

눈코입 거꾸로 달린 코사마트 아줌마에게 

사정없이 빼앗겼을 때도 곧 돌아왔던 

바람이 항상 반쯤만 채워져 나뒹굴던 공     


그 볼품없는 공으로 리프팅 스무 개 하던

원래도 제기를 삼십분도 넘게 찼었던 형

이듬해 중학교 체육시간에선 세 개도 못했다더라

곧 터질 것 같이 빵빵한 낫소 축구공이라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더라며 웃었다더라     


모래먼지 풀풀 날리던 학교 운동장 

공이 붕―뜨면 문득 풍기는

운동장 쇳조각과 깨진 돌계단냄새

또 땀내로 푹석 젖은 체육복 티셔츠들

개처럼 뛰고 구르는 가짜들 레플리카들     


거기서 진짜로 놀라고 경악하고

와 진짜 축구선수 같다 진짜 너무 잘한다

그치 나도 돈만 있음 축구선수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고선 지도 웃긴지 씨익 쪼개댔던

더는 못 보는 그 형아 때문에 날이 추워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02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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