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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y 03. 2019

습작

서른번째

"무조건 다른 년 생긴 거지, 그거는" 여자가 말했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어. 수정아, 지금도 걔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수정이 대답했다.     


"이 멍청한 년, 바보 같은 년……" 여자는 수정을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두 젊은 여자가 마주 앉아있는 가게는 주말을 앞두고 북적거렸다. 내부에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주희야, 다 좋은데. 욕 좀 그만해. 나 이제 괜찮아"   

  

"이년아, 뭐가 괜찮아? 내가 말했지! 씨씨의 결과는 항상 파국이라고. 애초에 민재 걔는, 느낌부터가 쎄했다니까.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말이야……"     


주희는 잔뜩 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수정은 불쑥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서,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결과가 다 나온 뒤에 '내가 이럴 줄 알았어'라고 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이냐고. '정말'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드러누워서 말리지 그랬느냐고…… 그러나 세상에는 막을 수 없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막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들의 연애'도 그중 하나다. 주희로서도 별 수 없었을 거라는 것 역시 수정은 알고 있었다.     


"야……내 말 듣고 있어?" 정신없이 이야기하던 주희가 수정의 안색을 살폈다. "어디 아파? 하기야 당연히 아프겠지. 딴 것도 아니고 바람피워서 헤어진 건데"     


"말을 뭐 그렇게 해? 민재가 바람을 폈는지 안 폈는지, 네가 어떻게 안다고?" 수정이 더럭 대꾸했다.     


"또 말해야 돼? 한 달 전부터 연락도 잘 안 됐다며? 딴 애 같으면 군대가는갑다. 생각할 수라도 있지. 걔는 캐나다 영주권도 있는 놈이잖아. 군대는 무슨……"     


"헤어지자고 한 건 나야. 내 잘못이지, 그런 말을 함부로 한 내 잘못이야"     


"여자한테 그런 말이 나오도록 하는 것 자체가 말이야, 민재가 쓰레기라는 증거야! 이런 씨발, 지가 대놓고 꺼지라는 식으로 행동했는데, 니가 그렇게 말 안 하고 배겨? 기다렸다는 듯이 연락 차단하고…… 이런데도 바람이 아니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순수하게 살래? 그건 순수한 것도 아니야. 존나 미련해터진 거라고. 차라리 나처럼……"     


"너처럼, 뭐? 남자나 놀리면서 살라고?" 수정이 툭 던지듯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화장실이나 다녀올게"     


"뭐, 남자를 놀려? 참 잘 났구만, 잘 나셨어……" 주희가 돌아 걷는 수정의 뒷모습에다 대고 말했다. 수정은 빈정거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홍대에는 술집이 많다. 그러나 그중에 제대로 된 화장실을 갖춘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가게 안에 마련해놓은 곳은 거의 없고, 임대된 건물에 딸려있는 공용화장실이나 쓸 수 있을 뿐이다.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 앞에는 십중팔구 남자들이 담배를 뻑뻑 피면서, 비틀거리며 걸어 지나는 여자들의 곡선을 눈으로 훑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느끼하게 머리를 올리고, 검은색 재킷에 가죽 워커를 신은 남자가 수정의 허벅다리며 종아리를 쓱 내려다봤다.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대놓고 '어딜 보고 지랄이야'하며 쏘아붙일만한 성격은 못 됐다. 수정은 늘 화장실에 따라오던 민재의 팔짱을, 습관처럼 찾다가 팔을 한 번 더 허우적댔다.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만취한 여자였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보니 주희가 벌써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수정은 금방 혼자 남게 되리란 기분이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뭐야, 어디 가려고?" 하고 물었던 것이다. 답변은 실로 명쾌했다.   

  

"어디가긴? 내일이 주말이고, 지금은 오후 열한 시야. 넌 헤어졌고, 나는 씨발, 존나 인생을 즐기는 여자지. 말해봐. 넌 내가 어디갈 거 같은데? 우리가 어디로 갈까?"     


주희는 주섬주섬 가방에 물건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취한 사람 같지 않게 뚜렷한 본새였다. 수정은 두리번거리며 영수증을 찾았다. 그러자 주희는 이미 자신이 계산했으니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밤공기가 싸늘했다. 하얀 피부는 달빛을 반사해 창백한 색을 띠었다.     


홍대에서도 비교적 변두리에 있는 클럽이었다. 작년만 해도 주희가 제 집 드나들듯하던 곳이었는데, 집을 서초동으로 옮긴 뒤부턴 빈도가 훨씬 줄었다. 듣는 소리로는 강남의 퇴폐적 분위기에 꽂힌 모양이었다. 물론 수정은 클럽에 취미가 없기도 했거니와, 이해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주희같이 좋은 친구에게도 나쁜 취미 한 두 개는 있을 법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주말을 앞둔 클럽만큼 붐비는 곳도 없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부터 남자들이 수십 명씩 줄지어 서있었다. 그 주변으로 남성용 향수 냄새가 이리저리 뒤엉켜 나오는데, 수정에게는 담배 냄새와 별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절차도 없이 금방 통과해 클럽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진짜, 구닥다리 같은 음악만 틀어대네. 신나지도 않고" 주희가 말했다. "수정아, 너 취했어?"     


"……뭐라고?" 수정이 주희의 입모양을 보고 되물었다. 노상 쿵쿵거리는 베이스음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너 취했냐고!"     


"……아, 음, 잘 모르겠는데…… 우리 테이블 몇 개 돌았지?"     


"다섯 개는 돌았을 걸" 주희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이면서 대답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 여자가, 클럽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독순술사가 됐다.     


"아까 말리부를 너무 많이 마셨어…… 말리부 맞아?" 수정이 머리를 앞뒤로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수십 개의 조명이 점멸했고, 주위로 몇몇 남자들의 시선이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그러게, 뭐라도 타서 마시랬잖아. 옆에서 계속 따르더만, 머저리 같이 생긴 새끼가"     


"달아서, 계속 마셨어. 달아서……" 수정은 계속해서 뇌까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지금이 새벽 한 시쯤 됐으니까, 볼 일은 다 봤어. 슬슬 나갈까?"     


"나갈 거야? 더 안 마시고?" 수정이 짐짓 아쉬운 눈치로 물었다.     


"응. 우리가 나가고 있으면 알아서 따라올 거야"     


"누가 따라오는데?"     


"술값 낼 사람들" 주희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방값도 낼 거야"     


과연 그랬다. 수정과 주희가 대화를 끝내고 나가려는 태세를 잡자마자 남자들 몇 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러면 저들끼리 눈치싸움인지 뭔지를 하다가, 클럽 입구로부터 오 미터쯤 떨어질 즈음이 되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것이다. 주희는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두 남자를 따라갔다. 수정은 그 뒤를 쫓아 걸었다. 그러자 키 큰 남자 한 명이 일부러 걸음걸이를 늦추기 시작해서, 이내 수정과 나란히 보폭을 맞춰 걸었다.     


"많이 취했어요?" 능숙한 말솜씨였다. 수정은 순간 헛구역질을 했다. 남자는 털털하게 웃어넘겼다. 한두 번도 아닌 일이라는 듯이.     


네 명의 일행은 클럽 근처에 있는 작은 포차에서 소주 몇 잔을 번갈아 마셨다. 그러다 주희가 생전 안 가던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떴다. 일 분쯤 지나 마주 앉았던 남자가 뒤따라 나갔다. 두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수정은 난생처음 만나는 남자와 단 둘이 남겨졌고,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면서 시덥잖은 얘기들을 했다. 수정은 자신이 불과 이십사 시간 전에 헤어졌으며, 민재와 사귀었던 지난 삼 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이렇게 노는 타입도 아니며, 아까 그 주희라는 친구에게 휩쓸려서 얼떨결에 여기까지 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남자는 별 말도 없이 수정과 몇 번이나 아이컨택을 했다. 한 번은 오 분 넘게 눈을 맞추기도 했다. 간간히 취한 기색을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렴 온기가 필요한 여자의 다리를 벌려 젖히는데 '사랑'이나 '인간적 호감'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수정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여자에게 기술 따위 필요 없다는 것을, 그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런 건 다 별 것도 아닌 일이다' 같은 적당한 일탈감만 쥐어주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수정이 보기에 남자는 무척 잘생긴 편이었다. 객관적으로도 그랬다. 키는 백팔십 초중반으로 훤칠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한편 조금 인공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다만 수정은 그런 종류의 위화감마저 스릴로 느껴질 만큼 취해 있었다. 두 사람은 안주로 시킨 오뎅탕을 반절도 넘게 남겨놓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수정이 기억나는 건 온통 빛뿐이었다. 클럽 내부를 휘젓고 다니던 형형색색 불빛들, 오래된 포차의 침침한 전등과 객실 카드를 꽂아 넣자마자 환하게 켜진 모텔방의 형광등, 잠들기 직전에 본 머리맡의 LED스탠드 빛과, 아침 일찍 일어난 남자가 암막커튼을 열어젖히면서 스며들어온 햇빛까지…… 정신을 차려보니 정오의 모텔 객실에, 홀로 벌겨벗겨진채 누워있는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휴대폰을 집어 드니 전원이 꺼져있었다. 남자는 옷도 물건도 모두 챙겨 밖으로 나간 지 오래 같았다. 협탁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수정은 오른손을 내밀어 쓰레기통을 꺼내 들었다. 통 안에는 희끄무레한 액체로 추적하게 젖은 콘돔 두 개가 이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버려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수정은 두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욕실에서 몇 번이나 비벼 씻었지만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전날 잤던 남자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헤어진 민재의 얼굴이 떠올라 빙그레 웃고 있었다. 수정은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몸 안을 휘젓고 간 것이 사실은 민재였으며, 그래서 당장 전화해 화를 내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올 것만 같았다. 수정의 의식은 금방이라도 떠나 증발해버릴 듯하다가, 덜 마른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풍겨 나오는 모텔 샴푸 냄새에 문득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수정은 모텔이 늘어선 길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따스한 햇살이 건물 틈바구니 너머로 내리쬈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연노랑색 옷을 입은 야쿠르트 아줌마가 이상한 기계를 타고 지나갔고, 열 살 남짓 돼 보이는 아이들 대여섯 명이 편의점이 있는 골목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수정은 그 편의점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사 마시는 동안 휴대폰 충전을 맡겼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계산을 마치자마자 휴대폰을 붙잡고 모바일 게임을 했다. 내부 테이블에는 라면 국물처럼 보이는 빨간색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수정은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멍하니 밖을 쳐다봤다. 되찾을 즈음 휴대폰은 배터리 잔량이 십이 프로였다. 카톡 알림이 몇 개 있었다. 주희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대신 민재로부터의 마지막 메시지가 수신돼있었다.     


'안녕, 수정아. 나 오늘 출국해. 너한테 어머니를 꼭 소개시켜드리고 싶었는데. 췌장암은 예후가 별로 좋지 않대. 그래서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어. 그동안 무섭기도 했고 너무 정신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어. 넌 좋은 사람이니까 나처럼 비겁한 인간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어. 민재가'     


편의점에서 빠져나온 수정은 횡단보도를 건너 택시를 기다렸다. 길 건너에 자신이 묵었던 모텔 건물이며 불 꺼진 포차와 펍들이 늘어선 모습이 마주 보였다. 이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관계와 시간이 거기 있었다. 이별이었다.     


<빛이 나는 솔로>, 2019. 5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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