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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30. 2019

습작

스물아홉번째

나는 우리나라의 모든 동네마다 대훈이형 같은 사람이 꼭 한 명 씩 있었을 거라 확신한다. 물론 내가 모든 동네에서 태어나 성장해본 경험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남자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형' 또는 '형아'라 부르게 되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심지어 나 같은 외동아들조차도.     


누구나 어렸을 땐 아버지만큼 커 보이는 존재가 없다고들 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하고만 살아온 나로선 영 와 닿지 않는 말이지만, 대훈이형이 내게 보여줬던 위대함의 편린들이 대충 비슷한 느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 뭐 그 시절 아이들에게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크고, 게임도 잘하고, 만화방에 있는 책을 대부분 알고 있고, 항상 나보다 큰 포켓몬 딱지를 갖고 있고, 포트리스와 크레이지 아케이드 레벨이 높은 형이라면 기실 아버지보다도 위대한 존재나 다름없다.     


나뿐 아니라 우리 동네에 사는 모든 또래 아이들의 우상이었던 대훈이형은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리고 나와 서너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는데, 내 기억이 희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들 가운데 누구도 대훈이형의 나이를 정확하게 몰랐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유독 골격이 좋고 힘이 셌으며 몸이 날쌨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패싸움을 하다가 1년 또는 2년을 꿇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어떤 아이는 대훈이형이 소년원에 다녀왔다더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대훈이형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이나 존경 같은 것들이 희석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김대훈이라는 존재를 더 신비롭고 불가사의하며 수수께끼 같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한결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나는 대훈이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대부분 나쁜 것이었지만 가끔은 좋은 것도 있었다. 나는 철권태그의 붕권과 십단 콤보 커맨드를, 텐가이의 숨겨진 사무라이 캐릭터를 뽑는 방법과 메탈슬러그의 숨겨진 스테이지로 가는 길을, 스타크래프트의 한국어 패치 방법과 GBA에뮬레이터를 다운로드하는 곳을 모두 대훈이형에게서 배웠으며, 미성년자 신분으로 할 수 없었던 게임에 '주민등록번호 생성기'라는 프로그램을 써서 성인 아이디를 하나 만들어줬던 것도 대훈이형이었다. 덕분에 나는 <카르마 온라인>이며 <서든어택>같이 피가 질질 나오는 FPS게임을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동네에 사는 모든 열 살짜리 남자아이들은 돈이 없었다. 그러나 바깥에서 하루 종일 놀다 보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었고, 저녁때가 다 됐다고 집에 돌아가거나 보습학원이며 태권도 도장을 간답시고 중도 이탈하는 녀석들은 의리 없는 놈 취급을 받았다. 다행히 다니던 학원도, 날 찾는 부모님도 없었던 나는 대훈이형과 가장 늦게까지 함께 있곤 했다. 그럼 대훈이형은 날 데리고 동네 가장 가까운 PC방에 데려가 두 시간 넘게 게임을 같이 하다가, 열 시가 넘어갈 즈음에 '돈은 내가 낼 테니까, 넌 집에 가라' 하며 날 보내는 것이다. 대훈이형이라고 한들 누군가의 돈을 대신 내줄 만큼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대훈이형의 부모님은 본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늙은 할머니가 같이 살더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을운동회 당시 6학년 계주 선수로 뛸 때에도, 대훈이형은 2등으로 경주를 마치자마자 근처 친구들에게로 갈 뿐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싸온 김밥을 우걱우걱 집어먹고 있었는데, 흙먼지가 가득 묻은 얼굴로 운동장 주변을 배회하는 대훈이형의 모습이 무척 외로워 보였던 기억이 난다. 나 따위야 위로는커녕 방해만 될 것 같아서, 감히 말 한마디 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의 고독이었다.     


아무튼 나를 포함한 동네 아이들은 대훈이형의 부모님에 대해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뭐라 정해진 건 아니었으나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항상 그랬다. 가끔 어디서 어떻게 사는 양반인지 참 희한하다 싶을 때도 있긴 했지만, 부모님의 유무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훈이형은 대훈이형이고, 우리에게 신이자 영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므로. 나는 정말 대훈이형을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라도 할 수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훈이형은 자신이 도둑질해온 것을 우리에게 나눠줬을지언정 우리에게 뭘 훔치라고 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어른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의리라는 것이 중학생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있었다고 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꽤 떨어진 곳에는 작은 규모의 청소년수련관이 있었다. 나와 대훈이형을 포함한 대여섯 명 정도의 무리는 어느 날 수련관 뒤꼍에 있는 공터에서 라이터를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겨울이 다가와 바짝 말라있는 잔디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엄청나게 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터 뒤에는 건넛마을까지 이어지는 언덕이 있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엄청난 화재가 될 뻔했다. 다행히 '불이야!' 하는 소리에 곧 동네 어른들이 뛰어나와 큰 불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날 교장실에 함께 불려 가 상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는 날 비롯한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모두 와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대훈이형 만큼은 혼자 의자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 아이들 무리 가운데 혼자 6학년이었던 대훈이형은 자연스럽게 그 방화사건의 주범처럼 취급됐다. 두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재밌겠답시고 실실 웃으며 잔디에 불을 붙였던 내 친구 녀석은 아버지 뒤에 숨어서 질질 짜기만 할 뿐이었다.     


대훈이형은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전학처분을 받아들였고, 동네에서 버스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학교로 떠나버렸다. 그 시절 버스로 십 분이라고 하면 지구 반대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대훈이형은 동네 슈퍼 근처에서 아주 가끔 모습이 보일 뿐 예전처럼 함께 노는 일은 없었다. 대훈이형이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소식조차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중학생이 될 즈음해서 '저 멀리 공단 근처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더라'하는 소문이 돌아다니긴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난 중학교에서의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집 근처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난히 진학할 정도는 됐던 모양이다. 그렇게 막 고등학생이 돼서, 헐렁한 남색 교복을 걸친 채 돌아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나는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학교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한 오락실에서 철권을 하고 있었다. 철권태그는 당시로서도 엄청난 고전게임이라서 나 아니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임기였다. 가끔 건너자리에서 근처 학교의 조무래기가 도전하는 일은 있었지만 심심하면 철권으로 시간을 때웠던 내 상대는 못됐다. 그런데 그 날은 누가 나와 완전히 똑같은 조합으로 태그를 구성하더니, 날 완전히 농락시키며 완승을 거둬간 것이다.     


나는 오백 원이나 더 써가며 몇 번씩 재도전했지만 번번이 패배했다. 상대는 나와 같은 기술을 나보다 더 능숙하고 완벽한 타이밍에 구사했고, 심지어 내가 모르는 기술까지 몇 개 써가며 날 쓰러트렸다. 도저히 쓰러트릴 수 없는 벽 같았다. 철권을 하면서 그런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오락실 의자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리플레이를 지켜보는데, 건너편에서 대뜸 대훈이형이 돌아 나오는 것이다. 얼굴과 옷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었고, 까무잡잡한 인상만큼은 예전과 똑같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대훈이형은 날 보자마자 대뜸 웃으면서 "하나도 안 늘었네…… 드가서 공부나 해라"며 한 마디 던졌다. 그리고 예전처럼 내 뒤통수를 한 대 치곤 오락실에서 돌아나갔다. 그날 밤 나는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게 아팠던 대훈이형의 손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것을, 엄청나게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던 몸집이 사뭇 왜소하게까지 보였던 것을 떠올리며 복잡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다시 대훈이형을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무난하게 끝마치고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진학했다. 그렇게 상경한 뒤로는 세 번째 학기를 끝마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두 번째 여름학기가 끝난 직후에는 퍽 괜찮은 학점에 장학금도 받았겠다 해서 일주일 정도 내려가 고향의 부모님과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운 얼굴들을 보는 건 내 생각보다 훨씬 큰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내가 코나 질질 흘리고 다니던 동네에 어느새 대학생이 돼 돌아와서는, 같이 학교 담이나 넘어 다니던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옛날 생각이 물씬 났다. 그러다 '예전에 갔던 PC방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같이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새벽이 다 된 시간에 함께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나섰다. 십오 분쯤 걸어가자, 예전 그 익숙한 장소에 간판과 이름만 바뀐 PC방이 그대로 있었다. 나와 친구는 '컴퓨터 사양도 예전 그대로면 곤란한데' 따위의 농담을 하며 기어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PC방 풍경은 많이 변해 있었다. 시간당 오백 원이었던 요금은 세 배나 뛰어있었고, 백 원짜리 말린 쥐포와 새우탕밖에 없었던 간식 코너는 없어지고 봉지라면과 인스턴트 볶음밥 같은 음식을 직접 조리해주는 가판대가 새로 생겼다. 불현듯 따뜻한 국물이 생각난 나는 주문 콘솔로 계란 추가한 봉지라면 하나를 주문했다. 원체 거나하게 마셨으니 그렇게라도 해장을 해야겠다 싶었다.     


그동안 자존심을 건 파이썬 한 판이 이어졌다. 내가 폭풍 같은 4드론으로 친구를 절벽 끝까지 몰아넣고 있을 무렵이었다. 삼십 대쯤 돼 보이는 알바가 직사각 모양의 나무 접시에 끓인 라면과 단무지 몇 개를 담아 내 키보드 앞에 고이 놓았다. 덕분에 마우스가 꼬인 나는 "아…… 아!" 하고 작게 짜증을 냈다. 그러자 알바는 순간 흠칫, 하는 소리를 내더니 "죄송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하고 내 곁을 떠나 카운터로 돌아갔다.     


난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쉽게 가져갈 수 있었던 게임을 놓쳤다. 아무렴 게임이야 질 수 있는 거지만, 게임 도중 알바에게 벌컥 짜증 냈던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멋쩍게나마 사과할 요량으로, 덤터기 쓴 PC방 요금도 계산할 겸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옆에 있는 나무 책상에 홀로 걸터앉아 기다렸다.     


삼 분쯤 지나자, 더벅머리에 부쩍 살이 붙은 대훈이형이 카운터로 돌아왔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 돈이야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카드가 습관이 된 탓에 현금이 하나도 없었을 뿐이다. 대훈이형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우리는 서로 모른 척했다. 언젠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난 지하에 있는 PC방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친구들은 건물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날 보던 한 친구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밀었고, 동시에 그 옆의 친구가 라이터를 건넸다. 왼손으로 바람을 막으면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으려니, 방금 담배를 건넨 친구가 대뜸 "얼마 나왔어?" 하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뭐? 왜 모르는데? 한 오 만원 나왔냐?"     


"아니" 내가 대답했다. "그냥 가라고 하던데"     


"하긴, 그렇겠지" 친구가 대답했다.     


담배는 금방 필터 가까이 타버렸다. 난 한 모금 깊게 빨아 마신 다음, 그대로 쪼그려 앉아 바닥에 비벼 껐다. 새벽녘 꺼진 밤하늘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다 말았다. 우리는 곧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오래전에 건넛마을로 이사 갔다는 친구는 택시를 타고 갔고, 멀지 않았던 난 걸어서 가기로 했다. 하늘은 아직 어두컴컴해서 해가 뜨려면 아직 두세 시간은 남은 모양이었다.     


<나의 프로메테우스>, 2019. 4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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