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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09. 2022

여로에서 (4)

무리해서 좋을 건 없다



내 불면증은 올해로 네 살이 됐다.

 내 경우 약없이는 수면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실정이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고 지난 몇 년간 쭉 그랬다. 수면제와 관련해서는 이러저러하게 사고를 친 이력이 있어 말을 조심하게 되는데(웃음), 나는 매일밤 정해진 시간에 약울 먹고 자리에 눕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은 새벽 두 시에 깨버리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오후가 되도록 정신을 못차리는 경우가 있으니 그 이상의 일관성은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불면증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바가 한 가지 있다. 불면증이라는 것 자체가 ‘충분히 피곤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시적 증상이라는 것이다. 이말인즉 ‘하루를 충실히 살았다면 잠이 솔솔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다. 불면증상을 에너지 과잉이나 활동력 부족으로 치부해버린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불면증이라는 건—최소한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수면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만 의식을 내려두고 싶은데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험 전날 에너지드링크를 왕창 마시고 밤샘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가? 레드불이나 몬스터는 원래 효과가 좋은 음료수들이지만, 그 효과가 지나친 나머지 이튿날 해가 밝아 시험이 끝난 뒤에도 잠이 오질 않는다면 어떨까. 심신은 피로한데 모종의 각성상태가 이어져 쉴 수 없는 상태, 이른바 좀비처럼 그 어떤 활력도 원기도 없이 깨어있기만 한 상태. 그런 상태가 매일밤 이어지는 것이 바로 불면증이다. 가끔씩 큰 맘 먹고 약을 끊어보려고도 해보지만, 며칠간 밤낮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고나면 자연스레 약을 다시 찾게 된다.

 해서, 러시아에서 갖은 고생을 한 나는 수면제 없이도 솔솔 잠에 빠져들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 자신조차 일말의 기대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병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병인 것이다.

 나는 하는  없이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서, 다음  오전 열한시가 돼서야 겨우 일어났다.



 다만 잠 자체는 푹 잤다. 사람들의 코골이 소리며 이른 오전부터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푹 잠들기가 어렵다는 후기가 많던데, 나는 약의 힘을 빌려서 그런지 몰라도 아주 숙면했다. 불규칙적으로 기차가 흔들리는 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내게는 기차에서 자는 게 더 적성에 맞는 수면일는지도 모르겠다.

열차내부에는 와이파이도 없고, 다른 무선 인터넷 연결도 거의 안 된다고 봐야한다. 이따금 크고 작은 역에 정차했을 때나 잠깐 데이터가 오갈 뿐이다.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하기까지 약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세수와 양치 그리고 자리 정돈을 끝낸 후 노트북을 펴서 글을 조금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승무원이 다가와 뭐라 말하는 것 같더니, 내가 못 알아들은 내색을 하자 짧은 영어로 “하바롭스크, 레프트 피프틴 미누뜨” 하고 안내했다. 대충 도착까지 십오 분 남았다는 얘기였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나는 빠르게 이동하는 교통수단 위에서 글에 몰입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자판기를 찾았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탓인지 무척 허기가 져서, 급한대로 초콜릿바 하나를 뽑아 와그작와그작 씹어 삼켰다. 가격은 팔십오 루블이었는데, 동전을 찾겠답시고 가방을 마구 뒤지나가 여권용 사진에 손톱 안쪽이 찔려 피가 났다.  상처는 아니었지만 왈칵 짜증이 나서,  상처입힌  사진을 구기고 찢어 초콜릿 포장과 함께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



 하바롭스크의 현지 기온은 영하 이십팔도였다. 과연 숨을 쉴 때마다 뼈 사이사이로 한기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하늘이 맑고 바람이 덜 불어 간신히 걸어다닐 정도는 됐지만. 밖에 오랫동안 있을 일은 아닐 것 같아서 곧장 숙소로 가는 택시를 호출했다. 이번엔 제대로 앱을 사용했다. 호객하는 택시기사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걸어서 사오십분, 차로 가도 이십분인 거리를 얀덱스 택시기사는 백오십루블만 받고 안전하게 데려다줬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그 새끼’에게 준 돈이면 똑같은 서비스를 수십 번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할수록 열불이 치밀어 땀까지 흘렸다.

 러시아 택시에 대한 불신이 싹 사라질만큼 빠르고 정확한 여객이었다. 나는 숙소 건물 코앞에 짐가방과 함께 떨어졌는데, ‘이 건물이 정말 숙소가 맞나’하고 지도앱을 켜서 두어차례 확인했다. 왜냐하면, 거긴 뭐랄까, 적어도 겉보기엔 경기도 외곽의 폐병원 같은 외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계단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왜, 래퍼들이 뮤직비디오 찍을 때 빌리곤 하는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 같은 거 말이다.

그런 건물 삼층에 아늑하고 따뜻한 호스텔이 있다니도착할 때까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역시 이번에도 잘못 배달된  아닐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낑낑 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파블리카 호스텔.

 스웨터 차림의 젊은 여자가 문을 열어줬다. 길게 늘어트린 금발에 눈이 예쁜 미인이었다. 이름은 안젤리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능숙하진 않아도 떠듬떠듬 영어를 하며 안내해주는 것이 매우 친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체크인을 위해 여권이 필요하다길래 금방 꺼내줬다.

여권에서 내 국적을 확인했는지, 안젤리나가 나더러 ‘하바롭스크까지 웬일이냐, 공부하러 온거임? 아니면 여행?’ 하고 물어왔다.

 “아니. 공부는 아니고.” 내가 말했다.

 “그럼? 비즈니스?”

 “에, 뭐, 굳이 말하면 그렇지.”

 “그게 뭔소리야”

 “나 작가거든. 글 쓰는 직업이라.”

 “오?” 안젤리나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내가 작가입네’ 하고 거들먹거린 것 같아 자괴감을 느꼈다.

 …근데 달리 어쩌겠는가? 작가 말고는 딱히 갖다붙일 직업이 없는데. 취미로 글을 쓴다고 했다간 한량백수로 여겨질 것이 뻔하고.좌우지간 글을 써서 돈을 벌어먹는 건 맞으니까 작가라고 하지뭐… 라고 혼자 결론 내렸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작가양반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해외에서의 나는 라이터, 그냥 작가라고 하고 다니기로 했다. 양해바란다.

 안젤리나는 이국의 작가(나)에게 적잖은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영어 실력에는 한계가 있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다간 또 나도 모르게 거들먹거리는 모양이 될 것 같아서 후다닥 인사하고 방에 들어갔다.

 짐을 정리한 다음 카운터에 나갔더니 안젤리나가 다시 인사해왔다. 나는 그녀에게, “요 근처에 식사할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 이 근처에는 없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근데 여기 주방이 있어서 간단한 요리는 해먹을 수 있음”

 요리라고 해봤자 식재료랄 것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좋은 주방이 있어도 지금의 내겐 무용지물이다.

 ‘흠, 그럼 어떡하지. 다시 택시를 타고 나갈 수밖에 없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카운터 옆에 작은 스낵코너가 마련된 것이 보였다. 그 중간에는 익숙하고 익숙한 실루엣의 박스가 하나… 초코파이잖아.

 “이거 여기서 파는 거임?” 내가 물었다.

 “당연하지. 한 박스 줄까?”

 나는 여섯개들이 초코파이를  박스, 육백미리짜리 생수를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롯데 초코파이인 점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러시아까지 와서 브랜드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므로 잠자코 베어물었다. 몹시 한국적인 과자빵 테이스트에 눈물이 질끔 날뻔 했다.



 그대로 방안에 퍼질러 누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충 쓰고 나니 저녁이 돼있었다.

 ‘아무리 경유지라고는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역과 숙소만 오가는 것도 하바롭스크에게 실례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길로 택시를 불러 도심으로 건너갔다. 닛산 로고가 달린 검은 승용차가 ‘칼 마르크스 대로’를 달려 ‘레닌 광장’에 도착했다.

 뭐지, 이 사회주의 락원 같은 곳은?

 하바롭스크 중심에 위치한 레닌 광장에는, 당연하게도 블라디미르 레닌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같은데. 어째 러시아에는 어딜 가든 레닌 동상이 하나씩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전부가 포켓스탑이겠지. 러시아에는 포켓스탑으로 쓸만한 구조물들이 매우 많다.



 광장에는 얼음으로 조각한 기념물들이 많이 있었다. 얼음 미끄럼틀도  군데나 마련돼 있다. 얼음계단을 뒤뚱거리면서 올라가 주르르 내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어쩜 추위 내성에도 조기교육이 필요한 건지 모른다.

바람이 심하지 않아서 좀 더 걷기로 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특히 횡단보도 앞뒤가 꽁꽁 얼어있어서 조심조심 걸어지나갔다.

 러시아에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우리나라만큼 많지 않다. 대개는 지하통로나 육교를 통해 건너는 모양이었다. 그마저 없으면  왔다갔다 하는  보고 눈치껏 건너라는 식이다.  앞이나 통행이 잦은 교차로에는 하나씩 놓여있긴 하다. 그렇지만 그것도 마지못해 세워놓았다는 느낌이 물씬한 디자인이고, 횡단보도는 제대로 그려져있는 경우가 드물거니와 곧잘 눈에 띄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비교적 관점이지만.



 나는 하바롭스크 시내에 있는 성모승천성당을 찾았다. 허옇고 커다란 돌기둥들을 파란색 지붕이 덮고 있었다. 실루엣만 보면 롯데월드에 있는 그 가짜성곽과도 닮은 모양이다. <드래곤 퀘스트>같은 JRPG라면 이런 건물에 들어가 현재 상황을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세이브를 불러오려고 할 무렵이면,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다는 걸 깨닫고 포기하게 되겠지. 나는 게임을 하면서 틈틈이 저장을 해두는 편이지만, 그렇게 저장한 파일을 요긴하게 쓴 기억은 많지 않다. 일일이 불러오는 것도 귀찮고.

예배중은 아니었지만, 성당 내부를 조금 둘러볼 수는 있었다.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야했고 사진은 찍을 수 없다.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곳은 롯데월드가 아닌 성당이다. 관광객들에게는 색다르고 신기한 볼거리일지 몰라도, 이곳의 신자들에게는 신성하고 소중한 공간인 것이다. 로비 곳곳에서 양초 타는 냄새가 났다. 금박을 두른 이콘icon화 앞에서 성호를 긋고 속삭이듯 기도하는 할머니를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성당 앞 광장에 가로등이 환해져 있었다.

 여기까지  김에 뭔가 제대로된 식사를 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정도 걸어서 ‘루쉬끼라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식당의 도어맨은 친절할  아니라 내가  러시아인 중에 가장 영어가 유창했다. 두꺼운 코트를 건네준  자리로 안내 받았는데, 종업원도  말귀가 좋은듯 다양한 언어로 적힌 메뉴판을 내왔다.



 나는 ‘상인 샐러드’(Salad Merchant. 아마 상인들이 많이 먹어서 이름인듯) 하나와 그릴드 치킨, 그리고 하바롭스크산 생맥주를 두 잔 시켜 맛있게 먹어치웠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맛 자체가 기똥찼다. 원래부터 음식을 잘하는 식당같았다. 내부 분위기는 호프집과 레스토랑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인테리어로, 현대적이진 않아도 촌스럽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러시아에서 이렇게 제대로된 저녁을 먹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흡족했을 뿐 아니라 퍽 흥겹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까지 했다. 입구에 있던 그 도어맨에게 ‘같이 사진이나 찍자’고 먼저 제안한 것이다. 나도 내가 말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방금건 완전 인싸들이나 하는 행동이잖아.

 도어맨은 흔쾌히, 아니, 그냥 흔쾌한 정도가 아니고 ‘네가 그 말만을 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협조해줬다.

 뭐지. 얘 러시아 사람 맞나?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게 예사롭지 않길래 “와. 님 방금 배우같았음.” 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도어맨이 대답하기를,

 “오. 어케 알았음? 나 배우도 함.”

 “헐. 진짜?”

 “진짜임. 파트타임으로 하고 있음”

 그렇게 말하는  듣고보니 확실히, 체격부터 머리스타일까지 배우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동석이나 브루스 윌리스 같은 타입일까. <A특공대> <다이하드> 같은 영화에  명씩 나오는 의리형 힘캐 같아 보였다. 내친김에 “이제보니 브루스 윌리스  닮았네라고 말해줬더니 좋아하는 티가  나서 재미있었다.



나는 의도치않게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에서도 많은 대화를 해야했다. 기사가 말많은 우즈벡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국말도 모르고 영어도 “땡큐 베리머치” 말고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숙소 앞에 내릴 땐 짐도 같이 꺼내줘서 나도 모르게 하이파이브를 쳤다.

카운터의 안젤리나와 인사한 뒤 방에 들어오자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난 MBTI를 맹신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극단적인 INFP형 인간들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외향적인 인간(E)인척’ 을 하고 나면 온몸에 힘이 풀리는 데다가 편두통까지 도진다는 것을 말해두어야겠다. 내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인싸력이 정해져있다. 그 할당량을 초과해버린 날에는 지쳐 쓰러지듯 잠들고 싶, 지만, 또 그럴 수만 없는 것이 나의 병이므로 약 한 알을 삼켰다.

새벽에 일어나서 설사를 했다. 스트레스성 복통도 함께 왔다. 아무래도 긴장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내일은 좀 더 주제에 맞게 지내야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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