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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28. 2022

여로에서 (15)

줄 수 있는 건 그렇고 그런 것들 뿐이다



꽤나 감동적이었던 결말에도 불구하고, 전날밤의 나는 ‘잠들 수조차 없을만큼 극심한 고통 어떤 것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그러잖아도 불면증 때문에 약없이는 제때 잠들  없는 처지인데. 몸에 붙은 살덩이들을 단칼로 찌르고 후벼파는  같은 통증이 이어지자 새벽 세네 시가 되도록 의식을 놓지 못했다.

일어난 시간은 오전 열한 시. 여느 몸살환자들의 다음날처럼 전신이 땀에 흠뿍 젖어있었다. 티셔츠는 얼마나 푹 절었는지, 입고있던 걸 벗어 던지자 ‘철퍽’하며 방바닥에 눌러붙을 정도였다. 수영복이 아닌 평범한 면티셔츠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건 처음 들어봤다. 힘이 남아있었다면 꽉 쥐어짜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지 확인해봤을 텐데.

 몸상태는 어제보단 나아졌지만, 그것은 어제가 워낙 최악이었던 탓이지 이제 좀 살만하다고 설칠 정도는 못됐다. 방을 나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는 데에도 몸이 말을 안들어 고생스러웠다.



 주방 탁자위에는 나탈리아가 사놓은 음식과 약이 놓여있었다. 출근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뒀던 걸까. 직사각형의 플라스틱 용기에 고기와 볶음밥 같은 것이 같이 포장되있었는데, 메뉴나 모양새를 보아하니 소비에트… 아니지. 포비에트에서 사온듯한 음식 같았다. 쌀이 포함된 걸 보니 어쨌거나 내 입맛을 고려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약은 테라플루랑 비슷한 제형의 감기약으로 묘한 레몬맛 가루를 따뜻한 물에 타먹는 물건이었다. 밥도 약도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이래서야 내가 낸 숙박료보다 배꼽이 더 큰 것 아닌지… 고마움반 미안함반으로 전부 먹어치웠다.

나탈리아의 아파트에서 나가는 길에, 나는 묵기로 약속했던 이틀치의 숙박료와 영어로 쓴 짧은 엽서 한 장, 그리고 부부가 유달리 좋아하던 푸쉬킨의 시집을 선물로 남기고 나왔다. 내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 뿐이다.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 그런 마음을 남긴 기록들. 내게 소중한 글이나 책….



이메일로 전달된 PCR검사 결과는, 역시 양성이었다. 확정적인 양성이 나왔으니만큼 조금의 지체없이 숙소를 옮겨야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단독 아파트로 이동했다. 시내와는 꽤 떨어진 곳에 있는, 비교적 꽤 최근에 지은듯한 아파트 단지였다. 근처에 도착하자 알렉세이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나와서 아파트 키를 주고, 내부 구조를 짧게 안내해준 다음 떠났다. 방 두개에 바람이 드는 작은 테라스와 부엌을 합쳐 열댓평쯤되는 곳이었다. 깔끔한만큼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 책상과 침대, 부엌의 탁자와 의자 등 거의 모든 가구가 이케아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건물 십일층에 있는 아파트 창문으로 단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혹가다 건물 몇 채와 오래된 교량이 눈에 띌 뿐 대체로는 아무 것도 없는 평지에 가까웠다. 어쩌면 알렉세이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투자용으로 경기도 교외의 아파트 같은 걸 샀다가 수익성이 안 나와 숙박용 레지던스로 개조한 건 아닐까 싶었다. 하루에 만 몇 천원하는 돈으로 그만한 넓이의 아파트를 빌릴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내게는 행운이지만.

 그나마도 다른 예약이 있는지 3박 이상으로는 묵을 수 없었다. 당장은 인터넷도 잘 되고 널찍한 작업용 책상도 있으니, 증상이 가라앉을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격리요양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파트 단지 내에는 크지 않은 식료품점과 약국이 상가로 붙어있었다. 나는 최대한 사람이 없을법한 시간대를 골라서, 마스크와 장갑으로 중무장을 한 뒤 먹을거리, 마실 물, 이부프로펜 한 상자를 사서 돌아왔다.



 약을 먹자 일시적으로 열이 가라앉았다. 이러다가 언제 다시 증상이 심해질지 모를 일이니,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일을 해두자 싶어 노트북을 폈다. 안그래도 마감이 늦어져 편집자에게 쓴소리를 들은 시점이었다.

 “제가 급하다고 말씀드릴 때는, 진짜로 급한 겁니다. 작가님… 부탁이니 서둘러주세요.”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며칠만에 수만자 분량의 원고를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도 충분치 않은데 병중이기까지하니 여러가지로 한계를 시험받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이 있을 때, 충분히 건강할 때 일을 끝내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다. 나중의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 속좋게 불평하는 것도 겨를이 있을 때나 할만한 것이지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쓴다 했으면 써야지.

 신기한 건 그렇게나 아팠으면서도, 쓰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자니 평소와 그리 다른 상황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일하다 말고 좀이 쑤시고 허리가 아픈 느낌과 비슷했다. 스트레칭을 하는대신 간단한 음식과 약을 챙겨먹어야 하는 차이는 있다.

영사관 측으로부터 검사는 잘 받았는지,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확인차 연락을 해왔다. 나는 PCR 검사 결과 양성이 나왔고, 몸상태는 어제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거동이 쉽지 않으며, 지금은 혼자 쓰는 아파트로 옮겨 쉬고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쉬는 건 아니고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얘기까지 했다간 ‘뭐야 몸조리 해야할 환자가 왜 일을 하고 있지’ 하는 걱정을 사거나, ‘뭐야 이 새끼 코로나라는데 별로 안 아픈가보네’ 라는 오해를 사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적당히 중립적인 대답을 하는 쪽이 나을 듯했다. 다행히 별다른 특이점은 느끼지 못하신 모양이다.



 밤이 깊어지자 더는 일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심해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 좀 쉬었다가 다시 써야지’ 하고 누웠는데, 어째 아픈 게 더 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약을 더 먹기로 했다. 그런데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하니까… 부엌으로 비틀비틀 걸어가서 아까 사왔던 빵과 주스를 꺼내 먹었다.

그렇게 약을 더 먹고 침대에 누웠다. 자정이 넘어가자 열은 내려갔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 깨있다보니 다시 배도 고파져서, 썰어놓은 돼지고기도 사왔던 것이 기억나서 숙소 후라이팬에 구워먹기로 했다.

 인덕션 화력이 애매해서 끝까지 다 굽는데 시간이 걸렸다. 조미료로는 소금과 후추가 구비돼있었지만, 대체 어느 부위의 돼지고기인지 비린내가 잡히지 않았다. 이런 데는 맛술을 좀 넣으면 딱인데… 어차피 맛으로 먹는다기보다는 영양실조를 면하고 수면제를 먹기 위함이니까 그러려니하고 먹었다. 이에 고깃조각이 끼는 건 변변찮은 저녁을 먹을 수록 심해지는 증상이어서, 이런 날에는 잇몸에서 피가 날 때까지 양치를 하고 잠에 들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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