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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Dec 28. 2021

습작

백여든여덟번째

 “이렇게 큰 곰돌이 인형도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자친구는 선물을 받고도 불평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뭐랄까…… 생일 때는 좀 더 로맨틱한 선물을 받고 싶어……”    

 

 “젠장! 걔도 결국은…… 결국은…… ‘한녀’였던 거야!” 남자는 친구가 마주 앉아있는 것도 잊어버린 듯 분통을 터트렸다. “다른 친구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 여자친구만은 다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학생이야. 틈틈이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는 그게 한계였다고…… 누구보다 내 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 그것보다 더 비싼 선물을 사달라고 하다니. 이러니까 여자들이란…… 이 년이나 저 년이나 전부 사치에 허영에……”


 “좀 진정해. 너무 흥분했잖아.” 친구가 차분해지라는 손짓을 하며 남자를 만류하고 들었다.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냐고…… 젠장! 그 년이 나를 완전히 무시해버렸다고? 건방진 년 같으니. 군대 좀 기다려줬다고, 이 년 만에 태도가 이렇게 바뀌어버리다니.”


 “아니. 그건 너무 피해의식인데……”


 “뭐라고?”


 “막말로 네 여자친구…… 그 분이 더 비싼 선물을 사달라고 말한 것도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사준 곰인형만 해도 가격이 이십만 원은 넘는 제품이야. 실제 불곰의 삼분의 일 사이즈로 만든 거라니까. 실제로 보면 그 위압감이랄까…… 아무튼 엄청난 모델이야.”


 “근데 그건 니가 좋아해서 샀을 뿐이잖아…… 딱히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선물은 아닌 것 아니냐?”


 “그렇지만 여자들은 모두 인형을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곰인형 선물은 항상 성공하는 옵션이라고. 거기에 압도적인 퀄리티를 더해서 선물해줬다…… 이것보다 더 로맨틱한 선물이 어디 있냐? 결국 걔도 여자인거야. 한국 여자인거라고. 뼈빠지게 일하고 공부하는 남자친구한테, 뻔뻔하게도 샤넬이나 루이비통 가방을 생일선물로 요구하는 개년이었던거야…… 용서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하아, 군대가 사람을 이렇게 망쳐놓네. 전쟁은 정말 끔찍해……”


 “공익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남자는 좀처럼 진정할 기미가 없었다.


 “조금만이라도 이성적으로 생각을 좀 해봐.”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인 상태야. 빨간약을 먹고 매트릭스에서 깬 상태지.”


 “그 분이 너한테 딱히 더 비싼 선물을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좀 더 로맨틱한 선물을 받고 싶다’는 얘기밖에 안 했다며? 명품백 얘기는 하지도 않았구만.”


 “그 말이 그 말이지…… 뭐야, 지금 나하고 말장난하자고? 나는 이렇게 진지하게 이별을 고민하고 있는데?” 

 “솔직히 네가 헤어지든 말든 내 알바 아니야……” 친구는 자신의 이마를 탁 소리가 나게끔 쳤다. 그리고 어디서 심각한 폐병에나 걸린 사람처럼 죽어가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근데 내말은 좀…… 저능아처럼 구는 건 이제 그만 하라 이거야.”


 “저능아라고?”


 “애초에 로맨틱Romantic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는 있는 거냐? 너는.”


 “여자들이 말하는 로맨틱이야 뻔한 거지. 공유나 라이언 고슬링 같이 생긴 남자가 구찌 한정판 구두를 선물해주는 거겠지.”


 “이런 멍청한 자식ばか やろう!!”


 “으악!” 남자가 누군가에게 꿀밤을 맞은 건 지난 오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갑작스런 친구의 폭력에 몹시 당황한 나머지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왜 때리는 건데……?”


 “너는 말이야. 대체 카노조를…… 네 여자친구를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녀가 말한 로맨틱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뭐…… 뭐라고…… 그렇다면 내가 로맨틱이라는 말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다! 잘못 알고 있어도 한참은 잘못 알고 있지! 하지만 걱정하지마라. 수도권 사년제 인문대 재학생인 내가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까. 귓구멍 파고 똑똑히 들어라!”


 “으, 응.”


 “로맨틱이라는 건 말이야. 문자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로마양식의’라는 뜻이 된다…… 번역된 것도 마찬가지야!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십중팔구는 ‘낭만적인’이라는 뜻을 떠올리겠지. 하지만 ‘낭만’이라는 말도 알고 보면 로마Rome를 음차한 단어일 뿐이거든.”


 “그랬던 건가? 음……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한데?”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뭔가 이상하지. 현대인들은 낭만적인 것을 로맨틱한 것으로, 로맨틱한 것을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그 낭만이며 로맨스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니까. 그렇다면 정말 로맨틱한, 진정한 의미의 낭만적인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 질문에 답변하려면 원래 단어의 본질을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는 거지! 즉, 로맨틱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로마시대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는 거다!”


 “오……!!”


 “로마Rome…… 로마는 어떤 나라였는가? 그것은 말하자면 조금 긴 이야기이다. 우선적으로 로마는 남성 중심적 사회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여성은 그녀들 나름의 자율성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무지한 존재로 평가받았으며…… 어쩌구저쩌구”


 “오오……!!”     


 시간이 흘러 여자의 생일이 다가왔다. 남자는 여자친구에게 고가의 선물을 건네는 대신, 시민으로서의 명예와 권리를 건 일대일 검투사 대결을 제안했다. 결투는 받아들여졌다. 남자는 둔부에 치명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친구의 신고로 입건된 해당 사건에 대해, 경찰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데이트 폭력 사건’으로 결론내린 뒤 수사를 종결했다. 그리고 가해남성을 피해여성과 격리해 2차 피해를 예방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여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남자친구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너무 약해서 실망했다”고 발언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남자에게는 1년간의 집행유예와 함께 매 주말마다 성차별주의자 재사회화 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참여해 총 백이십시간의 양성평등 교육을 수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낭만적 로맨티스트」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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