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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23. 2019

습작

스물일곱번째

"이게 어떻게 바람피운 게 돼? 왜 날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남자가 강변했다. "대체 니가 생각하는 '바람피우는 거'의 기준이 뭔데? 난 도저히 모르겠어"


"네 말은 지금 미안한 게 없다는 거야? 니 행동이 떳떳하다고 하는 거냐고" 여자가 대꾸했다.


"아니, 예지야.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내 이름 부르지 마. 짜증 나"


"화가 많이 난 건 알겠어. 근데 일단 둘이서 얘기하면 안 될까? 여기 카페는 사람도 너무 많고……"


"아, 싫다고 했잖아!" 예지는 더럭 소리쳤다. 카페 손님 몇 명이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 주위를 응시했다. 


"내가 왜 너랑 단 둘이 있어야 해? 역겨워서 도저히 같이 있어줄 수가 없어. 미안해"


"아무리 그래도 역겹다니? 화가 났어도 할 말 안 할 말은 구분해야 할 거 아니야? 뭐가 그렇게 속이 상한 건데, 너는?"


"그걸 몰라서 물어? 진짜? 그 말 진심이야?"


"알아, 알기는" 남자는 마지못해 시인하듯 말했다. "걔랑 몰래 연락하고, 그런 건 내 잘못이 확실히 맞지. 거기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봐. 근데 너도……"


"나도 뭐?"


"너도 내 휴대폰 감시한 건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 내가 의심받을 행동을 한 것도 있겠지만 말이야"


"아, 정말 미치겠어. 왜 내가 너랑 이런 얘기나 하고 있지? 그냥 집에 가도 될까?"


"아니! 아니야. 미안해. 방금 건 진심이 아니었어. 그런데, 나 정말 억울해. 니가 오해하는 것만큼 대단한 게 아니라니까, 민영이랑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몰래 카톡 하고, 같이 밥 먹고, 밤에 술 마시고, 그게 바람핀 게 아니면 뭔데? 뭐냐고!"


"아, 씨……" 순간 남자에게서 욕지거리가 나올 뻔했다. 카페가 아니었다면 별 저항 없이 튀어나왔을지도 몰랐다. "조용히 좀 할 수 없어? 나도 잘 얘기해보려고 하는데 왜 그래?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게 뭐가 중요한데? 그따위 게 중요하면 그냥 닥치고 꺼져버리면 될 것 아냐?"


"욕은 하지 마. 나도 욕은 안 하잖아? 제발 진정 좀 해.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남자는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니가 본 것처럼 카톡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셨어. 알다시피 요즘 너랑 얼굴도 잘 못 보고…… 아, 나도 이게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냥 상황을 설명하는 거야. 아무튼. 그래서 나는 잠깐 딴생각을 먹을 뻔하기도 했어. 그런데 민영이가 너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정말 정신적으로 뭐랄까, 공허한 마음에 그랬던 거야. 나는 그냥 별로 할 일도 없는데, 너는 알바니 강의니 해서 이것저것 바빴잖아. 그런 상황이 영향을 많이 끼친 거지, 정말로 다른 생각을 먹었던 게 아니라고. 난 정말 민영이랑 손도 한 번 안 잡았어.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손을 안 잡았으면 바람핀 게 아니게 되는 거야? 너 제정신이니?" 예지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말했다. "제발, 내가 널 만난 걸 더 후회하게끔 하지 마. 지금도 너무 힘들어.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단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잖아. 난 니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서 말을 하는 거라니까……"


"오해 아니야. 나는 전혀 오해 같은 거 하고 있지 않아. 과장해서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 난 그냥 니가 바람을 핀 것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뿐이야"


"아! 진짜, 그게 아니라니까!" 남자가 분통 터진다는 투로 말했다. "대체 니가 생각하는 바람의 기준이 뭐냐니까? 몇 번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민영이랑 손 끝 하나 닿은 적 없어. 아무것도 안 했다고. 내가 연락하고, 밥 먹고, 술도 마신 건 사실이야. 근데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왜 안 믿어줘, 이걸?"


"연락하고, 밥 먹고, 술을 마셨으면 그게 바람이야. 나한테는 하루에 연락 한 번도 제대로 안 하면서, 민영이한테는 새벽에만 두 시간이나 통화했잖아. 아니야?"


"두 시간까지는 아니야" 남자가 말했다. "한 시간 조금 넘었을 걸……"


"아……" 예지는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방금 한 말은 그냥 한 거야. 오해하지 마. 그게 잘했다는 건 아니었어. 근데 정말 바람핀 건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이렇게 부탁할게, 응?"


"넌 내가 상처 받는 것보다, 니가 바람핀 사람이 되는 게 더 무서운 거구나. 안 그래?"


"아니, 니가 오해하는 게 싫은 거야. 니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게 똑같은 말이야. 넌 니가 바람 폈다는 걸 인정하는 것 보다, 내가 상처 받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기준은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네. 넌 바람피는 거의 기준이 뭔데? 몰래 연락하고, 밥 먹고, 밤늦게까지 단 둘이 술 마시는 게 바람이 아니라면, 너한테는 뭐가 기준인 거야?"


"그야……" 남자는 다소 주저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손을 잡는다거나, 키스를 한다거나……"


"그래? 넌 손을 잡고 키스를 해야 '바람 폈다'라고 할 수 있는 거니? 나도 손 안 잡고, 키스도 안 하면, 다른 남자애들이랑 뭐든 해도 괜찮은 거구나, 그렇지?"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순 없어. 아무래도 결정적인 건, 몸을 섞는 거 아닐까, 일반적으로는……"


"아하, 그래? 넌 니가 민영이랑 섹스를 안 했으니까, 바람 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야? 정말로 그래? 나도 섹스만 안 하면……"


"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왜 자꾸 말꼬리를 붙잡고 그래? 말을 좀 끝까지 들어, 부탁해, 예지야……"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내가!" 예지가 소리쳤다.


"아, 씨,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결국 이렇게 돌아왔잖아? 민영이 연락처는 지웠고, 차단도 했어. 확인해봐도 좋다니까. 근데 민영이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


"나, 다 들었어"


"뭘 들었는데?"


"민영이한테 요즘 마음이 붕 뜬 것 같다고 했다면서. 나랑 만나는 거에 의구심이 든다고, 민영이 너랑 만나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진다고 했다면서……"


"그건 내 말실수야. 사과할게. 진심이 아니었어"


"새벽 두 시에 전화로 그런 얘길 하면서, 진심이 아닌 얘길 했어? 왜? 민영이랑 자고 싶어서?"


"자꾸 말 그 따위로 할래? 난 그런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어. 한 번도……"


"그냥 솔직히 '민영이랑 자고 싶었다'고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거야. 내가 요즘 너한테 소홀했던 것도 있으니까. 정말 술 마시고 덜컥 섹스를 했더라도 이 정도로 상처 받진 않았을 거야"


"뭐라고?"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말이 돼? 너 지금 무슨 말하고 있는지 알아?"


"알아. 나는 지금 완전히 제정신이야. 너보다 훨씬 제정신이라고…… 실수? 술 마시고 정신을 잃어서, 한 순간의 욕구에 못 이겨서 섹스를 했다면 차라리 그건 실수라고 할 수 있겠지. 민영이 더러 나보다 키가 더 커서 좋다고 하고, 다리가 예쁘다고 하고, 머릿결도 좋다고 하고, 이게 실수야? 씨발! 너 제정신이야?"


"뭐, 씨발? 방금 씨발이라고 했어?" 남자는 짐짓 위협적으로 대응했다. 예지는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래, 씨발! 씨발이라고 했다, 왜?" 목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 잡는 거? 키스하는 거? 섹스? 그딴 건 존나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야말로 마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거든. 욕구만 있으면 누군들 못하겠어? 넌 야동 볼 때 AV배우한테 진심으로 사랑을 느껴서 자위를 하는 거야?"


"말조심해, 제발. 나도 참는데 한계가 있어"


"그래? 난 이제 없어. 더 이상 너한테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없다고. 뭐? 섹스를 안 했으니까 바람핀 게 아니라고? 몸을 내준 거야 겨우 물리적인 부분일 뿐이야. 넌 마음이 완전히 민영이한테 돌아섰었잖아?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야. 마음이 없었으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겠지, 안 그래?"


"그래. 아주 잠깐. 그렇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어. 난 참고 견뎌냈다고. 그건 바람핀 게 아니야"


"제발 지랄 좀 하지 마. 니 몸뚱이 같은 거, 실수로 누구랑 침을 섞든 상관 안 했을 거야. 근데 정신적인 건 달라. 내가 뭘 하더라도 돌아오지 않는 거라고……"


"글쎄? 정신적인 거에 불과했다면 바람 폈다고 할 수 없는 거 아닐까? 뭐든 생각보다 실천이 핵심인 거잖아. 범죄도 마찬가지 아냐?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훔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는 거랑, 실제로 훔친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잖아"


"그건 물건이고, 난 사람이야. 니가 말한 거야말로 완전히 다른 문제지. 훔친 물건은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라도 있지, 마음은 그렇게 하지도 못해. 실제로 돌아왔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어. 너한테는 여자가, 섹스가 물건과 같은 개념이야?"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지 좀 마"


"그래. 넌 마음이고 나발이고 섹스를 했고 안 했고 가 중요하다는 거지? 반대로 생각해볼까? 내가 니 친구 승호랑 단 둘이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 밤늦게 술도 마시고, 너 몰래 한강도 걸어 다니고 그랬어. 다만 손도 안 잡고 키스도 안 하고 섹스도 안 했다고 쳐"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왜 하필 승호야?"


"이건 물리적으로 아무 결과도 일어나지 않았지. 너 말대로라면 말이야, 그치?" 예지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반대로, 내가 백주대낮에 길을 걷다가 어떤 아저씨한테 강간을 당했다고 쳐. 난 물론 그딴 아저씨랑은 말도 섞고 싶지 않았고, 이름도 모르고 좋아하는 마음도 전혀 없어. 그런데 섹스는 해버린 거야. 너 말대로라면, 내가 승호랑 한 건 바람이 아니고, 아저씨랑 한 건 바람이 되는 거지. 맞아?"


"그건 너무……" 남자가 대답했다. "너무 극단적인 예시야"


"극단적일 수밖에 없지. 예시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예지는 계속해서 이어갔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넌 어느 쪽이 바람 폈다고 할 수 있는 거야? 네 말대로라면 내가 승호랑 한 건 바람이 아니니까 날 계속 만날 수 있겠지? 또, 아저씨한테 강간당한 건 이유야 어찌 됐든 바람 핀 거니까 내 뺨을 때리고 화를 내면서 헤어지자고 하겠지? 대답해!"


"싫은데. 그딴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


"그럼 꺼져" 예지는 더 이상 울지 않고 말했다.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예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덜컥 일어나 카페에서 걸어 나갔다. 예지는 휴대폰에서 남자의 연락처와 사진들을 모두 지웠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떠올릴수록 견딜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을 뿐이다.


예지는 뒤늦게나마 남자를 떠나보낸 것이 다행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그 남자의 멀쩡한 외관에 속아 고통받게 될 다른 여자가 안타까웠다. 다만 예지의 이런 마음은 한 달도 가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한 쪽은 지나간 시간을 안타까워할 뿐이지,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진 않기 때문이다. 예지는 당장은 공허한 마음이 가득하겠지만, 얼마지 않아 더 멋지고 매력적이며 손으로 쓴 편지와 꽃 그리고 늘 읽고 싶었던 책을 선물해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지나간 남자의 얼굴은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고, 곁에 있는 사랑과 온기를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한편 남자는 민영에게 버림받은 뒤 한동안 클럽과 소개팅앱을 기웃거릴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돈과 젊음을 퍼붓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예지에게 전화를 걸게 될 것이다. 물론 남자의 번호는 차단돼있을 것이고, 견디다 못해 들어간 페이스북에선 새 연인과 함께 행복해하는 예지의 모습을 목격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후회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영원한 형벌이라는 사실을, 오직 떠나보낸 소년들만이 어른이 되고, 스스로 수의를 입고 죽음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집행유예>, 2019. 4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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