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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31. 2022

영원에 관하여, 렘브란트

15. Rembrandt Van Rijn


뜬금없지만 파르테논 신전이다. 게임 속에서 직접 봤는데 생각보다 엄청 크다.



1. 사람들에게는 결과물이 아름다우면 과정도 ‘대충 그럴 거야’ 하고 생각해버리는 습성이 있다. 아니, 여기선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할 것 같은데. 아름다운 결과와 추한 과정을 좀처럼 연결 짓지 못한다고 해야겠다. 

 예를 들어보자. 왠지 아테네 신전의 아름다운 외관만 보면, ‘지중해의 푸른 하늘 아래서 덥수룩한 갈색수염을 가진 지식인이 토가를 걸치고 설계도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보며 부지런한 일꾼들에게 손수 지시를 내리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어째 교육용 만화나 교과서 삽화로 들어가 있을 것 같은 그림이다.

 여기서 고증오류를 일일이 따지고 들면 끝이 없겠지만. 일단 고대 그리스 사회가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인식과는 달리 대부분의 노동력을 외국인 노예에 의존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당시 현장관리자는 설계도면이나 스크롤이 아닌 채찍을 들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 도리어 단순무식 노동착취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피라미드 건설현장’이 알고 보면 민주적인 면이 있었다고 하니, 뭐든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금언은 예술에도 충분하게 적용돼야할지 모르겠다.      



<자화상>. 1628년. 이때 렘브란트는 스물두 살이었다.




2. 렘브란트를 두고 ‘빛의 마술사’라 부르며 찬탄하는 건 일종의 인사법처럼 돼있다. 칭호부터가 야구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들에게 붙인 것―‘타격기계’라든가, ‘돌직구’같은―처럼 유치한 건 그렇다 치자. 별명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렘브란트가 바로크 시대의 대화가라는 데도 이견의 여지는 없다. 문제는 어째서 ‘빛’인가 하는 점이다. 당대의 다른 화가들이 회화에 명암을 넣을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렘브란트에게는 다른 위대한 점도 많은데 말이다. 이거는 마이크 트라웃을 ‘외야수비의 괴물’이라고 부르는 느낌 아닌가. 물론 트라웃이야 외야수비도 잘 하지. 잘 하는데. 그게 다는 아니잖아.  



<방 안의 남자>, 1630년. 사진도 마법도 아닌 그냥 그림이다.



3. 트라웃 말고도 수비 잘하는 선수가 제법 존재하듯이, 역사 속에서 명암표현을 잘하는 화가를 말하자면 꽤 많은 이름을 열거할 수 있다. 그 좁은 네덜란드만해도 훌륭한 케이스가 넘쳐날텐데, 왜 하필 렘브란트일까? 고흐는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힙하지 않고, 얀 베르메르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보다 못한 화가이며, 반다이크는 리버풀의 축구선수인 한편 루벤스는 딱히 네덜란드인도 아니고 붓 만드는 회사 이름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다만 나로선 그저 내가 본 적 없는 어느 미술 전시회나 지상파 교양예능에서 관용어구로 쓰였던 것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뿐이다.     



 <야경>, 1642년.



4. 아무튼 렘브란트가 빛을 활용하는 방식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얘기가 나오면, 체감상 팔구십퍼센트의 확률로 나오는 그림이 「야경The Night Watch」이다. 이 ‘야경’이라는 제목에는 다소 함정이 있는데, 밤의 풍경Night view이 아니라 야간순찰Night Watch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여수바닷가의 야경’이 아닌 ‘야경국가’ 할 때의 그 야경夜警이다. 심지어 밤도 아니고 해가 떠있을 때 순찰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물감 때문에 어두워보였던 것을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가 오인한 나머지 ‘야간순찰대인가보다’ 했고 그게 정식 제목처럼 굳어버렸을 뿐이다. 이 그림과 관련해 진정 어두운 것이라고는, 알고 보면 당시 렘브란트가 처해있던 상황밖에 없는 것 같다.     


5. 1606년, 렘브란트 판 레인은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인이 되선 동네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 자퇴했고, 고향을 떠나 대도시인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초상화가로서 많은 돈을 벌었다. 이 상업적인 성공을 통해 부잣집 딸과 첫 번째 결혼에 골인하기도 했는데(왠지 피츠제럴드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비교적 일찍 부인이 폐결핵으로 죽으면서 큰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젊고 잘나가는 화가에 이젠 돈까지 많아버리니 ‘이제 팔자 폈네’ 싶을 사람도 있겠지만. 그동안 네 명의 자식 중에 세 명이 죽어나간 데다가, 병상에 누운 부인을 몇 번이나 그렸던 만큼 돈만 보고 결혼한 부인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어디로 보나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첫 번째 아내. 어느 부유한 상인의 조카였다고 한다.



6. 하지만 그가 두 번째 부인을 만나게 된 경위를 보면, 솔직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내가 병으로 누워있는 동안 간병인 겸 막내아들 돌보미로 고용한 여자와 놀아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렘브란트는 아내가 생전에 갖고 있던 패물까지 선물로 줬다. 근데 그걸 전당포에 저당 잡혔다는 걸 알게 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녀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고도 했다. 나중에는 간통죄다 뭐다해서 매년 이혼수당을 지급해야하는 처지가 됐는데, 뭐 이건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서 불쌍하지도 않다.  




<막내의 초상>. 1653년.



7. 설상가상으로 렘브란트의 인기는 해가 갈수록 떨어졌다.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초상화가로서는 점점 퇴물이 되어갔다. 마침 네덜란드에서는 미술시장의 일대변화가 일고 있었다. 돈 많은 귀족 자제들, 즉 전통적인 예술의 후원계층에게서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벼락부자나 고리대금업자의 요청에 따라 작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에 위의 「야경」만 해도 그런 맥락에서 그려진 감이 있다. 묘사된 대상만도 동네 자경단원들인데, 인물들의 면면도 뭐랄지 개별적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한데 묶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로 치면 한때 A급 모델만을 전문으로 찍던 사진작가가, 경쟁자가 많아지고 삶이 궁핍해지니 무슨 ‘○○동 자율방범대 27기 회원 기념사진’ 외주를 받은 느낌 아닐까. 일종의 공동구매인 것이다. 제일 중간에 있는 아저씨는 누가 봐도 대장이고, 그 오른쪽은 목소리는 안 큰데 돈은 많이 내는 부회장이나 총무쯤 되는 사람이겠지(아마도 아님).



<자화상>, 1660년. 아무래도 세월을 정면으로 맞은 듯한 모습.



8. 두 번째 부인과도 틀어진 렘브란트가 세 번째로 만난 여자는, 이번에도 가정부 출신이었다. 그렇게 데여놓고도 똑같은 짓거리를 하다니 돌봄노동 패티시라도 있었던 게 아닌지 의문스럽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결혼은 하지 않았다. 한 명 남은 아들에게 손절 당할까봐 조심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말년에는 아내와 아들이 조력자 역할을 했다. 이들은 가짜회사를 세워가면서까지 물심양면으로 렘브란트를 도와줬는데, 어째서인지 렘브란트는 계속해서 가난해져만 갔다. 날리던 시절의 소비습관이 몸에서 떨어지질 않았고, 돈 좀 불려보겠다고 투자한 곳은 족족 말아먹곤 했다. 그림은 계속해서 그렸지만, 얼마나 장사가 안됐던지 그림값을 올릴 요량으로 자기 그림을 스스로 사재기하기도 했단다. 말년에는 주택담보대출을 못 갚아서 집과 수집품을 압류 당했다. 지금과는 시대가 다르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으레 떠올리곤 하는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모습과는 괴리가 있다. 그것이 렘브란트처럼 인류역사에 남을 대화백이라면 더욱이 매치가 안 된다. 그나마 도움을 건네주던 아내도 아들도 모두 죽었을 때, 그는 혼자 살아남아 그림을 그렸다. 1669년, 죽음을 맞이할 당시 그가 가진 재산이라곤 그림 그리는 도구들과 헌 옷 몇 벌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9. 그토록 황홀하고 찬란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 본인의 인생은 크게 낭만적이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내놓은 결과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보다 더 추하고 하찮은 과정에서 말미암았다. 어쩌면 렘브란트는 시대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그림쟁이가 왕실과 귀족에게 붙어먹으면 그만이었던 시대에서, 어떤 면에선 더욱 횡포하고 냉정한 대중에게로 넘어가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눈부시게 떠오르며 빛나다가 까마득히 침몰해 죽었다. 그런 그가 살면서 가장 많이 그렸던 초상화는 자기 자신이었다. 부침을 거듭했던 한 화가의 인생. 남루하고 해쓱해지는 옷차림 속에 결코 꺼지지 않는 눈, 빛. 렘브란트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하고 있다.                




<자화상>, 16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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