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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21. 2022

여로에서 (11)

도망갈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슬프다


 열시 쯤 잠에서 깼다. 이젠 일어날 때 딱히 시계를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기억도 못하면서.



 몸이 유달리 찌뿌드드한 것이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오전의 내 기분은 대개 그날그날에 컨디션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 같다. 일관된 점도 없고 장점도 없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도미토리의 체크아웃은 절차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도 애매하다. 그냥 카운터에 가서 “야, 나 나간다?” 라고 말하고 문을 나서는 것 뿐이다. 성의있는 호스트라면 “오, 이제 가는 거야? 깜빡 잊고 놔두고 가는 건 없고?” 같은 말을 덧붙여주는 정도인데.

 버드하우스의 반응은 이도저도 아니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성의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콕 집어 표현하자면 당황하는 것 같았다. 어, 뭐야. 쟤 왜 벌써 가냐, 우리가 뭐 실수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닌데. 이틀치 숙박료를 냈고 이틀이 지났으니까 가는 것 뿐인데.

슬슬 역으로 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을때였다.

 “헤이”

 “아! 깜짝이야”

 나는 며칠동안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키크고 잘생긴 외국인이 말을 걸어오는 데 놀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검은색 비니를 쓴 남자였다. 나와 비슷하게 짧은 영어로 “다 괜찮은 거야?” 하고 물어왔다.

 다짜고짜 나한테 ‘다 괜찮냐’고 물으면… 그야 당연히 그렇지 않다. 빚은 늘었고 마감은 밀렸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좀 막막하다. 거기에 전세계가 전염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판인데 누가 이걸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물론이지” 라고 나는 대답했다. “괜찮지 않은 게 없는데. 왜?”

 “이제 이르쿠츠크를 떠나는 거야?”

 “어. 기차역으로 가려고”

 “어디까지 가? 모스크바?”

 “일단은,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오. 우리도 오늘 그 기차 탈 예정인데”

 ‘이건   소리야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을 아르투르Arthur라고 소개하며 악수를 건네더니, “우리는 네가 여길 나가는 이유가, 영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  알았어. 그래서 다들 조금 걱정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 그런  아니야

 이윽고 나는 이 상황이 좀 수치스러워졌다. 이건 완전히 그것 아닌가? 대학교에서 과엠티 같은 걸 가면 꼭 한 명씩 말 안 하고 겉도는 애가 있는데, 거기에 은근한 책임감을 느낀 과대가 마지못해 와서 말을 걸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은 저 녀석, 어울리고 싶은데 선뜻 말을 못 꺼내는 건지도 몰라. 나라도 가서 말을 걸어줘야해’ 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실 학창시절 내내 비슷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타국에 와서 돈내고 묵는 숙소에서 까지 그런 오해를 사다니 딱히 내 잘못은 아닌데도 부끄러웠다. 나는 내가 한국에서 온 작가양반이며, 마감이 밀려서 거의 노트북만 쳐다봐야하는 상황었음을 해명해야 했다. 한국말로 해도 떨떠름할 내용을,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하자니 애가 타들어갔다.

 다행히 아르투르는 내 얘기를 잘 알아들은듯, 오해를 풀고 “그럼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시간되면 커피나 한 잔 하자” 같이 아무래도 좋은 약속을 하며 헤어졌다. 아르투르…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말도 그렇고 정말 과대표 느낌이다. 대학을 다니고 있다면 진짜로 과대일 가능성도 있다.

 ‘수염이 덥수룩해서 그렇지. 나이도 나보다 어릴지 몰라…’

 대충 작별인사를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그새 역으로 가는 길에 눈이 깔려 있었다.



 캐리어 가방을 역에 보관한 다음, 근처에서 무난해보이는 카페를 찾아 샐러드와 커피를 먹었다. 좀 덥긴 하지만 작업하기는 좋은 환경 같아서, 글이나 쓰고갈까 하다가 와이파이가 안 된다길래 포기했다. 손님용 와이파이가 없는 카페라니, 공유기 살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단 회전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탓이겠지.

 역까지 걸어가면서 피아노 소나타를 몇 곡 들었다. 도착할 때쯤 에어팟을 빼서 집어넣으려고 했더니 케이스가 없었다.

 ‘그럼, 내 인생이라는 게 이렇지’

 이쯤되니 그리 놀랍지도 않다.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누가 훔쳐갈 틈 같은 건 없었다. 아까 꺼낼때 좀 길게 잡아뺐던 것이 걸어오던 중에 떨어지던가 했겠지. 또 한 번 운좋게,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이 가방에서 발견되는 그런 행운을 기대해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어쨌거나 에어팟은 잃어버릴 운명이었구나 싶다. 한국에 돌아가면 케이스만 다시 사는 걸 고려해보든가 해야겠다. 출시된지 꽤 지난 세대라 재고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없을 것이다. 내 인생은 대체로 그런 식이니까.



 이르쿠츠크역 로비에 앉아 그동안 썼던 글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기차역은 사람들 발길이 잦은 곳이라, 인터넷도 잘 터지고 무료 와이파이도 마련돼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날은 이런 쪽에서 일반적이지 않기로 작정이나 한 건지, 둘 다 제대로 터지지가 않아서 글을 올리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브런치는 웹 버전 접속이 그냥 안됐다. 여러가지로 시도해보았지만 인터넷 상태의 문제는 아닌 듯 했다. 해외 서비스를 아예 안 하는건가? 막을 거면 모바일 앱도 다 막아놓지. PC로 쓴 글을 모바일로 정리해 올리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또 없다.

 오후 네시가 돼서 열차 플랫폼으로 향했다. 삼등석 일번칸으로 향하고 있는데, 플랫폼 중앙에 떡하니 서서 담배를 피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한 오초정도, 그것이 아르투르의 환영인 줄 알고 다시 혼란에 빠졌다.

 “헤이, 루크”

그러나 그건 진짜 아르투르였다. 뭐야 너 왜 나 따라다녀… 라고 말하려다가, 생각해보니 같은 기차를 탄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서 그렇게까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르투르와 같이 다니는 듯한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각자 열차칸에 올라갔다.

윗자리 예약이 없는 삼등석 아래칸은 좋은 선택이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점잖기만 하면 식탁도 콘센트도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다. 내 맞은편 아저씨는 일이 많아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나처럼 노트북을 꺼내 일을 하기도 하고, 자는 도중에 걸려온 전화에 헐레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띄엄띄엄이기는 해도 몇 가지 영단어로 대화를 주고 받기도 했다.

대부분은 “—굿?” 이라고 묻고 “…굿!”이라고 대답하는 것 뿐이었지만. 이제보니 사람들이 대화할 때 그리 많은 어휘를 쓰진 않는 것 같다. 똑같은 내용에 적당한 변주를 주며 놀음할 뿐이다. 도구가 변변찮을 때는 가위로도 캔을 따게 되는 법이다.



 날이 저물었다. 창밖을 보는 재미조차 사라지자 가방에 넣어놨던 보드카 작은 병을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취기를 빌려 글을 쓰다가, 잘 안 쓰이면 한 모금씩 더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열시쯤 되니 오타가 너무 많이 났다.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머리맡 창가쪽에서 시베리아의 외풍을 머금는다. 차벽에 달궈진 이마를 들이받고 식혔다. 일에 지쳐 서쪽으로, 태양이 지는 서쪽으로 도망하는 러시아 농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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