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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25. 2022

여로에서 (13)

머무르기로 결정하는 데는 익숙지 않다

 

늦은 시간 눈쌓인 도시를 들쑤시고 다닌 탓일까. 일어나자마자 온 몸이 찌뿌드드했다. 근육통이 너무 심했다. 하긴 집에 있을 땐 산책도 잘 안 나가던 주제에, 러시아까지 왔다고 어줍잖게 몸을 혹사시키기는 했다.

몸 상태가 그래놓으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래서 ‘그냥 오늘은 누워만 있을까’ 라고 생각도 했지만, 전날 나탈리아에게 마감이 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며 거절을 놓았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까지 말해놓고 침대에 뻗어있기만 했다간 OECD 평균 근로시간 2위에 빛나는 한국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기에, 어찌저찌 몸을 펴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집은 비어있었다. 나탈리아도 라파엘도 일을 하러가고 없었다. 내겐 이 순간이야말로 에어비앤비 숙박의 묘미다. 러시아 가정의 합법적 침입자가 되어 집을 누비는 느낌… 가구며 살림살이가 단출해놓아서 무슨 비밀을 캐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정확히 말해 나는 그 조용한 느낌을 즐기는 것이라 상관은 없다.

 그렇게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화장실 문짝에 웬 메모가 한 장 붙어있었다. 전날엔 분명 이런 게 없었던 것 같은데.


Electricity is treasure.

We always switch it off with pleasure! :-)


보물treasure와 기쁨pleasure으로 각운을 맞춰놓은, 시 형태를 한 권고사항이었다. 글씨에서 느껴지는 바이브나, 평범하게 경고해주지 않는 방법이나, 이래저래 나탈리아가 써놓은 것이 확실한 문구였다.



 ‘새벽에 볼 일 보러 나왔다가 불을 안 끄고 들어갔나보다…’

 그나저나 ‘불 좀 끄고 다녀라’고 말해주는 것 치곤 꽤 참신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 생각한걸까. 나탈리아는 중년에 접어든 아줌마이지만, 성숙함 못지 않게 통통튀는 감수성이 있다. 임신한지 정확히 몇 개월 차인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그녀라면 꽤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늦게 일어나는 통에 아침도 걸렀고, 점심때도 가까워왔다. 그래서 밥이나 먹을겸하고 밖으로 나갔는데, 시내인데도 불구하고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삼십분쯤 걸어다녔을까? 우연히 ‘바실리 수리코프 미술관’ 옆을 지나가다가 호기심에 동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러시아 미술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워낙 땅이 넓어놓아서 ‘이것이 러시아 회화다’라고 잡히는 이미지가 없는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문학이나 음악에서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이 많지 않은 느낌이다. 이름을 대라면 마르크 샤갈,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바실리 페로프 쯤이나 될까. 수리코프는 이름이 특이해서 들어본 적만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별 기대없이—사실은 식당을 찾지 못해서—들어간 곳이었는데.

 ‘뭐야, 생각보다 너무 좋은데…’



 수리코프가 예전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목조주택을 미술관으로 꾸며놓았다. 오래된 나무집 특유의 느낌에, 오두막 지붕이며 아담한 정원에 새하얗게 눈까지 쌓여있는 걸 보자니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던 수리코프는, 이곳 고향집에서 소박한 느낌의 풍경화와 초상화들을 많이 남겼다. 주된 그림소재는 그의 어머니, 형제를 비롯한 가족들, 도심을 스쳐 흐르는 예니세이 강줄기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모습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팔린 역사기록화로도 잘 알려져있다고 하지만. 그림의 면면들을 보고 있자면 자기 주변의 평범한 일상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붓으로 그린 그림에서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질때. 나는 그 재주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마술적이었을지 상상하게 된다.




 “끼이이”하고 미술관의 커다란 나무대문이 닫혔다. 나는 길 건너편에 꽤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있는 걸 그때 알았다. ‘얀 그리무스’라는 뜻모를 이름의 레스토랑이었다. 더는 돌아다닐 힘도 없고 해서 곧장 들어가 점심메뉴를 주문했다.

 청어 샐러드와 수프, 감자를 곁들인 치킨 커틀릿이 차례로 나오는 코스요리였다. 예상에 비해 맛이며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잘 먹고도 계산대 앞에 서는 것이 겁이 났다. 한국에서라면 이삼만 원은 족히 할 것 같은 구성이었다. 그런데 영수증에 찍힌 금액은… 삼백오십루블!

 “볼쇼여 쓰빠씨바(정말 고마워요)” 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돈 오천 원 돈으로 이런 식사를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놀랄 노자다. 맘 같아선 팁이라도 주고 나오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라 그냥 정가로 계산하고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식료품점에서 작게 장을 봤다. 크바스라는 술은 문학 작품에서 몇 번 보고 한 번쯤 마셔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현지에선 호밀과 보리를 발효시켜 만드는 저알코올 음료 쯤으로 인식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단술쯤 될까 싶다. 다만 전통술에 대한 환상자체는 케피르의 놀라운 맛으로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에, 별 기대는 안 하고 ‘그냥 맛만 보자’는 느낌으로 사왔다.

아파트에 도착해 숨도 돌릴겸 마셔봤다. 맥콜에서 맥주 비율을 높인 듯한 그럭저럭 익숙한 맛이다. 해가 잘드는 거실에 노트북을 펴놓고, 마감을 하면서 홀짝홀짝 마시다보니 금방 한 병을 다 비워버렸다.

 ‘그렇게 맛이 있진 않았는데’



 그래도 그런 맛이 있다. 특출나게 맛있지도 않고, 음미할 건덕지도 딱히 없는데, 그냥 습관적으로 손이 가고 입에 대는 것들. 이를테면 담배와 술같은 것들. 하긴 크바스는 엄연히 알코올 도수가 있는 술이기도 하니. 맘같아선 이런 건 한국에 몇 병 싸들고 가고 싶다. 비행기에 타기도 전에 다 뺏겨버리겠지만. 그러고보니 그렇게 뺏은 물건들이며 술 같은 것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공항직원들이 적당히 빼돌려서 집에 갖고 가나? 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하루치 원고를 작업하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뻐근했던 몸상태도 몸에 익었는지 어쨌는지 많이 괜찮아졌고. 뭣보다 그 작은 아파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햇살도 잘 들고, 인터넷도 잘 터지고, 호스트도 친절하고, 역이랑도 그리 멀지 않다.

 ‘가만 보자, 어차피 열차를 타든 어쨌든 원고작업은 해야하니까…’

 며칠 더 머무르면서 원고를 완성한 다음에 떠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이날 저녁, 나탈리야, 라파엘과 함께 다시 한 번 포 비에트Pho Viet를 찾아 베트남 음식을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나탈리야와 라파엘은 눈에 보이는 나이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결혼했다. 라파엘은 우즈벡 출신으로 한국의 ‘국수’라는 음식을 알고 있었다.

 “오, 설마 후루룩하는 소리랑 비슷해서 ‘국수’인 거에요?” 나탈리야가 물었다.

 “아, 뭐 그런 셈이죠.” 라고 나는 대답했다. 사실 아닐 것 같지만. 소리도 그다지 안 비슷하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해주는 쪽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해버렸다.




 “아, 맞아.나탈리아.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뭐요?”

 “혹시 여기서 이틀 정도 더 머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여긴 인터넷도 잘 되고, 조용하고, 일하기가 좋은 곳 같아서…”

 “아, 그럼요! 라파엘이 좋아하겠네요. 정말 잘 됐어요”

 “저, 그럼 비용은…”

 “내일 현금으로 저한테 직접 계산해요”

 “아, 그러죠”

 너무 빠르게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내겐 꽤 긴 고민이 필요한 이야기였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당연히 되지. 왜 지금 얘기했어?’ 같은 느낌마저 든다. 같은 곳에 며칠이나 계속해서 머무른다는 것이, 그 별 볼 일 없는 결정이 내게는 얼마나 버겁고 힘겨운 것이었는지.

조금 허탈한 와중에 나탈리야가 느닷없이 “아, 루크는 곰고기 먹어본 적 있어요?” 하고 물어서 그쪽으로 대화주제가 훌러덩 넘어가버렸다.

 “곰고기요? 당연히 없죠”

 “아, 그래요? 나중에 한 번 먹여야겠네…”

 “러시아 사람들은 곰을 먹나요?”

 “가끔요? 적당한 곳에 가면 팔아요. 사슴고기, 곰고기 같은 거. 왜요?”

 “아, 아니. 조금 놀라서…”

 “뭐가요? 곰을 먹는 게?”

 “아니, 그것보다는… 저는 친구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소간 머무적거리면서 대꾸했다. “곰이랑 러시아 사람들…”

 “아하하하하!!” 나탈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려서, ‘뭔 소리를 하나 했네’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친구 아니에요”

 “네…”

 나는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런 곳이라면, 하루이틀보다 좀 더 오래 머물러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크라스노야르스크는 좋은 도시였다. 그렇지만 나는, 거기에 그렇게 오래 있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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