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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07. 2019

습작

열다섯번째

"내가 피렌체에서 먹었던 피자 얘기했었나?" 지수가 말했다. 레스토랑 홀의 웨이터가 피자를 들고 왔다.     

"아니" 나는 음료수 컵이며 냅킨을 테이블 가장자리로 치우며 대답했다. 웨이터는 동그란 피자판을 테이블 중앙에 조심스레 내려놨다. 그리고는, 맛있게 드세요, 하고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방금 화덕에 구운 피자는 노란 토핑 위로 연기를 뿜고 있었다.     


"내가 그 얘기를 안 했구나. 너는 유럽 어디 가봤다고 그랬지?"     


"나는 유럽 안 가봤어"     


"그럼?"     


"그럼이라니?" 내가 유리잔에 물을 따라내며 되물었다.     


"아직 해외여행을 안 가본 거야? 설마?"     


"가보긴 했지"     


"어디로 갔는데?"     


"일본에. 오사카에 유학 간 친구가 있었거든"     


"그리고?"     


"없어" 내가 말했다. 철제 커팅기를 들어 피자를 반으로, 반으로 잘린 피자를 또다시 반으로 잘라 사등분했다.     

"한 번 더 자를까?" 내가 물었다. "이렇게 두 개씩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말 일본밖에 안 가봤단 말이야?"    

 

"어. 그게 왜?"     


"아니, 얘 좀 봐? 너도 이제 이십 대 후반이야. 악착같이 돈 모으더니, 어디에다가 다 썼대?"     


"이렇게 맛있는 피자 먹는데 썼지" 나는 큼지막한 피자 한 조각을 덜어 내 접시로 옮겨놓았다. 뜨거운 치즈가 죽 늘어져 피자가 있는 원판과 내 앞접시 사이에 가느다란 실을 만들었다.     


"맛있는 피자라니! 그건 니가 이탈리아에서 피자를 안 먹어봐서 그래. 현지에서 먹어보고 싶지 않아?"     


"음…… 현지는 내 이름인데?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 너도 얼른 먹어. 식겠다" 나는 피자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고구마와 치즈가 들어간 피자였다. 단순한 맛이었지만, 느닷없이 점심에 피자가 당긴다면 이만한 것도 없었다.     


"현지야"     


"왜?"     


"너도 이제 이십 대 후반이야"     


"만 나이로는 아직 중반이지"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지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 내가 일본밖에 안 가본 게 뭐?"     


"젊을 때 많이 다녀야 하는 거야. 나중에 늙고, 특히 결혼하고 애가 생기면 맘 편하게 어디 여행도 못 간다니까! 내 말 믿어. 빚을 내서라도 해외여행 가라는 말 못 들어봤니?"     


"그런 거 못 들어봤는데. 그리고 나는 결혼도 애도 생각 없어"     


"그럼 요즘 걱정 같은 거 없어? 안 우울해? 일상에 변화를 좀 주는 게 좋다니까"     


"별로 걱정 같은 거 없는데"     


"없다고? 단 하나도?" 지수가 내 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며 물었다. 하도 진지한 표정이라 내 나름대로는 무진 애를 썼다.     


"음……"     


"거봐, 있지?"     


"어벤져스 예매를 아직 못 했어. 이 달 말 개봉인데……"     


"아, 진짜!" 지수는 더럭 화를 냈다.     


"아, 왜 화를 내고 그래! 소화 안 되게" 나는 맞받아쳤다. 대화는 됐으니 얼른 피자를 먹고 싶었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말을 돌리고 그래?"     


"그럼 뭐가 중요한데? 이번이 어벤져스 마지막이란 말이야.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얼마나 된다고"     


"넌 인스타에 친구들이 해외여행 간 거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데?"     


"즐거워 보여서 좋지, 뭘"     


"너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딱히"     


"뭐야, 대체? 돈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거라기 보단…… 꼭 비행기 타고 멀리 가야 여행은 아니잖아. 당장 서울만 해도 못 본 게 아직 많고"

     

"음……" 지수는 말없이 목을 매만졌다. 그 사이 나는 피자를 한 조각 더 덜어 내 접시로 옮겼다.     


"낭만이 없어, 너는"     


"므라고?" 내가 대꾸했다. 입안에 음식이 있어 조금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그나마 음식 조각이 튀어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말, 그렇게 이십 대를 보내버리면 나중에 크게 후회한단 말이야. 정말이야"     


"벌써 서른은 먹은 거처럼 말하네. 너 나이 속였어?"     


"야,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 장난치는 거 아니라니까?"     


"나도 장난 아니야. 피자 식으니까 얼른 먹어"     


"넌 떠나야 해. 니 삶엔 여행이 필요하다니까"     


"난 필요 없어. 인생이 나한테는 여행이거든"     


"아니, 그런 여행 말고. 비행기 타고 저 멀리 가서, 빅벤도 보고, 에펠탑도 보고, 피사의 사탑도 봐야 한다고. 성 베드로 성당은 또 얼마나 큰데! 그리고 있지, 이탈리아 남자들이 또 엄청 다정해. 인종차별이다 뭐 다해서 나도 겁을 좀 먹었었는데, 길 한 번 물었더니 웃으면서 가이드까지 해줬다니까? 아침나절 내내 같이 다니다가 숙소 앞에까지 따라와서 얼마나 놀랐는데. 그리고 지중해 요리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거 알지? 피렌체에 잠깐 들렀을 때 갔던 레스토랑에서 있지……"     


지수는 쉬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내 몫의 피자를 꼭꼭 씹어 삼키고, 포크로 보라색 피클을 왕창 찍어서 입에 욱여넣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영 양이 차질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서는 어제 남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엄마가 보내준 김치를 죽죽 찢어 올려 먹을 작정이었다. 이때 미역국은 적당히 차가워도 상관없다. 밥이 따뜻하면 국에 말 때 알아서 데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앞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지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돌연 행복한 기분이 샘솟았다. 이번 주 주말에는 엄마에게 반찬을 맛있게 먹었다고 편지를 써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마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딱밤이었다. 지수가 대뜸 내게 딱밤을 때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파!" 내가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지수는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말로 하면 되지, 왜 때리고 그래?"     


"말로 해서 못 알아먹으니까 그런 거 아냐? 난 그냥 갈 거야" 지수가 가방이며 외투를 자리에서 들고일어나며 말했다.     


"피자는 안 먹어?" 나는 기대를 조금 했던 것 같다.     


"안 먹어! 음식도, 시간도, 다 낭만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아무튼 너랑은 대화가 안 돼.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아주"     


"니가 말하는 낭만이라는 게 뭔데? 열몇 시간 동안 비행기 타고 간 곳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게 낭만이야? "     


"젊음이라는 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왜 그걸 몰라? 난 니가 불쌍해. 하루 종일 소처럼 일만 해대니까. 그렇게 열심히 돈 모아봤자 집 한 채 못 산다는 걸 왜 몰라? 사람은 밥으로 사는 게 아니야. 낭만이라는 게 있어야 사는 거라고. 떠나는 것의 낭만이 있어야 지금의 삶을 즐겁게 버틸 수 있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짜증 나니까"     


지수는 열 받은 목소리로 실컷 퍼붓고는 가게를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날 난 지수가 남기고 간 피자를 절반 정도 먹고, 나머지는 싸서 집으로 가져갔다.     


그때부터 난 지수와 연락하지 않았다. 뒤늦게 지수의 근황을 알게 된 것은 오랜만에 들어간 인스타 피드 덕분이었는데, 홍콩으로 여행 간 사진을 잔뜩 올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남자 친구와 헤어진 우울감을 해소하러 갔다는 모양이었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 이별이었다. 지수를 알게 됐던 중학생 때부터 세자면 딱 스무 번째였다. 나는 문득 지수가 가여워 눈물이 났다. 지수가 비행기를 타고 몇 백 시간을 떠난 들, 진정 원하는 걸 찾을 순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 지수에게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냈다. 진정 낭만이 없는 사람만이 먼 곳에서 낭만을 찾으려 든다고. 난 너와 화해하고, 서로가 생각하는 낭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차단돼 있었다. 난 지수가 너무 가여워 밤늦게까지 울었다.     


<달팽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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