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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10. 2022

여로에서 (5)

돌아갈 수 없으면 가야한다

이제는 확신한다. 나의 러시아 생체시계는 오전 열한시 기상이 최적이라고 판단내린 듯하다.

 샤워실은 천장이 다소 낮은 편이었다. 그래도 씻는데에는 지장이 없었고, 온수도 뻥뻥 잘 나왔다. 설원 가운데 있는 건물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니. 돈을 내긴 했지만 뭐랄까 분에 겨운 느낌이다.

 짐을 정리하고 파블리카 호스텔을 나오려던 . 나는  가지 중대한 발견을 했다. 잃어버린  알았던 에어팟을 캐리어 가방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게 왜 여기 들어있지?’

질나쁜 러시아인 한 명이 훔쳐간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서 의심부터 한 스스로가 창피해졌다. 아, 나는 얼마나 염병할 피해망상증 김치맨인가.

하여튼 값비싼 소지품을 되찾았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뭣보다 남은 기차여행을 듣는 즐거움없이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으면 저가형으로라도 살 작정이었는데 말이다.

체크아웃을 하다말고, 안젤리나는 “왜 하루만 있다 가는 거야?” 하고 물었다.

“나도 몰라” 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딱히 아무 계획도 없어. 그냥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계속 가볼 생각이야”

 그러자 안젤리나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러시아 사람들은 진심이 아니면 안 웃는다는데, 안젤리나는 뭇 러시아사람들과 달리 서비스용 미소가 습관이 된 것 같았다.

 “다 스비다냐” 는 직역하면 ‘다음에 만날 때까지’ 라는 의미의 작별인사라고 한다. 아마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인사만큼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바롭스크역까지 나를 데려다  택시기사는 중키에 하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는 할아버지였다. 어쩐지 말년의 헤밍웨이를 닮았다. 그에 맞게 운전스타일도 하드보일드다. 길이  막힌다 싶으니 공원  좁다란 길을 가로질러 통과해버렸다. 과묵하게 친절한 타입.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바롭스크 역에 캐리어 가방을 두 시간 맡긴 뒤 근처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라비타Lavita’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놓고 글을 좀 썼다.

 ‘러시아에서 마신 커피 중에 제일 낫네’ 라고 생각했다. 산미가 조금 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오히려 도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맛처럼 느껴졌다. 카페는 넓었지만 조용했다. 전면유리로 드는 햇살만 놓고 봤을 때는, 그곳은 추위라는 개념이 존재치않는 남방의 휴양지처럼 보였다.

 오후   출발 예정인 열차를 타고, 나는 하바롭스크를 떠나 치타chita까지,  이틀동안 열차 안에서만 있을 것이었다. 하바롭스크까지는   축에 속하는 도시여서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해서, 기왕 오래타는     써서 이등석으로 표를 끊었다.

 객차 하나가 완전히 오픈된 형태인 삼등석과 달리 이등석은 네 명이서 한 객실을 쓰도록 돼있다. 3평 정도 되는 공간에 2층침대가 두 개 놓여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     (창문)   2

3   (테이블)  4

나는 왼쪽 위에 있는 침대(1 위치) 쓰기로 했다. 통행이 용이한 아랫침대는 운임이 배로 비쌌기 때문에.




돈을 많이 준 만큼 훨씬 쾌적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삼등석과 달리 객실이 분리되어있는 만큼 도난에 대한 위험도 덜 하다. 단지 후기를 몇 개 보니 같은 객실에 또라이가 걸리면 도착하기까지 쭉 불편하게 지내야한다는 말도 있었다. 하긴 이런 건 상대적으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민폐 또라이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 내가 묵을 객실은 평화로운 편이었다. 아랫침대는 삼십대 후반처럼 보이는 아주머니가 갓난아이와 함께 쓰는 것 같았고, 내 맞은편에 누운 대머리 아저씨 역시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 분위기에 눌려 조용히 짐을 정돈하고 하느라 땀이 뻘뻘 났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내부는 과하다 싶을만큼 공기를 뜨겁게 데워놓는다. 땀 좀 식히려고 열차 연결부로 나가면 몇 초만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진다. 열차 내부는 24도인데 외부는 영하 24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온도차이에 익숙해지지 못하면 심장에 무리가 올 지도 모른다….

객차 내 편의점에 가서 초코파이 한 개와 탄산수를 한 병 사왔다. 나는 원래 초코파이를 좋아한다. 니콜라 요키치처럼 생긴 승무원이 내게 물건을 건네준 다음 따봉을 해보였다. 나도 똑같이 했다. 러시아 사람들의 감정표현은 어딘가 블랙코미디같은 면이 있다.

 아랫침대에 있는 아기는 목청이 좋았다. 한밤중에도 얼마나 크게 울어대는지… 아주머니가 미안해 죽겠다는 뉘앙스로 말하길래 “아. 괜찮아요. 이어폰 끼고있거든요.” 하고 영어로 대답했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객실 내부가 갈수록 무더워져서 열차 내부를  바퀴 둘러봤다. 객실로 돌아올 때는 네모난 컵라면을 하나 사왔는데. 워낙에 싱겁다는 말이 많아서 일부러 물을 적게 넣었더니  알맞게 됐다. 육개장 사발면과 비교하면  맵고   맛이다.  



 아주머니의 양해를 얻어서, 아랫침대에 걸터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남은 쓰레기를 버리고 오자니 내 맞은편 침대의 대머리 아저씨가 말을 건네왔다.

 “캔 유 스픽 잉글리시. 라잇?”

 왔다갔다하면서 승무원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아, 어… 조금?” 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영어로 하는 대화에 굶주린 미국인인가 싶었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영어를 ‘진짜 조금밖에’ 못 하는데.

 실제로 그는 영어회화를 연습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보다 영어를 조금 더 잘하는 러시아인이었다는 것이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사우스 코리아라고 대답해줬다.

 “오. 나는 안드레이야. 만나서 반가워. 너는?”

 나는 내 이름을 최대한 러시아 억양스럽게 발음해보았다. 그랬더니 안드레이가 더듬더듬 발음을 따라하는데, 이건 영 발음구조가 달라서 힘들겠다싶어서  “인데, 그냥 루크Luke라고 불러” 하고 덧붙였다. 루크는 내가 이전 직장(사내에서 영어 이름을 쓰던)에 다닐 때 썼던 이름이었다. 어디서 따왔냐고 물으면, 뭐, 말할 것도 없이 스타워즈다. 물론 내게는 포스도 라이트세이버도 없지만. 그땐 그런 이름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루크. 만나서 반가워. 러시아에 온걸 환영해”

 “나도 반가워. 안드레이.”

안드레이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영어 실력은 나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visit을 wisit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었다—말투며 행동거지 등으로 미뤄보건대 매우 성숙한 사람 같았다. 영어회화도 그렇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일을 좋아하는 듯하고. 실제로 직업도 변호사였다.

 ‘한국에서도 변호사랑 대화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그야 여행지가 아닌 이상, 변호사와 대화할 일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

안드레이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재밌다고 여기는  같았고, 한편으로는 나처럼 허약해보이는 젊은 동양인이 목적도 없이, 혼자서 떠돌아다니는 것을  명의 어른으로서 염려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긴 나이로 치면 삼촌뻘쯤 되는 안드레이이니까. 생긴 것도 보니 어디 가서 쳐맞고 다닐  같이 생겼으니 걱정이 될만도 하다.

  그러다 문득 캐리어 안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챙겨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동안 캐리어는 제대로 들고다니지도 않았던데다가, 속편하게 즉석사진을 찍을만한 상황이랄 것도 없었는데. 왠지 안드레이와 그 아주머니—그리고 그녀의 딸—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쓸데도 없는데 기념으로 줘버리자고 생각했다.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이었다. 나는 그 별 것없는 필름 두 장을 주곤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을 답례로 받았다. 아주머니는 즉석조리 감자샐러드를, 안드레이는 설탕이 한 스푼 들어간 홍차 한 잔을 가져왔다.

…이것참 쑥스럽기도 하고 앞으로 러시아에서 살아남는데 꽤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야 사진 찍어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폴라로이드 전용 필름은 열세 장 남았으니까. 비행기 탄막 게임에서의 폭탄처럼 요긴하게 쓸 데가 있겠지.

 늦은 저녁에 되자 승무원이 객실로 와서 뭐라 질문을 해왔다. 나 혼자 못 알아듣고 벙쪄 있으려니 안드레이가 통역사로 나서서 말을 대신 해줬다.

 “내일 조식 주문할 거냐고 묻는데. 이백십 루블이래. 어떡할래?”

 이백십 루블이면 끽해야 사천 원 남짓한 돈이다. 그 돈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면 두말할 것 없는 이득이다.

 “그야 러시아 사람이라면 먹어야지.” 내가 대답했다.

 안드레이가 웃으면서 내 말을 승무원에게 전해줬다. 승무원도 웃었다. 나도 웃었다. 밤 열 시가 넘자 객차 전체가 조용해지다가, 곧이어 아기가 우는 바람에 북새통이 됐다. 아기 먼저 재우자는 합의를 하고, 나와 안드레이는 조용히 자리로 가서 일찌감치 누웠다. 아기가 잠들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객실을 빠져나가서 양치를 하고, 약을 한 알 먹고, 고골의 단편선을 읽다가 곯아떨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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