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는커녕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승무원이 잠을 깨우러왔을 때. 나는 부끄럽게도 “헉!” 같은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악몽을 꾼 건 아니었다. 그럼 뭐지?
옛날 우리집에 있던 컴퓨터는 너무 오래된 물건이었다. 갑자기 전원을 켜면 본체에서 정체불명의 소음이 났다. 나는 내가 왜 동작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전원이 켜졌으니 움직이는 컴퓨터처럼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권, 있고. 지갑, 있고. 휴대폰, 있고. 좋아. 가볼까.
열차는 오전 아홉시 반이 돼서 크라스노야르스크역에 도착했다. 나탈리아라는 이름의 호스트가 문자를 보내 나를 역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데리러 올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도, 혼자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 헤맸던 모험을 떠올리며 순순히 제안에 응했다.
‘사자 조각상’앞에 있겠다고 말한 나탈리아는 대번에 날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짧게 친 머리에 눈이 크고, 어른스럽게 단단한 체격의 중년 여성이었다.
“사자 조각상 앞에 있겠다고 했죠”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사자가 어딨는지 발견도 못했어요”
나탈리아는 내 말을 듣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내가 앉은 조수석 방향의 창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녀가 말한 사자상이 커다란 기둥 위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자세히봐요. 사자가 삽과 낫을 들고있죠?”
“그러네요”
“사자는 용기를 상징해요. 삽을 들고있는 건 여기가 광산도시였기 때문이고요”
“낫은요?”
“낫은, 음…”
“아니에요. 대충 알 것 같아요. 멍청한 질문이었네요” 내가 말했다.
나탈리아는 투싼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숙소로 향했다. 그녀의 직업은 여행가이드였다. 영어로 말하는데 능숙한 것이나 말이 많고 설명하길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더 적절한 직업이 없을 것 같이 보였다. 표정도 제스처도 영 러시아스럽지가 않았다. 그저 영어를 잘하는 러시아인이라기보다는, 농담하기 좋아하는 미국인에게 우연히 러시아어 능력이 발현된 것 같은 인상을 줬다.
“건물이 엄청 크죠?” 내가 창밖을 빤히 보고 있자, 나탈리아는 차를 멈추고 내게 말을 꺼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들어볼래요?”
“그럼요”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안드레이와 이야기했던 기억이 났지만, 나탈리아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졌다.
“옛날에 스탈린이라는 사람이 있었죠”
“아, 들어본 것 같아요” 나는 갑작스러운 스탈린 오프닝에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하하. 그렇게 얼굴 굳을 필요 없어요. 그냥 하는 이야기니까… 한 번은 스탈린이 이런 생각을 했던 거에요. ‘모든 러시아인들은 궁전같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요”
“와우” 듣고보니 정말 스탈린다운 발상이다.
“결과적으로는 전혀 그러지 못했지만… 그때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 그런 특징이 있죠. 궁전을 연상케하는 장식, 큼직큼직한 건물크기… 뭐, 그렇단 얘기에요”
나탈리아는 확실히 말이 많았다. 뭔가 말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나서 병원에 가야한다더니, 갑자기 차를 돌려 즉석에서 도시를 드라이브하기 시작했다.
“저건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빅벤이에요” 나탈리아가 운전대에 손을 올려둔 채로, 턱으로 창바깥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빅벤이라고요?” 확실히 커다란 시계탑처럼 생긴 게 있기는 했다. “오. 진짜네. 진짜 빅벤이 있네…”
“그럼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뭘까요?”
그게 뭔데요, 라는 눈빛으로 나탈리아를 쳐다보자 하는 말.
“저걸 보기위해서 런던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하하하!”
나탈리아는 조금 더 외곽으로 차를 몰아서 ‘붉은 광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가 그걸 보고 “이걸 보니 모스크바에 갈 필요도 없겠는데요”라고 말하자 나탈리아도 “하하하!” 하고 웃었다.
숙소는 남향으로 큰 창이 나있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크기의 아파트였다. 러시아에서는 욕실과 화장실이 분리된 구조가 일반적인 모양이었다. 나탈리아는 그 아파트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안 쓰는 방 하나를 숙박용으로 구분해 손님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안내해준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거실로 나왔다. 나탈리아가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해줬다.
“이건 호박이 들어간 수프에요. 러시아에서는 꽤 자주 먹는 음식인데…”
“아, 이거… 한국에선 죽이라고 해요”
“죽?”
“네. 호박죽이라고” 나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고 맛을 보았다. “…하는데 그게 아니네요. 이건 단호박죽이에요.”
나탈리아는 나를 무척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내 직업을 듣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내가 가방에서 푸쉬킨 시집을 꺼내왔을 땐 적잖이 충격을 받은듯, 실로 그녀답지않은 러시아식 감탄사를 연발하며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러시아 원문과 한역본이 같이 적혀있어서, 글자를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있는 느낌이 있다. 나탈리아는 그 중에 한 페이지를 펴서 가리켰다. ‘K…’ 라는 제목—번역판 제목은 ‘…에게’다—의 시였다. 나는 한국말로 시 앞부분을 읽어주었다.
나 경이의 순간을 기억하오.
내 앞에 그대가 나타났었소.
스쳐가는 환영처럼
순수한 미의 영처럼.
나탈리아는 푸쉬킨의 글 중에서도 이 시의 첫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면서도, 제목의 ‘K’가 푸쉬킨이 바람핀 여자의 이니셜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알려줬다. 그런 거,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아, 그러고보니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간다고 했죠? 거기 가면 넵스키 거리의 푸쉬킨 카페도 가봐요. 그렇게 안 비싸니까.”
“푸쉬킨이 카페도 운영했었나요?” 내가 물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 푸쉬킨이 결투로 죽은 건 알고 있죠? 그 결투에 가기 전에 들렀던 카페라고 해요. 죽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한 곳이었던 셈이죠”
나는 거기 도착해서 기억이 나면 가보겠다고 대답하고 방에 들어갔다.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고, 조금 쉬다가 밖으로 나갔다. 크라스노야르스크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세워진 도시였지만, 이 날은 해도 잘 들고 기온도 영하 십사도밖에 안돼서 엄청 따뜻했다. 하지만 걸어다니기에는 영 좋지 않았는데, 곳곳에 눈섞인 얼음이 얼어있어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마감도 해야하고 하니 적당히 싸돌아다니다가, 작은 쇼핑몰에 들러 거기 있는 가장 저렴한 블루투스 이어폰을 샀다. 오만 원짜리 이어폰이 에어팟보다 좋은 소리를 낼리는 만무하지만. 일단은 뭐라도 귀에 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널찍한 공간에 조명이 어두운 카페를 한 곳 찾아 들어갔다. 거기서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시켜놓고 글을 미친듯이 쓴다음 저녁이 돼서 밖으로 나왔다. 마감에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마음이 들떴다. 이리저리 마구 걷다가, 산 너머에 교회 종탑같은 게 보이길래 그쪽으로 계속 걷다가 신호등이 없어 포기했다.
해가 지자 길이 더 미끄러워졌다. 그대로 교회가 보이는 오르막까지 쭉 걸어갔다간 크게 넘어져 다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스탈린도 뛰다가 넘어져서 엉덩방아 찧을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포 비에트Pho Viet’라는 베트남 음식점을 숙소 근처에서 발견해 식사를 하고 왔다. 정말이지 이곳의 작명센스란 놀라울 때가 가끔 있다. 무슨 필수요소 같은 건가.
내가 돌아갔을 때 나탈리아는 남편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머리가 조금 벗겨진 중년 남자였는데, 나탈리아와 달리 도시적인 인상은 아니고 순박한 농부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아내처럼 영어를 잘 하진 못하지만—나탈리아의 말에 의하면—내가 푸쉬킨 시집을 들고다닌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듯 “이틀로는 부족해. 며칠 더 있으라고 해” 라고 말했다고 한다. 푸쉬킨의 한역본 사진을 찍어놓고 싶다기에 그렇게 해줬다.
나는 그걸 보면서 ‘러시아인의 푸쉬킨 사랑은 정말 대단하구나’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나라도 웬 러시아 인이 윤동주 시집을 러시아판으로 들고다닌다고 하면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을 것 같아 금방 이해해버렸다.
“쓸데없이 많이 걸어서 피곤하네요. 오늘은 금방 자야겠어요”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길이었다. 나탈리아가 나를 붙잡고 말하길, “루크, 혹시 내일 우리 따라오지 않을래요? 가이드 일이 있는데 루크도 같이 갔다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하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탈리아가 가이드를 한다면 당연히 재미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좋게 관광이나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마감이 끝나기 전까지는 맘편히 구경할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 정중히 거절했다.
“저런. 너무 아쉬운데요. 글을 최대한 빨리 쓸 수 없어요?”
“그러게요. 저도 그게 궁금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래요, 나탈리아. 한국에서도 다들 그런 걸 궁금해하더라고요. 좀 더 빨리 쓸 수는 없는 거냐. 그런 건 빨리 해치워버리고, 이쯤에서 즐겁게 지내며 살 수는 없는 거냐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