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Apr 04. 2019

습작

열네번째

내가 그 노인을 처음 봤던 것은 강남역 오번 출구로 나가는 길목을 지나면서였다. 노인은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와 사지를 처박고 있었다. 성성한 백발은 무슨 일 때문인지 무더기로 뽑혀 듬성듬성 더러운 두피가 보였고, 그 위에는 얼핏 희한하게 미대륙을 닮은 검은색 반점이 도드라져 있었다.     


강남역 오번 출구 앞에는 높고 가파른 유리빌딩이 많았다. 오번 출구로 매일같이 드나드는 수 만 명 가운데에는 국내 유수의 대기업, 재벌기업의 강남지사에 근무하는 직장인, 위워크나 위워크를 따라 해 만든 공유 오피스에 출근하는 유망 스타트업의 젊은 개발자나 디자이너들, 그리고 이들에게 매일 일용할 아메리카노며 베이글이며 리코타 치즈가 들어가 있는 샐러드나 해산물과 와인을 듬뿍 넣은 파스타를 해먹여야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다만 이 가운데 그 노인에게 값싼 연민 이상의 눈길을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근처에서 미팅을 끝내고 내려오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노인 앞에 놓여있는 추파춥스 깡통에는 기껏해야 십 원짜리와 오십 원짜리 동전 몇 개가 쓰레기처럼 버려져있었을 뿐, 눈에 띌 만한 변화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어쩐지 두려운 마음으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깡통에 넣은 뒤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다.     


지하로 반칸 정도를 더 내려가면 백화점식 조명이 길게 뻗어 신분당선으로 이어지는 상가였다. 상가에서는 유기농 야채며 비싼 쇠고기를 몇 점 넣었다는 이유로 한 줄에 오천 원을 넘게 받는 김밥집이 있었고, 버터나 잼 또는 생크림을 바른 도넛을 커피와 함께 묶어 파는 프랜차이즈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역사로 통하는 입구 언저리부터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거의 하루 종일 그 앞에 앉아있는 노인이 그 냄새를 맡지 못했을 리도 없다. 나는 내가 준 만 원으로 왜 그런 음식들을 사서 요기를 하지 않는지, 옆으로 보이는 앙상한 광대뼈와 낡은 바지와 싸구려 신발 사이로 드러나 있는 깡마른 발목을 보며 다소 겸연쩍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노인이 눈에 밟힐 때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 넣음으로써 값싼 동정심을 달래는 것밖에 달리 없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오번 출구 쪽에 다시금 일이 있어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노인이 늘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나는 기척을 최대한을 줄여 다가가서, 아주 조심스럽게 깡통을 들여다봤다. 깡통 안에는 수북이 쌓인 십 원, 오십 원, 백 원짜리 동전들 위로 만 원짜리 지폐가 대여섯 장 정도 나풀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결 나은 마음으로 역을 빠져나오면서, '저 양반, 오늘은 수확이 꽤 괜찮은 걸. 근처에 괜찮은 밥집이라도 가서 배불리 먹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했다.     


그 날은 내가 일주일 동안 강남에서 보던 일이 마무리된 날이었다. 때문에 관계자들과 밤늦게까지 회식을 하다가, 자정이 다 될 무렵에서야 지하철역 입구로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마신 술로 꽤 거나하게 취했고, 막차가 끊겼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강남역 오번 출구는 회식장소에서 도보로 십 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입도 텁텁하고 머리도 띵한 나머지 좁은 골목으로 가는 것에 적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강남역이 멀리 보이는 큰길로 빠져나와 돌아 걷고 있었는데, 저 멀리 오번 출구가 보여야 할 곳 앞으로 난데없이 점멸하는 불빛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 십수 명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무슨 행사라도 하고 있겠거니, 강남역이라면 하루 이틀도 아닌 일이므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계속 걸어갔다.     


이 분쯤 더 걸어가자, 스무 명 정도의 젊은 남녀가 출구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싸며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오가던 조명은 경찰차 위에 달린 것이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이 구경하던 남녀를 밀어내면서, '다른 출구로 돌아가라'며 소리를 몇 번 질렀고, 사람들은 조금 구시렁대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자, 젊은 경찰 한 명은 폴리스라인이라 써붙여진 노란색 테이프를 오번 출구 주위에 두르기 시작했다. 수사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나는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어서, 테이프를 두르던 경찰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젊은 경찰은     


"아, 별 건 아닙니다. 지하철 나오는 출구 쪽에 변사자가 있었거든요" 하고 대답했다.     


"변사자라고요?"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큰일 났네요. 이렇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그런 일이…… 용의자는요? CCTV에 잡혔습니까?"     


"용의자는요, 그냥 혼자 죽은 겁니다. 강남역 인근에서 구걸하며 노숙하던 노인인데, 바닥에 엎드린 채 죽어있던 걸 지나가는 시민이 발견했어요. 시체에서 웬 썩은 내가 진동하기 시작해서…… 정확한 건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아마도 세균 감염이나 지병 때문인 걸로 보입니다"     


"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데없이 술이 깨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아무튼, 걱정하시는 것처럼 칼부림이 나거나 한 건 아니니까요. 안심하고 가셔도 됩니다. 생각보다 이런 일이 꽤 있습니다. 저들끼리 싸우다 죽기도 하고요. 일반 시민 분들한테 심려 끼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오늘처럼 난데없는 경우는 저희로서도 한 소리 들어먹게 생겼네요" 경찰이 자못 익숙한 듯이 말했다. 나는 폴리스라인 너머로 웅크린 사람 정도 크기의 무언가가 검은 봉투에 씌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늦게 일어났다. 간만에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 한 잔을 가득 채워 한 컵을 그대로 들이켰다. 한결 나은 기분이 들자 소파에 기대 누워 TV를 켰다. 오래된 영화의 재방송, 손흥민의 시즌 몇 번째 득점 장면, 이월상품을 비싸게 파는 홈쇼핑 채널을 하릴없이 지나다가 끝내는 뉴스를 틀어놓았다. 콩나물해장국과 뼈해장국 사이에서 고민하던 사이 '어제의 사건사고'가 보도되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아주 정확한 목소리로, '전날 강남역 인근에서 생활하던 노숙인 한 명이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다행히 타살이나 사고가 있었던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경찰 측은 노숙인이 오랫동안 앓고 있던 질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향후 지하철역 인근의 위생관리에 더욱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하고 보도했다. 짧은 보도였다. 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웃포커스>, 2019. 4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