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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08. 2022

여로에서 (3)

잃고, 잃고, 또 잃어간다


 매우 달콤한 꿈을 꾸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잠에서 깨는 것이 무척 힘들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히힉, 히히힉.”

 머저리같이 샐쭉거리면서 감각을 더듬었다. 이건 평소와 다른 이불, 침대, 베개의 냄새… 아. 나 러시아 왔었지.





 방에 있는 창문은 차광이 시원찮았다. 극동의 햇볕이  혼자 있는 3인실을 관통하듯 비추고 있었다.  이상  수는 없을  같았다. 체크아웃도  쯤에 한다고 말해뒀던 차였다.

 거실로 나가보니 나 말고는 전부 볼일을 보러 나간 모양이었다. 호스텔인지 도미토린지 모르겠는데 그냥 혼자 쓰는 집처럼 느껴졌다. 사람 마주치는 게 무서운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어슬렁거리며 화장실로 가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그 추운 와중에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속옷 일부분에서는 아주 대단한 냄새가 났다. 너무 괘씸한 냄새라서 갈아입자마자 입고 있던 건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어차피 헐값주고 사서 오 년은 입은 속옷이다. 짐도 줄일겸 버리는 것도 괜찮은 선택 같았다.

 ‘신기하네. 원래는 물건 버리는 게 힘든 성격인 줄 알았는데.’

 환경이 바뀌면 성격도 왜곡되는 것 같다. 기후가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극적인 변화인 것 같은데….

 너무 늦게 방을 비워주면 주인 입장에서 곤란할 테니까, 가능한 빨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러시아 건물에는 문이 많다. 현관으로 나가는데만  개의 중문을 통과해야한다. 신발을 갈아신고, 중문을 통과해서 마지막 현관문을 열어젖히려던 차였다.

 , 뭐야. 이거   열리지.



 엄청 육중하게 생긴 철문이었다. 한국에서는 편의점 냉동실 입구로나 쓸 것 같은 그런 문인데. 문제는 열리지가 않았다. 방문과 호환이 되는건가 싶어 부랴부랴 키를 들고왔다. 열쇠가 들어갈만한 곳이 없었다. 카드키도 아니었다. 미닫이 여닫이 다 시도해봤지만 어림없었다.

 내가 왜소한 동양인이라서, 힘이 부족해서 문을 못 여는 줄 알고 몸통박치기까지 시도해보았으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현관문을 열면서도 수련을 하는 것일까. <헌터X헌터>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이 기억난다. 곤과 키르아도 넨을 배우고 나서야 문을 열 수 있었더랬지. 넨은 커녕 제대로된 운동에너지도 없는 나는 무리다. 영락없이 호스텔에 갇혀버렸다.

 사람을 가두는 에어비앤비 숙소가 다 있네. 세상 참…

 내가 체크아웃을 너무 늦게 해서 화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뭔가 대화는 시도해봐야겠다 싶어서 영어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나 체크아웃하려고 하는데 문이 안 열리거든. 나 어떻게 나감?’

 하지만 답장은 십 분 넘게 오지 않았다. 마침 점심식사 때니 밥을 먹고 있을 것 같았다. 밥먹는데 이런 멍청한 질문을 보내다니. 난 정말 구제불능 김치맨이야… 라고 자책하고 있을 쯤 답장이 왔다.

 ‘아 그거 왼쪽에 스위치 누르고 열어야해.’

???

…그 스위치인가?

누가 봐도 비상호출벨처럼 생긴  스위치가 문을 여는 버튼이었던 것이다. 이미 눌러보긴 했는데 아무 목소리도  들려서  의미없는 건줄 알았다. 다시 눌러보니 !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철문은 어처구니없이 쉽게 열렸다. 경첩이 얼마나 기름칠을 해댔던건지 깃털처럼 가볍게 젖혀졌다. 수련이 아니었잖아. 그냥 로스트 테크놀로지잖아.



애플 지도는 보기에만 깔끔하지 제대로된 정보가 없없다. 믿을 건 구글 지도 뿐이다. 환전소를 검색해보니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어두울 땐 몰랐는데, 날이 밝으니 이 숙소는 역이며 도심부에 꽤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 해가 떠서 그런지 별로 안 춥네. 견딜만 한 것 같은데.’

 라고 오 분정도 생각했다. 알고보니 실내에서 몸을 덥혀 나온 탓에 감각기관이 마비됐을 뿐이었다. 눈부시게 밝은 블라디보스토크 거리 위로 바람이 씽씽 내달렸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쯤엔 얼굴 전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다.

환전소 사람도 영어를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제 그 택시기사놈보다는 나아서, 손짓발짓 다해 달러를 루블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받아든 지폐들은 가지런히 정리해 가방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현지에서 통용되는 현금이 생기니 뭔가 부자가 된 느낌이 든다. 일단은 배도 고프고, 몸에 기운도 없고 하니 가까운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나 말고 외국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인테리어는 묘하게 한국에 있는 카페와 비슷하다. 어디 성수동 구석진 골목에 들어가면 한 곳쯤 있을 법한 느낌이다.

 어찌저찌 따뜻한 커피를   시키는데 성공했다. 카페 주력 상품이 케이크인 모양이어서 케이크도 하나 주문하기로 했다. 원형 케이크라곤 해도 지름이 손바닥만하게 작아서, 겉보기엔 그냥  카스테라처럼 보였다. 점원이 ‘ 조각이냐, 아니면 통째로냐라고 묻길래 그냥 하나  달라고 했다.어젯밤부터 먹은 거라고는 각설탕  개가 전부라서, 배가 매우 고팠던 것이다. 그정도 빵은 거뜬하게 먹을  있을  같았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서빙해온 걸보니 엄청 꾸덕꾸덕한 치즈케이크라는 것이 판명났다. 빵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밀도가 벽돌수준이었다. 많이 먹는다고 먹었는데 절반밖에 먹지 못했다. 그만한 사이즈 주제에 ‘조각으로 줄까’하고 왜 물어본 것인지를 깨달았다. 어째 계산해주는 점원 표정이 의미심장하더니. 속으로는 내가 치즈케이크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겠지. 그야 싫어하지는 않지만….

 난데없는 치즈파티를 벌이고 나오니 짭짤한 음식이 간절해졌다. 특정한 메뉴까지 떠올랐다.

 ‘…제육덮밥 먹고싶은데’

 그러나 러시아 도심에 김밥천국이 있을리 없다. 그래도 당은 채웠으니까. 되는대로 만족하고 다음 선택지를 골라봤다. 내게 산적한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나가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문제는 캐리어가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바퀴가 네 개나 달려있지만 계단이 있을 땐 손잡이로 들고 움직여야 했다. 또 이런 걸 질질 끌고다니면 누가봐도 여행객처럼 보이기 때문에 호객행위며 소매치기에도 취약해질수밖에 없다. 요컨대 형편없는 기동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역에 물품보관소가 있는 모양이었다. 철도역은 걸어서 이십  거리였다. 바깥은 여전히 추웠지만  택시를 타긴 싫어서,   없이 걸어서 이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제정시대 관청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문화역서울 같은 인상에 크기도 비슷했다.들어가는데 소지품 검사 비슷한 걸 했다. 기차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일까. 웬만한 비행기들보다 탑승시간도 훨씬 기니까 그럴 법 했다.

 내가 예약한 하바롭스크 열차는 밤 열한시에 출발, 현지시간 기준 다음 날 오후 한 시 좀 넘어서 도착할 예정이었다. 탑승하기까지 시간이 정말 많이 남아있었으므로, 캐리어 보관시간을 최대값인 여덟시간으로 설정해놓았다. 노트북 가방에는 보조배터리 등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겼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양심적으로 이동하기가 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나는 비로소 이족보행을 배운 인류처럼 양손의 자유를 만끽했다. 몸도 가벼워졌겠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추위는 여전하고 얼굴은 따가웠지만, 계속 그렇게 걷다보니 감각이 무뎌져서 그럭저럭 견딜만해졌다.

 러시아 길거리에서 받은 첫 인상은 ‘건물들이 하나같이 큼직큼직하다’는 것이다. 한국이었으면 크고 작은 건물이 예닐곱채는 늘어섰을 블록을, 한두 채의 길쭉한 건물로 메워놓았다. 외관은 좋게 말하면 기본에 충실하고, 나쁘게 말하면 다소 개성없고 틀에 박힌 편이다. 우리나라로치면 지방법원이나 교외 중견병원 입원동 같이 생긴 건물(팔구십년대에 지어 리모델링없이 쭉 쓰고 있는 그런 것)이 러시아에선 기본값인 것 같았다. 가게 간판들도 화려하지 않다. 그래서 건물의 용도를 알아차리는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중에 문득 눈에 들어오는 간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한식당 ‘명가’>였다.



‘말도 안 돼… K-푸드가 이런 곳까지 침투했단 말인가?’

 심지어 매장 디자인조차 한국적이었는데. 기존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1층 전체를 기왓집처럼 개조해놓은 모습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전형적인 한국식 식당이 아닌가. 나는 냉큼 길을 건너갔다.

 현관문부터 눈을 잡아끄는 한글. 아, 이렇게 정겨운 글자들이라니. 새삼스럽지만 한글은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인가? 러시아 키릴 문자처럼 냉혹하고 폭력적인 면이 전혀 없이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아마도 그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겠지.

 한식당 ‘명가’의 종업원은 러시아인이었다. 하지만 메뉴는 한식에, 설명도 한글로 적혀있어 주문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가장 기뻤던 것은 메뉴 최상단에 ‘제육덮밥’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 되먹지 못한 욕구가 현실로 반영되는 것을 경험하자니, 과연 ‘신은 존재한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러시아이니까, 신이라고 하면 러시아 정교의 신이겠지만….

 나는 제육덮밥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더욱 한국적인 맛이었다. 생맥주도 두 잔이나 마셨는데, 기차시간도 많이 남았고 하니 여기서 글을 좀 쓰다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원고를 조금 쓰고, 어제오늘의 기록을 간단하게 메모해뒀다.

 저녁 무렵 한식당 ‘명가’를 빠져나온 나는 완전히 사기가 올랐다. 엄밀히 따져보면 취기였겠지만. 어쨌거나 러시아로 온 뒤 처음으로 의욕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 기운을 빌려 블라디보스토크를 두 시간쯤 걸어다녔다.

 연해주국립미술관이라는 곳에 가서 전시도 봤다. 입장료는 오백루블이었다. 문닫기 직전에 들어가서 아주 자세히 보지는 못했는데, 대부분 18-20세기의 러시아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이었다. 모르긴 해도 동시대 서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 어떤 것들은 영락없이 모네나 세잔의 모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미술관에서 나와 조금 더 걷자 ‘편의점’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러시아어로는 ‘미니마켓’이라고 발음되는 그 가게는 사실상 한국 가게나 다름없었는데, 초코파이와 컵라면은 기본이고 새콤달콤까지 구비돼있었다. 작은 초콜릿바 하나와 칫솔세트를 사서 나왔다.

 짙은 초코향과 함께 폭발하는 혈당. 내친김에 바닷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제국이 애지중지하던 부동항이다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근데 바다가 얼기도 하나? 강물도 아니고 바닷물인데? 한강이 얼었다는    들었어도, 인천이나 강릉 앞바다가 얼어붙었단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 그만큼 추워서 취항이 어려웠다는 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항구근처까지  걸어갔다. 삼십분  걸렸던  같다.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는 얼어있었다.

 ‘뭐야. 부동항이라며…’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평선 부근까지 꽁꽁 얼어붙어있는 바다가 눈앞에 와락 펼쳐졌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대개는 가족끼리 산책을 나온 것처럼 보였다—그 얼어붙은 바다위를 한가롭게 거닐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해안가 바로 옆에도 공원이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 꽁꽁 언 바다를 공원부지의 연장 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살면서 바다는 꽤 자주 봤지만… 그렇게 아스팔트처럼 꽝꽝 얼은 바다를 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신기한 나머지 바다 먼 곳까지 걸어나가기도 했는데, 갈수록 해풍이 거세지는데다가 해까지 저물어서 돌아나와야 했다.

 역으로 돌아가는 길도 멀고 험해서 얼어죽는 줄 알았다. 기껏해야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어디로보나 자연스럽게 얼어있는 것 같은’ 빙판 위에서 아이스하키를 즐기는 모습도 봤다. 나의 나약함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혹한을 뚫고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돌아와 짐을 찾았다. 역근처에 케밥 가게가 있어 늦은 저녁겸 사먹었다. 이백십루블에 맛도 양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이후로는 로비 벤치에 앉아 열차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러시아 아이들은 말이  나올 정도로 귀엽게 생겼다. 다만 귀여운만큼이나 활동적이고 시끄럽기 때문에, 나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려고 했다.




 그런데 에어팟이 어디로 갔지?

 케이스는 그대로인데 내용물이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앉아있던 자리 근처에 떨어트렸나 싶어서 허둥지둥 살펴봤으나 어디에도 에어팟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훔쳐갔구나!’

 노트북 가방에 케이스를 매달아놓고 다녔다. 한국에서는 몇 년을 그러고 다녀도 그대로였지만, 러시아에서는 너무나 슬쩍하기 쉬운 사냥감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말그대로, 눈으로 뒤덮은 정글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역 한 가운데 주저앉아 절망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난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나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역시 지금이라도 귀국행 비행기를 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먼 나라로 도망치더라도 그 법칙만큼은 변치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고 여기에 왔다….

 다른   털리더라도, 심지어 입고있던 옷을 빼앗기더라도 가방만큼은 간수해야겠노라 다짐하면서.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칸 위로  발을 내딛었다. 철길 너머는 까마득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승무원과 탑승객들은 모두가 피곤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현지시간은 자정을  지나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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