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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16. 2022

여로에서 (9)

미리 판단해놓는 건 안 좋은 버릇이다


 이상한 꿈을 꾸는 바람에 새벽부터 잠이 깼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러시아에 오고나서, 나는 열고 닫을 수 있는 바지 주머니에 여권이며 지갑 같이 중요한 것들을 넣어놓고 다녔다. 노트북이나 충전기 같은 물건은 어쩔 수 없이 가방에 넣어야 하지만, 작고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컬럼비아Columbia에서 장거리 여행 및 등산용으로 내놓은 하의였다. 겉보기에는 그냥 갈색 카고 면바지같지만, 재질이 튼튼한데다가 안감에 방한코팅이 되어있어서 거의 항상 이 옷을 입고 다녔다. 또 나는 웬만해서, 특히 횡단열차 안에서는 잘때도 이 옷을 입은 상태로 자리에 누웠다. 가방을 훔쳐가는 사람은 있을 지 몰라도, 자는 사람 바지를 벗겨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일어난 뒤에는 습관적으로 무릎쪽 주머니를 툭툭 더듬어보는데, 이때 왼쪽 주머니가 텅 비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여권을 넣어놓는 주머니였다.

—여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설명하는 건 매우 간단하다. 해외를 싸돌아다니면서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 1순위…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길과 데이터를 잃고, 노트북을 잃어버리면 일자리를 잃겠지만, 여기서 여권을 잃어버리면 내 신분을 증명해줄 유일한 수단을 잃는다.

 그냥 좆된 것이다…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별안간 머리가 띵했다. 이제 다 끝났구나, 하면서 허겁지겁 가방이며 이부자리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나 말고 전부 중간역에서 내리고 없어서 나는 별 물리적 방해없이 객실 전체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권은 나오지 않고…

가뜩이나 난방 때문에 더운 객실에서 난리를 피워대다보니, 땀까지 뻘뻘 났다.



하는 수 없이 아랫층 침대에 걸터앉아서 한숨을 돌렸다. 심호흡을 크게 몇 번 했다. 심박소리가 귀 옆에서, 목젖 아래에서 쿵쿵 울려댔다. 막막하다… 흡연자는 아니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해봤다. 여권이 없으니 더는 횡단열차를 타는 것도 끝이다. 도시에 남겨져봤자 제대로된 숙박시설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고,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걸어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나? 그렇지만 여기는 한반도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이고, 만일 도착하더라도 북한은 통과할 수가 없다… 이건 정말 생각할수록 무의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남루한 코트를 덮어쓰고 열차칸 사이로 나가 찬바람 좀 쏘이고 오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여권은 코트 왼쪽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치타에서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길목에는 울란우데라는 도시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꽤 큰 도시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같은 객실에 있는 사람들은 자는 사이 거기에 하차한 것 같았다. 작지만 안락한 2등석 객실을 혼자 쓰려니 기분이 째졌다. 어디 출장가는 비즈니스맨 느낌도 나고(전혀 아니지만). 아랫침대에는 콘센트도 있어서, 노트북을 충전하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글도 쓸 수 있었다. 도중에 허기가 져서 어제 차내식으로 받은 음식들, 열차칸에서 파는 과자빵 등으로 대충 요기를 했다.

긴장이 풀리고 배가 부르니 졸음이 쏟아졌다.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이내 강렬한 채광이 눈꺼풀을 찔러 다시 깼다.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밖을 내다 봤다. 얼어붙은 바다가 차창 반절을 차지한 채 요지부동으로 거기 있었다.




 ‘바다처럼 보이지만… 역시 호수겠지’

 안드레이가 말한 바이칼호였다. 수평선 너머까지 꽁꽁 얼어있는 표면 위에 눈까지 한가득 쌓여있다. 얼핏 보기론 호수는커녕 평범하게 눈덮인 초원 같지만. 땅과 달리 얼어붙은 물 위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나무도 숲도 없다. 어떻게 걸어서 지나갈 순 있을지 몰라도. 그곳은 육지와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 장소일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내전 당시에는 얼어붙은 바이칼호를 행군해 지나다가 얼어죽은 군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큰 호수’와 ‘바다’를 구분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안드레이도 ‘여름에 거기 갔었는데 파도도 치고 해변도 있고 중간에 섬도 있어서 그냥 바다 같았음’이라고 언급했었다. 또 바이칼호는 세계에서 가장 깊고 큰 담수호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 같은 느낌이라, 천천히 짐을 챙기며 이르쿠츠크 역에 내릴 준비를 했다.  




 역에서 내려 숙소까지 걷는 건 제법 유용한 습관이 됐다. 물론 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마련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만… 걸어가는 중에 도시가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있고, 근처에 어떤 편의시설이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몸소 그 장소의 기후를 느낄 수 있다거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며 걸음거리, 옷차림 등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십오분쯤 걸어서 버드하우스BirdHouse라는 이름의 호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체로 길이 자동차 전용도로였고, 그마저도 갓길에는 눈을 치워놓아서 가방을 끌고가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그렇지만 역에서 이렇게 가까운 동시에 하루 숙박료도 오천 원 남짓한 숙소를 찾아냈으니까. 어느 쯤의 고생은 소화를 겸해서 감수할만한 것처럼 느껴졌다.

 카운터엔 아주 어려보이는—아직 스무살도 안 된 것처럼 보이는—금발 소녀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주인집 딸인지 아르바이트인지 영어는 알아듣질 못해서 번역앱으로 할 말을 주고 받았다. 짧은 보폭으로 슬리퍼 뒷창을 끌며 걷는 것이나, 늘 웃거나 찡그릴 준비를 하고 있는듯 불안정한 얼굴 표정 같은 것들이 영락없는 한국의 여고생 같았다.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감정을 숨기는 연습을 하고 있지는 생각처럼 잘 되지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 커뮤니티 로비를 둘러본 뒤 침대에 누워 한 시간쯤 쉬었다. 열차에서 쓰던 글을 마저 쓰다가,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밖으로 나갔더니 날이 엄청 추워져 있었다.

 이르쿠츠크는 큰 도시다. 여름에는 그 유명한 바이칼호를 볼 겸해서 직항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한국 여행객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있는 지금은 겨울이다. 내게는 얼음낚시며 냉동된 수면에서 미끄럼을 타는 취미도 없으므로, 그 커다란 호수를 구경하는 건 열차내부에서 본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여하튼 휴양지로 이름이 꽤 알려진 덕분에, 블라디보스톡만큼은 아닐지언정 한식당이나 한인민박 같은 것들도 곳곳에 있는 모양이어서, 어쨌거나 토종 김치맨인 나는 김치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러 가장 가까운 한식당을 찾아 갔다. 김치Kimchi라는 이름의 가게였다. 이건 너무 대놓고 한식당인 이름이어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종업원이나 식당직원들 중에 한국인이 없다는 것이 내겐 의외인 부분이었다. 또 현지 러시아인들에게는 상당히 인기가 있는듯, 이른 저녁임에도 많은 손님이 들어차 있었다. 심지어 한식당이면서 입구부터 칵테일바 같은 게 마련돼있기도 했다.

나는 삼백오십루블하는 비빔밥 하나와 적당한 반주를 같이 주문했다. 별로 기대는 안 했다. 파는 음식이기는 해도 러시아에서 먹는 한식이니까.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야 어색한 게 당연하다. 가격도 오천원 남짓인데, 그 돈주고 아주 기똥찬 맛을 바라는 것 역시 한국에선 희한한 일 아닌가.



 그런데 삼십분 쯤 지나 내 앞에 대령된 비빔밥은, 실로 나의 편협함을 반성하게 만들만큼 훌륭한 식사였다. 누군가는 ‘너무 오랜만에 한식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 아닐까’ 싶을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 일지를 열심히 읽어본 사람들이면 대충 알 것이다. 나는 러시아에 와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의 맛을 섭취해왔다는 것을… 그건 진짜 맛있는 비빔밥이었다. 지글지글 끓는 돌솥에 다양한 비빔나물, 반숙으로 익힌 계란후라이에 적당히 매콤한 고추장까지… 옥에 티라면 맨 처음에 숟가락 없이 포크만 갖다준 것 정도였는데, 큰 숟가락 같은 거 없냐고 정중하게 물어봤더니 후다닥 갖다줘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밥 비비는데는 숟가락보다 포크가 더 편리한 구석이 있고.

 잘게 썬 김치를 물에 씻어 고명에 포함시킨 것도 훌륭했다. 전통적인 고추장 테이스트에 큰 참견을 하지 않으면서도, 한식다운 식감과 조화로움을 구현해냈다. 나는 이렇게나 한식에 진심인 러시아 식당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솔직히 말하면 칵테일을 두 잔이나 마셔서 술기운도 좀 돌고 있었다— 계산하다말고 번역앱을 켜곤 ‘저 한국인인데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먹은 것보다 맛있었음’하고 직원에게 건네 보였다.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우리 동네 순대국집에서 팔천 원 주고 먹은 비빔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랬더니 홀 관리를 맡고 있는 듯한 정장차림의 여자가 말그대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가게에 손님이 그렇게 많이 있었는데도 거의 “꺅”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내가 또 다시 술먹고 실수를, 스투핏 김치맨이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가 싶어 조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녀는 진심전력으로 기뻐했던 것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당신이 그렇게 칭찬해준 내용을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다. 찍어놓아도 되겠냐’고 까지 말해왔다. 나는 그렇게 하도록 했다. 아마도 뭐 인스타그램 스토리 같은 곳에 올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반대로 한국에서 타코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와 여기 타코가 멕시코보다 맛있음” 이라고 말하는 멕시코 여행객을 만났다면 기쁘지 않았을리가 없지.

또 다시 정처없이 도시를 걸어다니다가, 커피를 마시면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적당한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왠지 익숙한 간판을 발견하는데.

 ‘트래블러스 커피’였다. 치타에서 들렀던 그 카페가 알고보니 프렌차이즈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디야 정도 되는 브랜드 같은게, 커피 맛도 파는 메뉴도 비슷비슷하다. 내부 인테리어에서도 한국식 카페 같은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몹시 편안한 기분으로 글을 쓰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지나치게 싸돌아다녀선지 뒷머리가 땡겨 일찌감치 누웠다. 아홉시가 넘자 커뮤니티 로비에서 꺄르르 웃는 소리, 무언가 치지직 굽는 소리와 익은 고기 냄새가 풍겨나오기 시작했다. 분위기로 가늠해보건대 호스트를 비롯해 손님 몇 명이 모여 술이라도 한 잔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역시 그런 게 여행의 묘미라는 것이겠지. 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도미토리라면 더욱.

 하지만 나는 러시아어도 못하고, 그다지 그런 자리에서 어울리는 재주도 없기 때문에, 즐거운 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고자 일찍 잠드는 쪽을 선택했다. 내일은 글을 좀 많이 써야할 성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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