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든아홉번째
햇살 좋고 쌀쌀한 날
광명야구장 뒤꼍의
연초록색 풋살장 아저씨들
검은색 골무모자에
깡마른 새치 듬성한 아저씨들
난간 근처로 와서 침뱉고 헉헉거리고
발칵발칵 포카리 마신다음 이렇게 말한다
이야 이것 참 오늘 슛이 잘 안되네
먼젓번 찬 공은 잘 떴는데 말야
회전이 착착 감겼는데 말이야
그게 프로리그 선수들이 쓰는 거야
그런 건 공이 하나에 수십만 원 짜리야
동네에서 뭔 짜가로 나온 거 차다가
그거 한 번 차면 돌아갈 수가 없다니까
평범한 공으로는 축구를 못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축구도 안 한지 오래 됐구나
남자애들은 이미 두 개씩 달고 다니면서도
공같이 생긴 동그란 걸 보면 사족을 못 썼는데
대뜸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오래된 것들이 축 늘어지며 떠올랐다
구형 중의 구형 중의 구형
분명 살 당시에는 하얀색이었을
암울한 먼지색 아반떼 바퀴 옆에
늘 뒤룩뒤룩 살찐 길고양이처럼
콱 박혀서 기다리고 있던 공
주인이 누구인지
브랜드가 뭐였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아무한테나 뻥뻥 채이고 뜯겨서
털가죽이 수북하고 지저분했던 공
또 그만큼 낡은 콘크리트 상가 건물에다
나흘 째 도깨비슛 연마에 정진하다가
눈코입 거꾸로 달린 코사마트 아줌마에게
사정없이 빼앗겼을 때도 곧 돌아왔던
바람이 항상 반쯤만 채워져 나뒹굴던 공
그 볼품없는 공으로 리프팅 스무 개 하던
원래도 제기를 삼십분도 넘게 찼었던 형
이듬해 중학교 체육시간에선 세 개도 못했다더라
곧 터질 것 같이 빵빵한 낫소 축구공이라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더라며 웃었다더라
모래먼지 풀풀 날리던 학교 운동장
공이 붕―뜨면 문득 풍기는
운동장 쇳조각과 깨진 돌계단냄새
또 땀내로 푹석 젖은 체육복 티셔츠들
개처럼 뛰고 구르는 가짜들 레플리카들
거기서 진짜로 놀라고 경악하고
와 진짜 축구선수 같다 진짜 너무 잘한다
그치 나도 돈만 있음 축구선수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고선 지도 웃긴지 씨익 쪼개댔던
더는 못 보는 그 형아 때문에 날이 추워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02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