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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26. 2019

습작

스물여덟번째

유정이는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났다. 맑고 아름다운 눈,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뽀얀 피부와 생글생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기였다. 얼마나 예쁘고 평화로운 표정을 하고 잠들어 있는지, 일찍 나온 만큼 어디가 아프진 않을까 하는 어머니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버지 역시 아기를 받아 들자마자 '우리 유정이가 백만 불짜리 눈을 갖고 태어났구나'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아기는 십수 년 동안 집안과 주위 친척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학교에서는 말 한 번 먼저 꺼내지 않아도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고, 학기초부터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 있는 아이가 돼버렸다. 때문에 유정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순백색 피부, 별 관리도 없이 윤기가 자르르한 머릿결이며 또렷한 이목구비와 목에서 종아리까지 이어지는 섬세한 곡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유정의 학창 시절은 꽤 건방진 편이었다.          


누가 봐도 예쁜 여자들 중에서 '난 별로 예쁜 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대부분의 예쁜 여자들은 여러 인간관계나 사석에서 '스스로가 예쁜 걸 모르는 여자'처럼 구는데, 아름다움은 사랑과 경외의 대상임과 동시에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예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오만하다고 여기며,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동시에 느낀다.     

     

가장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만큼 미움받길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다. 결과적으로 유정 같은 여자아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꽁꽁 숨기며 사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독점하고자 하는 아이들은 이런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견딜 수 없는 구속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          


유정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미 유정은 주위 친구들의 경외심과 질투심으로부터, 남자들이 자신의 소유권을 놓고 시도 때도 없이 벌여대는 암투로부터, 마흔이 넘은 체육교사의 끈적한 시선으로부터, 스스로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이뤄지는 특수한 취급으로부터 이골이 나있었다. 유정의 부모님은 크게 걱정했지만, 하나뿐인 외동딸의 고집을 꺾을 방법도 달리 없었다.      

    

연습생 생활은 어린 소녀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가혹했다. 다행히 유정은 하루 온종일 음악과 춤에 빠져 사는 그 생활이 마음에 들었으며, 온갖 욕구를 참아 견디며 동료 연습생들을 하나둘 밟고 오르는 과정으로부터 큰 기쁨을 느꼈다. 은퇴한 그룹의 댄스 담당이었던 안무 선생님과 연예기획사 사장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은 유정은 곧 유망한 아이돌 연습생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계약 문제로 인해 두 번이나 기획사를 옮긴 뒤로는 더욱 그랬다.          


2년쯤 지났을 때였다. 유정은 업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형 기획사와 계약했다. 유정의 부모님은 일확천금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계약서에 몇 번이나 서명했다. 유정은 서울로 올라와 기숙사 생활을 하며 아이돌로서의 데뷔를 준비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안무 연습은 물론이거니와 전직 가수 출신과 함께하는 보컬 트레이닝, 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러닝과 하체 근력운동까지 마치고 나면, 기숙사에 돌아와 씻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잡생각은 감히 할 겨를도 없었다.          


계약 당시 기획사는 '2년 안에 데뷔를 약속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장을 비롯해 여러 기획사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바뀐 시장 흐름으로 인해 그룹 컨셉을 바꿔야 한다' '다른 그룹 데뷔 시점과 겹쳐서 일정 조율을 해야 한다' '포지션이 애매한 멤버를 교체할 필요가 있다' '당장 데뷔도 가능하지만 마케팅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같은 이유를 대는 통에 데뷔 시점은 계속해서 미뤄졌다.       

   

유정과 함께 데뷔하기로 했던 네 명의 멤버는 기숙사 생활 3년 차에 이르러 전부 교체됐다. 그만두는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오버 트레이닝으로 허리가 나가버려서 더 이상 안무를 할 수 없게 됐다든가, 계속 늦춰지는 데뷔 일정에 타 기획사로 이적하게 됐다든가, 사장으로부터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일방적인 계약해지를 당했다거나 별달리 납득할만한 이유도 없이 '그냥 멤버를 교체하게 됐다'는 식으로 통보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즈음 해서 유정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몸매도 좋은 멤버까지 죄다 떨어져 나갔는데 오직 자신만이 연습생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교포 출신 멤버와는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그만둔 친구는 피팅모델을 시작해 돈을 벌고 있었고, 또 다른 친구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데뷔해 적잖은 팬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기획사 사장은 여전히 '곧 데뷔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 뒤에 어떤 속셈이 숨겨져 있는지, 유정은 이제 추측하고 의심하는 일조차 지쳐버렸다.          

보컬 트레이너와 첫 성관계를 가졌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보컬 트레이너는 이제 삼십 대 초반에 접어든 젊은 가수로 연습생 시절에는 무척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첫 앨범 타이틀곡이 차트 진입조차 하지 못하자, 기획사가 '우리는 더 이상 가수로서의 활동을 보장할 수 없다. 코치 계약을 하든지, 다른 기획사를 알아봐야한다'고 통보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월 이삼백만 원의 월급을 받아가며 트레이너 생활을 한지 팔 년이 지났다. 다만 가수로서의 꿈은 아직 포기하지 못해서 몰래 독립앨범을 준비한다는 모양이었다. 유정은 이 이야기를 기획사 근처에 있는 한 싸구려 모텔에서, 관계가 끝난 뒤 벌거벗은 몸으로 담배를 피우던 보컬 트레이너로부터 들었다. 유정은 이름만 대면 다 알법한 초대형 기획사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두려웠고, 자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편 똑같이 되고 싶지 않은 스스로가 실망스러웠다. 두 사람은 두 달가량 몰래 더 만나다가 보컬 트레이너의 계약 만료로 인해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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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반년이 더 지나서, 유정이 슬슬 연습생 생활을 관두고 뒤늦게나마 대학입시를 준비하려고 마음먹고 있을 즈음이었다. 기획사 사장이 느닷없이 연습실에 찾아와서는, 그동안 본 적 없었던 표정으로 '세 달 뒤에 데뷔가 확정됐다'고 말했다. 그간 명확하지 않았던 그룹명도 확정됐고, 우려했던 초기 팬덤 구성도 순조롭다는 소식도 덧붙였다. 땀을 뻘뻘 흘리던 다섯 명의 멤버는 '정말, 정말이에요?' 하고 몇 번이나 다시 물어보면서, 한동안 기쁨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유정도 울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데뷔인데, 자신이 진심으로 기쁜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막상 들이닥치니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데뷔에 앞서 전에 없던 강행군이 이어졌다. 매일 하던 연습량을 두 배로 늘리는 것쯤은 별 문제도 아니었다. 기획사는 멤버 전반에 대한 비주얼 개편에 돌입했는데, 대부분의 수술은 강남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교외의 병원이나 중국의 모 도시에서 이뤄졌다. 되도록이면 성형 사실을 비밀리에 부치기 위해서였다. 수술이 끝난 뒤로도 마스크로 수술 사실을 최대한 숨겨야 했으며, 메이크업 담당에게는 학창 시절 졸업앨범과 교차 대조해 비정상적인 차이가 없게끔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섯 명의 멤버들 가운데 얼굴에 칼을 대지 않은 건 오직 유정뿐이었다. '승모근이 너무 도드라진다'는 기획사 사장의 언급으로 인해 한 차례 수술을 받긴 했지만, 부모님도 못 알아 볼만큼 많이 뜯어고친 다른 멤버에 비하면 천만다행인 수준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세 달이 지났다. 유정은 대형 기획사가 야심 차게 공개한 아이돌 그룹의 센터로 섰다. 데뷔 무대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다. 공식 팬덤은 기획사의 전략 아래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으며, 데뷔한 지 얼마지 않아서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멜론 차트에서 소위 말하는 '지붕킥'을 달성하기도 했다. 매출이 급격히 상승한 기획사는 '전무후무한 성공'이라 치켜세워줬다. 유정은 첫 정산금을 받자마자 유명 브랜드에서 빨간색 코트와 넥타이를 사서 부모님께 선물했다.          


그룹의 성공에는 '비주얼 담당'이었던 유정의 공이 지대했다. 데뷔 초부터 우월한 외모와 기럭지로 주목받았던 유정은 소속사로부터 노골적인 푸시를 받았다. 공중파를 비롯한 각종 예능에 단독으로 출연했으며, 무대에서도 가장 눈에 띄고 예쁜 안무는 유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유정으로선 참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멤버에 비해 연습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적었던 한편 가장 높은 주목과 기대 그리고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유정은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의사는 유정에게 '신경쇠약 증세가 보이는 것 같다'는 진단을 내린 뒤, 안정제를 비롯한 향정신성 약물을 처방해줬다. 유정은 처방받은 약을 며칠간 꾸준히 복용했다. 그러나 쉽게 살이 찐다는 부작용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두 번 다시 먹지 않았다.          


유정의 개인적인 상황과는 별개로 그룹의 두 번째 앨범은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 그 엄청난 성공의 핵심 멤버였던 유정은 명실상부한 대세 연예인으로 자리 잡았다. 유명 제조사들로부터 수시로 러브콜을 받았고, 단독으로 주류 CF와 커피 광고에 출연했으며, 곁다리로 연기교습을 받으면서 단편 드라마와 대형 배급사를 등에 업은 영화의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했다. 얼마나 일정이 빡빡한지 걸그룹들의 대목이라 할 수 있는 대학 축제 시즌에도 유정 혼자 참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유정 역시 이러한 상황에 고통을 호소했지만, 기획사측은 ‘순수익과 주식 가치가 유정의 활동범위에 좌우되기 때문에 조금만 참아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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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멤버들과의 불화가 시작된 곳은 다름 아닌 한 뉴스 기사의 댓글창이었다. 네이버 메인에도 등장한 이 기사는 '모 기획사의 경영불안으로 인해 유정이 혼자 소녀가장 역할을 떠맡고 있으며, 다른 멤버들은 유정이 벌어다 오는 수익을 고스란히 분배받고 있다' 정도로 요약되는 내용이었는데, 수천 개의 댓글 목록에서 그룹 자체의 팬과 유정 개인의 팬이 모종의 알력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제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한들, 외부에서 '이러저러한 불화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 정말이지 데면데면해질 수밖에 없었다. 웃긴 건 기획사에서 이 같은 '루머'를 불식시키기 위해 팬 미팅이며 단독 콘서트 같은 단체 활동의 비중을 대폭 늘렸다는 것이고, 뒤에서 어떤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든 간에 비즈니스 앞에서는 '우리는 아무렇지 않고, 어떤 문제도 없이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룹 내부의 파벌 싸움은 현실이 됐다. 유정에 대한 노골적인 왕따설이 제기됐으며, 팬덤 역시 사분오열돼 저들끼리 싸워댔다. 기획사는 '친하게 지내라고는 안 할 테니 싸우지만 마라'같은 별 도움 안 되는 중재만 하고 돌아갔다. 단체 기숙사 생활은 끝난 지 오래였다. 유정은 별 이유 없이 스케줄을 취소하는가 하면 하루 종일 신사동의 한 오피스텔에 처박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선글라스며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남자가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왕래하곤 했다. 라이벌 기획사에서 활동하던 남자 아이돌이었다.          


두 사람은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꼭 한 번은 만남을 가졌다. 스케줄을 너무 늦게 끝마쳤을 때는 얼굴을 가릴 새도 없이 들이닥쳐서, 격렬하게 관계를 한 뒤 새벽바람에 헤어지기도 했다. 그룹 내의 파벌싸움, 기획사로부터의 억압, 연예계 그리고 팬미팅 등에서 마주하는 추악한 인간군상들 속에서, 이 비밀스러운 만남만이 유정의 정신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유정은 난생처음 진심으로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디스패치에서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헤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찍어 공개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유정의 이름이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순위에 오르내렸다. 팬들은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그간 순진무구했던 유정의 이미지가 파괴된 것과는 별개로, '어째서 탑스타인 유정이 그런 후레잡놈같은 남자 아이돌을 만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탑스타라면 반드시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레벨의 연예인과 사귀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다음 날 아침, 두 기획사는 '두 사람이 좋은 마음을 갖고 서로 알아가는 중'이라는 입장을 각각 밝혔다. 전날 밤까지 수십 번의 공문서가 오간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유정은 자신이 몰래 가꿔왔던 사랑이 무참히 짓밟힌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또, 기사에는 '그놈 딱 봐도 커 보이던데, 이제 유정의 XX는 완전히 헐거워졌을 것이다' '청순 이미지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겠다' '왜 공인이 연애 같은 걸 해서 같은 그룹 멤버들에게 피해를 입히는지 모르겠다' '몸값 떡락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왜 이런 연놈들이 사귀는 걸 뉴스 기사에서 봐야 하냐' 같은 댓글이 달렸다. 결국 유정은 이틀 밤을 꼬박 새면서 모든 댓글을 확인하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실시간 검색어에서 유정의 이름은 사라졌다. 여태 유정에게 더러울 정도로 매달렸던 방송국 PD와 광고주들, 행사 관계자들로부터의 연락은 완전히 끊겼으며, 심지어 기획사 측에서 먼저 연락하더라도 냉랭한 반응만이 되돌아왔다. 얼마 뒤, 유정은 기획사로부터 무기한 휴가를 받았다. 사실상의 활동 중지 선언이었다. 유정에게 주어지던 기회들은 산산조각 난 채 다른 멤버들에게로 돌아갔다. 유정은 잠시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명백히 대세 반열에 있던 유정이 열애설이 보도된 뒤로 고꾸라진 반면, 같은 보도 대상이었던 남자 아이돌은 급격히 인지도가 상승해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있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서는 '자신과 소속 그룹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유정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라는 음모론을 제기했지만, 유정은 이미 헤어진 마당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답답했던 아이돌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로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정은 공식적으로 무기한 활동 중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경기도 모처의 조용한 지역에 작업실을 하나 마련하곤 솔로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속사 측에서도 ‘유정의 인지도 자체는 건재하고, 음악적 성공이 바탕된다면 이미지 반등에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적극적인 도움을 약속했다.          


그러나 유정이 1년간 준비한 솔로 앨범은 애매한 성적을 거둔 채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겨우 타이틀곡 하나가 한 달 동안 차트에 진입했을 뿐, 프로듀싱과 마케팅 등에 투입된 비용을 감안하면 사실상 실패와 다름없었다. 기획사 사장은 유정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에 부딪혔다. 처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라곤 없었고, 단지 비주얼 하나로 성공했던 유정에게 솔로 앨범은 너무 지나친 투자였다는 것이었다. 이사회의 의견은 문자 그대로 유정에게 전달됐다. 유정은 ‘자신에게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절망감과 우울함이 엄습했다. 정신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뒤늦게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큰 차도는 없어 보였다. 유정은 마침내 자신을 고꾸라트리고, 이제는 완전한 대세로 떠오른 남자 아이돌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송 출연이며 해외 공연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남자는 의외로 살가운 반응을 보였다. 다만 그 마저도 새벽녘에 찾아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돌아간 뒤로는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유정은 남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락에 처박힌 자신을 안아준 것에 믿을 수 없는 고마움마저 느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비참함이 납득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정은 집에 틀어박혀 칩거 생활을 이어갔다. 기획사가 재계약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정은 얼마지 않아 자유계약 상태가 됐다. 소식을 들은 소형 기획사 몇 곳이 유정에게 연락을 보내왔지만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이돌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더 이상 지긋지긋했다. 집에 처박혀 치킨이며 아이스크림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지금에 만족했다. 음악방송은 보지 않았다.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후배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났다. 생각해보면 불쌍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춤추고 있는 저 아이들 역시, 실컷 이용이나 당하다가 별 것도 아닌 일에 바닥에 처박힌 다음 무참히 버려지지 않을까……아니, 꼭 그렇게 돼야지. 암,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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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 년이 지났다. 유정은 예전에 그만뒀던 연기를 다시 시작했다. 어차피 더 이상 아이돌로 활동하기란 어려웠고, 운 좋게 복귀 한다한들 평생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유정은 과거에 ‘아이돌을 그만두고 배우로 전향한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배들의 행동이 엄청난 혜안이라도 됐던 것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충무로를 드나들었던 유정은 잠깐이나마 대단했던 과거의 인기에 힘입어 적당한 규모의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조금이라도 관객몰이에 도움이 되리라는 영화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판단이었다. 영화 개봉 직후 관객몰이 자체에는 성공했지만 유정의 연기력에 대한 혹평이 우후죽순 쏟아졌던 것이다. ‘유정은 영화계에 기웃거리지 좀 마라’ ‘춤추고 노래나 부르던 딴따라가 무슨 연기를 한다고 하냐’ ‘이런 애까지 연기를 한다고 설치니까 아이돌들이 배우 흉내를 내는 거다’ 같은 멘트들이 한 개의 별점과 함께 빗발쳤다. 결국 영화는 곤두박질치는 평점과 함께 한 달도 안 돼 막을 내렸다. 이제 유정이 배우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저질 성인영화에 등장해 옷을 벗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곧 인터넷 뉴스에서는 <유정, 저질 성인영화에서 파격적인 노출 시도> 같은 기사를 이틀쯤 펑펑 찍어내다가 돌연 그만둘 것이다. 유정은 얼마 안 가 배우 생활도 그만뒀다.           


유정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삼십 년째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으리으리한 전원주택을 사준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던 부모님이었다. 마당에 있던 개는 죽어서 개집만 홀로 남았다. 담벼락에는 못 보던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뒤엉켜 자라 있었다.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아버지는 사랑방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온 유정을 보자마자, 아이고 우리 유정이, 서울에서 온갖 고생은 다하고 언제 이리 왔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유정은 기필코 울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금방 눈시울이 새빨개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유정을 껴안고 한참을 더 울었다. 유정도 울었다. 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정은 여태껏 모아놨던 돈과 부모님의 집을 처분하고 받은 돈을 모아 캐나다로 떠났다. 어머니도 함께 떠났다. 해외는 난생처음이라 무섭다던 어머니였지만, 우리 귀여운 딸이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토론토 교외에 작은 주택 하나를 마련했다. 토론토에는 작게나마 한인 사회가 구축돼있었는데, 유정을 알아보는 이도 몇 명 있긴 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유정은 마음 편하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직업을 구하는 데는 과거의 유명세가 퍽 도움이 됐다. 이십 대 후반에 뒤늦은 회사생활을 시작한 유정은 얼마 안 가 한 무역회사의 상무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은 비공개로 치러졌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에서는 ‘前 대세 아이돌 유정, 캐나다 토론토서 한 외국계 재력가와 비밀리에 웨딩 마치’ 같은 기사가 하루 종일 업데이트됐다. 검색어 순위에서 오랜만에 유정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메인 기사에는 ‘유정이 옛날에는 진짜 엄청났는데…… 역시 돈이 최곤가보다’라는 댓글이 추천 수천 개를 받고 최상단에 올랐으며, ‘유명해진 뒤에 사업가랑 결혼하는 게 아이돌 유행인가 보네’, ‘왜 관심도 없는 년 결혼 소식을 뉴스 기사에서까지 봐야 하냐’는 댓글들이 뒤를 이었다.           


<백색왜성>, 2019. 4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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