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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y 04. 2019

습작

서른한번째

비결은 간단하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어서, 알고 나면 '고작 이런 거였어?'란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세상의 '위대하고 대단해 보이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이만큼 혹은 이보다 더 단순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어차피 사람이란 단순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못하는 동물이다.


한 번은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컨설팅한 적이 있었다. 이 회사는 경기도 근교에 제조공장을 갖고 있어서, 전기밥솥과 전기포트, 토스터기 같은 것들을 만들어 매월 정해진 양을 대기업에 납품했다. 뭇 제조업들이 그렇듯 매출은 꽤 컸지만 마진은 작은 무척 평범한 사업체였다. 실제 회사 이름을 밝히자면 여러 가지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대충 '동진기업' 정도의 평범한 사명으로 대체하도록 하겠다.


동진기업 경영진의 걱정거리는 명료했다. 대기업 납품으로 꾸준한 매출이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언제 납품단가나 생산량을 바꿔 통보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영업 관계자가 비교적 젊은 인물로 바뀐 뒤부턴 접대에 드는 비용이나 정신적 리소스도 상당한 부담이 됐다. 얼마나 큰 비원을 갖고 대기업에 들어간 건지, 찾아올 때마다 고가의 술이며 젊은 접대부를 요구하는 행태가 여느 중견 영업부장과 다를 바 없없다는 모양이다.


"완전히 미친놈이라니까요. 끽해야 삼십 대 접어든 양반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나중에 보니까 결혼도 아주 일찍 해서 딸이 다섯 살이라더군요. 왜 그런 얘길 룸살롱씩에서나 하는지, 참내"


아무튼 목적은 매출이 안정적으로 나오는 동안 자체 브랜드를 꾸려 하청업체 신세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유통은 인터넷으로 하면 되고, 어차피 제품은 자체 생산을 하고 있으니 대기업에 들어가는 수수료며 납품 리베이트 같은 것들을 빼면 더 저렴한 가격에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놨다.

"안 되죠, 안 돼. 품질이 좋은데 가격이 싸기까지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사장은 대꾸했다. "모든 소비자들은 싸고 좋은 물건을 원해요"


"터무니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다른 사장님들처럼요" 내가 대답했다. "그런 건 백 년 전에나 통하던 얘기고,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소비자들은 비싼 물건을 원해요. 그걸 갖고 있음으로써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 것 같은, 아주 일시적인 착각을 필요로 합니다. 거기서 품질 따위는 나쁘지 않은 정도로만 유지하면 되죠. 그 이상으로 품질에 투자하는 건 넌센스입니다"


나는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장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반평생을 '싸고 품질 좋은' 가전제품을 만드는데 투자했던 양반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의외였던 건 일주일 정도 생각해보겠다더니 사흘 만에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하겠소'하고 연락해온 것이었다. 삼십 년 동안 추구했던 가치를 고작 삼십 분의 대화로, 삼일만에 뒤엎어버린 것이다. 이런 게 유수의 대기업 회장들이 발휘하곤 한다는 과감성이라 할지, 아니면 소신의 결여에 불과한 것인지는 나로서도 참 어려운 문제다.


동진기업에서 만들어 자체적으로 판매하는 모든 제품에는 'DONGJIN' 이라는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몹시 멋대가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위치며 영문 폰트에 이르기까지 시대착오적인 수준이었다. 하기야 이사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 사장이었는데, 그 사장만 해도 다음 달에 환갑잔치를 앞두고 있는 판이었다. 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내게 허용된 예산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다고 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독일로 가는 비즈니스 항공편을 끊는 것이었다. 당연히 여행으로 간 것은 아니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브로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러분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회사'가 있는지 알고 있는가? 알게 된다면 어느 정도를 상상했건 간에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사는 곧 '법인'이다. 법인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간이며, 눈으로 보고 만질 순 없지만 하나같이 그럴듯한 이름을 갖고 있다. 'Apple Inc.'나 '삼성전자 주식회사' 처럼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법인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인을 10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활동을 하는 법인은 1이나 2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나머지 법인들은 뭘 하고 있느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명목상으로 존재하기만 할 뿐, 이미 오래전에 직원이며 이사진이며 모두 소속을 벗어나거나 사망해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회사가 셀 수도 없이 많다. 인간은 신체활동이 정지한 것을 '죽었다'고 하지만, 법인은 활동이 정지한다고 해도 사라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개 중에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존재하기만 하는' 것들도 있으리라 본다.


아무튼 나는 독일에 가서 이런 '존재할 뿐인 이름'들을 많이 알고 있는 브로커를 만났다. 브로커가 수천 개에 달하는 후보 가운데 두세 개를 추려 주면, 내가 할 일이라곤 그중에서 어감이 괜찮은 것을 골라잡는 것뿐이다. 나머지 행정적인 절차라거나 관공서와의 협상 같은 문제는 알아서 처리된다. 이런 것들은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독일어라곤 '구텐탁'과 '슈바인학센'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고른 법인명은 'DUNKELHEIT'였다. 우리나라 발음으로 하면 '둥켈하이트' 정도가 되는데 뜻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렴 어감만 고급스러우면 뜻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요소니까. 둥켈하이트는 1899년 당시 독일(그때는 독일 '제국'이었다) 함부르크에서 만들어진 법인으로, 주요 업종은 '가정, 주방용품 생산 및 판매'였으며 서류상의 마지막 활동은 1912년 2월에 있었으며 창업자와 창업자의 가족, 재무적 이해관계자들은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으며,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전형적인 식물 법인이었다.


나는 귀국한 직후 잘 아는 법무사에게 둥켈하이트의 해외법인(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의 법인) 개설을 의뢰했다. 그다음엔 예산의 반절 가량을 들고 국내 유수의 디자인 전문그룹을 찾았다. 이 그룹은 프리미엄 브랜드 디자인에 제법 일가견이 있는 곳인데, 최고 장점을 하나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속도일 것이다. 나는 일주일도 안 돼서 'DUNKELHEIT, Since 1899' 라고 써붙여진, 적당히 예스럽고 멋진 로고와 그 로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회사 소개 사이트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경기도 근교에 위치한 작은 제조사였던 동진기업은 불과 보름 만에 백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독일의 가정용품 브랜드 '둥켈하이트'의 국내 지사로 탈바꿈했다. 그때부터 동진기업이 만들어내는 제품들에는 'DONGJIN' 대신 'DUNKELHEIT, Since 1899' 라는 로고가 새겨졌다. 나는 나머지 예산을 온라인 리뷰 대행사에게 퍼부어, 둥켈하이트 제품에 대한 블로그 후기를 수십 건이나 찍어냈다. 이제는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하더라도 '알 사람은 다 아는 독일의 명품 브랜드'로 소개된 게시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장은 '가격을 다섯 배 이상 올리라'는 내 주문에 넋이 나간 듯했다. 어떻게 그 정도 단가밖에 안 되는 물건을 그만한 돈에 올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건 아무도 사지 않을 겁니다" 사장이 말했다. "머지않아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일 거요"


"그래요. 한 번 두고 봅시다" 내가 대답했다.


결과는 오래 두고 볼 것도 없었다. 동진기업의 매출은 불과 세 달만에 네 배나 뛰었다. 또 중소 백화점들의 입점문의가 빗발치는가 하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2만 원에 살 수 있었던 토스터기를 17만 원씩이나 주고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그마저도 작은 공장의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해 품귀 현상을 빚었으며, 이내 프리미엄이 붙어 실질 거래 가격이 30만 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겨우겨우 구매에 성공한 소비자들은 '역시 둥켈하이트 제품' 이라며 블로그와 SNS 등지에 호평을 쏟아냈다.


이처럼 혁신적인 컨설팅 방식에 대해 다소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간혹 있다. 결국 소비자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나 동진기업이나 거짓말은 거의 하지도 않았다. '둥켈하이트'가 독일 기업인 것도, 1899년에 세워졌다는 것도, 가정용품 회사라는 것도 모두 사실 아닌가. 기껏 덧붙인 게 있다면 '알 사람은 다 아는' '프리미엄' '명품' 따위의 말인데, 이런 건 다른 회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하물며 이게 거짓말이라고 한들, 손해 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거짓말이라면 지양될 것이 아니라 되려 지향할 부분이다. 이 컨설팅을 통해 나는 돈을 벌었고, 힘없는 하청업체에 불과했던 동진기업은 프리미엄 브랜드로 발돋움했으며, 매출이 늘어난 만큼 국세청에 꼬박꼬박 세금도 들어간다. 심지어 로열티 명목으로 독일 정부에까지 얼마간의 돈이 지불되므로, 독일 입장에서도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하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침체된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킴으로써 나라 살림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뭣보다 긍정적인 건 소비자들의 만족도다. 겨우 로고 하나, 법인명 하나 바꿨을 뿐인데 사람들은 같은 물건에도 훨씬 더 큰 만족감을 얻어갔으며, 이로써 대한민국은 좀 더 행복한 나라가 된 셈이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파는 게 본질인 조직이다. 이게 잘못이라면 잘못이 아닌 일은 대체 어떤 것들인가? 내가 구제할 수 없이 악하고 벌 받아 마땅한 인간이라고 말할 근거는 있는가? 'DONGJIN' 보다 'DUNKELHEIT, Since 1899'를 수천, 수만 배 더 사랑하는 여러분이, 감히 이런 날 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훔바훔바>, 2019. 5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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