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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25. 2019

습작

열두번째

관악산은 주말을 맞아 산을 찾은 등산객들로 붐볐다. 세갈래로 뻗어내려가는 계단이 연주대 아래에 이르러 한 데로 묶여 있었다. 연주대의 정면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한자로 된 연주대 글씨와 해발고도가 함께 새겨진 바위였다. 그 바위 주변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햇살이 잔뜩 내리쬤다. 사람들은 바위 앞까지 기어올라가 기념 사진을 찍었다. 하나, 둘, 셋, 김치, 하며 사진 찍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위를 기어올라갔다. 탁주 냄새가 코를 찔러 고개를 돌려보니 모 등산동호회 사람들이 저들끼리 막걸리 병을 돌려마시고 있었다.


"아까 올랐던 바위쪽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은데. 무슨 바위라고 했지?"


잠자코 주위를 둘러보던 누나가 말했다.  


"학바위일 거야. 아마도"


내가 대답했다. 아마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우리는 연주대로 오는 길에 바위로 된 능선을 올랐다. 그 능선 꼭대기에 있는 바위에 올랐을 때는 사방이 탁 트여 있었는데, 그 덕에 연주대는 물론 북쪽으로는 남산타워, 동쪽으로는 펜촉같은 모양의 롯데잠실타워 까지도 훤히 보였다. 한편 관악산 최고봉이라는 연주대에서는, 정면이 큰 바위에 틀어막혀있거니와 그 위쪽은 낙하사고가 많으니 오르지 말라는 안내팻말이 세워져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기상관측소인지 뭔지 하는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관측소 주위로 쳐진 철조망 너머에는 고양이 대여섯 마리가 나란히 앉아 햇빛을 쬐고 있었는데,누나는 돌연 잠깐만, 하더니 그 고양이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다가 돌아왔다.


우리는 연주대 주변의 바위를 돌고돌아 간신히 북쪽의 서울 한토막과 안양이나 과천 정도로 보이는 경기도 외곽의 풍경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기상예보에 의하면 대기중 미세먼지 함량이 '보통'인 날이었다. 서울에는 건물이 무진 많았다. 작게는 건물 숲처럼 보이다가, 시야의 초점이 조금이라도 흐려지면 도시 전체가 얼룩덜룩한 회색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주대 주위로는 까마귀가 세 마리 정도 날아다녔는데 이따금 우리의 시선 앞을 지나치면서 초점을 흐리곤 했던 것이다.


"까마귀는 좋겠다. 우리는 엄청 고생해서 올라왔는데 말야" 누나가 느닷없이 운을 뗐다.


"까마귀들한테는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엄청 우스워보이겠지? 이 낮은 언덕배기에 올라가려고 낑낑대는 사람들이라니"


"글쎄. 별 생각 없지 않을까?"


"까마귀는 엄청 똑똑한 새야. 생각이 없을리 없지"


누나가 대꾸했다. 난 초점을 흐린채로 계속해서 서울을 보고 있었다. 똑같이 생기거나 다르게 생긴 건물들이 뭉치고 얽히는가 하면 층층이 쌓여서 마치 정교한 기계장치의 단면처럼 보였다. 나는 문득 내가 살고 있거나 살았던 곳을 찾아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그만뒀다.


"똑같아 보일 거야" 내가 말했다.


"뭐? 뭐가 말이야?"


"까마귀 눈에는 다 똑같아보일 거라고. 저 건물들이며, 한강 위로 놓인 몇 개의 다리나, 구석으로 넓게 뻗은 논밭하고 비닐하우스나, 또 해발 육백미터 쯤에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우리나 말이야……"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수십년 남은 우리 집의 주택융자가 떠올랐다. 다른 무엇도 아닌 주택융자 때문에라도, 아버지는 앞으로도 계속 오전 일곱 시에 일어나 출근을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고, 각자의 방에 책상을 두거나 공부를 하고, 또 그 근처에 있는 친구를 불러 함께 밥을 먹거나, 당장 이 산을 내려가자마자 찾아가 쉴 곳이 존재하려면, 가족 가운데 어느 누군가는 반드시 수십 년 동안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반쯤 녹은 눈이 군데군데 묻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나는 반 정도 내려가는 길목에서 크게 넘어졌는데, 때마침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 위로 까마귀 우는 소리가 까-악하고 들려왔다.


<관악산의 까마귀>,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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