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 못해서 생각지 못한다
“으악 내 머리!”
아침식사로 숙소 로비에서 파는 즉석 샌드위치를 먹고 일어날 때였다. 나는 겁나 단단한 붙박이 나무 선반에 머리를 처박고 고통에 휩싸였다.
“으아아악”
옆에서 무슨 이상한 죽 같은 거 먹고 있던 남자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 씩 웃으며 뭐라뭐라 격려하는 듯한 말을 건네왔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어, 같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어휴 병신” 이면 말이 좀 더 짧았을 테니까.
예산초과를 방지할 생각으로 되도록이면 뽑아놓은 현금을 위주로 계산해왔다. 잔돈이 생기면 되는대로 가방에 처박아뒀는데, 그러다보니 못 보던 사이에 동전이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잔돈을 찬찬히 모아 카운터에서 지폐로 바꿔왔다. 백오십 루블이면 꽤 긴 거리의 택시를 한 번 탈 수 있다.
로비에서 글을 쓰다보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밖은 햇볕이 따사로웠지만 몹시 추웠다. 가로수길에 꽃가루 같은 것이 흩날리고 있었는데, 자세히보니 눈발이었다. 입자가 너무 작아서 해가 잘 드는 곳에서만 보일 정도였다.
지금 보니 러시아에서 눈이 ‘펑펑’ 내리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강원도 산간지방처럼 ‘하룻밤사이에’ 몇십밀리가 쏟아붓는 식이 아니고, 그냥 공기 중에 눈이 섞여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장마철내내 여우비가 그치지 않고 내린다면 그런 느낌일 것이다. 눈과 달리 비는 쌓이지않고 흘러가버린다는 게 차이겠지만.
춥지만 날씨는 좋았다. 좀 더 걸어다니고 싶은 마음에 초콜릿과 포켓 사이즈 보드카를 하나씩 사서 챙겼다.
이르쿠츠크 도심에는 호수에서 뻗아나온 강이 흐르고 있다. 그쪽을 향해 걷다보면 크고 작은 교량이 보인다. 반절이상 얼어있는 강줄기와 중간 크기의 광장이 차례로 나온다. 광장 중간에는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이 있다.
러시아에는 도시 곳곳에 동상이 많다. 레닌이나 푸쉬킨 같은 인물은 가는 곳마다 보이는 편이고, 표트르 대제나 알렉산드르 3세도 그에 못지 않다. 이건 크게 기념할만한 일이 있어서, 위대한 인물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라는 의미도 있긴 하겠지만… 단지 그뿐이라기에는 수효가 많아 보인다. 아무래도 땅덩이부터가 큼직큼직해서일까? 도심부나 외곽을 가리지 않고 큰 공원이 많이 조성돼있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공원 중앙에는 동상같은 기념물을 하나씩 세워줘야하고. 그 왜, 롤러코스터 타이쿤을 할 때도 놀이공원에 놀고 있는 부지가 있으면 회전목마라도 하나 놔둬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누군가는 혈세낭비를 운운할지도 모르겠지만, 허전함을 메우는데 그럴싸한 이유를 따지기 시작하면 괴롭기만 하다.
공원 바로 옆에 있는 역사 박물관에도 들렀다. 선사시대부터 소련붕괴 이후까지의 지역사를 다양한 유물과 함께 전시해 놓았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 사용되던 책상과 의자. 유목민들이 입었던 모피복장에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이 뭉클하다.
박물관에서 안내일을 하던 한 아주머니는 내 러시아말을 몇 번 듣더니 발음을 고쳐주기도 했다.
“…빠잘리스따?”
빠잘리스따пожалуйста는 영어로 치면 Please 정도가 되는데, 어째선지 ‘천만에요You’re come’를 대신해서 쓰이기도 하는 등 활용범위가 넓은 말이다.
“니엣, 니엣. 빠좔ㄹ-스따” 아주머니가 말했다.
“빠좔-스따”
“니엣. 빠좔ㄹ-“
삼 분 정도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제대로 배우는데는 시간이 든다.
적당한 카페를 찾아 글을 쓰다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주변 카페는 다 문을 닫았거나 휴무일이어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도보탐험을 세 시간 넘게 지속해야했다. 날도 춥고 바람도 불고, 인적이 뜸하다 싶은 데는 눈이 가득 쌓여 지나다니기도 쉽지 않았지만. 묘하게 ‘택시를 불러봐야 호출이 거절될 것 같은 길’만 연속되는 통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볼 걸 그랬나.
결국 숙소가 있는 방향까지 계속해서 걸어서, 뉘엿뉘엿 해가 질 즈음에는 번화가 근처에 다다랐다. 도시 구경은 많이 했지만 너무 많이 걸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배도 고팠다.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다. 메뉴가 저렴한 대신 양이 적다는 후기가 하나 보였기 때문에, 야채볶음과 계란볶음밥 그리고 탕수육을 한 번에 주문했다. 나는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걸어온 탓에 배도 고팠거니와, 여기에 생맥주 한 잔을 추가하고도 만 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어서 ‘뭐 이정도면 다 먹을 수 있거나 조금 남는 정도겠지’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절반 좀 넘는 양밖에 먹지 못했다. 최선을 다하긴 했다. 평소 먹는 양의 두 배 가까이 먹어치운 것 같은데도 그랬다. 대체 뭐하는 놈이 이걸 가지고 ‘양이 적다’는 후기를 남긴거지. 나는 원래부터 음식 남기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남기고 가는 건 왜인지 괜한 오해를 사는 것 같아 더 속상해진다.
‘걔는 누가봐도 동양인이었는데, 음식을 반이나 남기고 갔잖아. 역시 우리 음식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어…’ 하고 자책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이르쿠츠크에 위치한 중식당 ‘하얼빈’의 관계자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오해말길 바란다. 나는 엄청 맛있게 먹었다. 단지 잘못된 리뷰를 보고 잘못된 양을 시켰을 뿐이다.
<ㅇㅇ에 가면 반드시 가봐야할 곳들> 같은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놓치면 아쉬울 정도로 훌륭한 명소인 것도 알겠고, 근처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관광객들에게 정보를 주는 것도 좋지만… 이런 말은 왠지 모르게 ‘ㅇㅇ에 갔는데 거기도 안 들르고 오면 헛걸음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뉘앙스로 느껴진다. 파리에 갔는데 루브르 박물관 견학을 하지 않고 돌아왔다면 진짜 파리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다는 식이다. 뭐, 기왕 먼 길 떠난김에 도시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오면 좋기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명소, 잘 알려진 관광지 몇 곳의 기억으로만 여행지를 정의한다면 맥빠지는 얘기다. 신림동 뒷골목이 코엑스몰보다 덜 한국적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난 그래도 거기서 볼 건 다 보고 왔어”하고 지난 여정의 의미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면. 남들 다 가는 곳을 꼭 들러서 자전거 일주로처럼 인증용 사진을 찍어야하는 건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말이 좀 길어졌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카잔 대성당’이 이르쿠츠크의 그런 명소로서 곧잘 꼽히는 곳인데, ‘꼭 들러야할 곳’이라는 코멘트가 마음에 안 든 나머지 전혀 갈 생각을 않고 있다가—이 날 중식당에서의 폭식 때문에 적당하게 걸어갈 곳을 찾다가 카잔 대성당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지도앱에서 사진만 보고 ‘헉 겁나 엄청나잖아 이건 꼭 봐야해’ 하고 헐레벌떡 달려간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부분을 꼭 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의 신님은 이리 배배꼬인 여행자를 반기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해가 사라진 이르쿠츠크 시내를 걷고 걸어서, 콧잔등이 빨갛게 익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버티며 카잔 대성당에 도착했다. 그러나 성당 정면의 철문은 굳게 닫혀있었고—엄청나게 큰 자물쇠가 걸려있었다—어렵사리 찾아낸 뒷문도 마찬가지였다. 담은 넘기에 너무 높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 밖에 바짝 붙어서서,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장식된 성당의 파사드를 카메라에 담아가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렇게 숙소에 돌아갔더니 ‘난 오늘 대체 뭘 한 거지…’하는 죄책감이 몰려들어서, 자정이 넘을 때까지 호스텔 로비에서 글을 쓰다가 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