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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y 09. 2019

습작

서른두번째

"오늘 어땠어?" 네가 말했다. "생애 처음으로 온 롯데월드인데"


"글쎄……" 나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호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없으니 실내는 조금 후덥지근했다. 폐장을 앞두고 하나둘 셔터를 내리는 매장 직원들이 분주해 보였고, 불 꺼진 츄러스 가게며 노점상들이 통로 양쪽으로 뻗어있었다. 우리가 걸어 나오는 뒤쪽으로 거리의 공연과 음악소리가 흩어져 사라졌다.


"이대로 가는 게 아쉽지는 않아?"


"딱히" 나는 다시 한번 짧게 대답했다. 점심이 막 지난 이른 오후부터, 야외 실내를 가리지 않고 놀이동산 곳곳을 들쑤시고 다닌 참이었다. 더구나 잠실은 내 자취방으로부터 한참 먼 곳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만원 지하철을 떠올리자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대답에 성의가 없어? 벌써 지친 거야?"


"아니, 넌 지치지도 않아? 여길 몇 시간을 돌아다녔는데?"


"음, 별로 지치진 않는데? 신발도 편한 걸로 신고 왔고…… 너 때문에 중간에 밥 먹으면서 잠깐 쉬었잖아. 친구들이랑 오면 나는 쉬지도 않는단 말이야. 쉴 시간이 어딨어? 아틀란티스 한 번 타면 두 시간이 지나있는데"


"여자들은 놀이동산과 백화점 같은 곳에만 가면 체력이 엄청나지나 보네…… 여기서 플랭크 한 번 해볼래? 오 분은 거뜬히 넘을 것 같은데"


"아, 뭐야! 진짜……" 네가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난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퍽 행복한 하루라고 할 수 있었다. 자이로드롭은 여전히 무서웠고, 아틀란티스는 타고나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가장 큰 고비는 자이로스윙을 탈 때였다. 난 잊고 있었다. 그 경악할 놀이기구를 탈 땐 반드시 눈을 감아야 한다는 걸…… 하늘에 붙은 호수와 땅을 찌르는 성을 보고 있으려니 아찔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발아래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미 탄 놀이기구에서는 내릴 방법이 없다.


곁에 앉아 즐겁게 소리를 지르는 소현이를 보고 있으려니 세상 딴 사람 같았다. 나는 내리자마자 구역감과 싸우느라 바빴다. 소현이는 아무렇지 않게 또 다른 지옥을 탐색 중이었다. 난 불현듯 슬픈 기분에 젖어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누군가 소화제 한 알을 물과 함께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현이는 나보다 이십 미터는 앞서 가선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출입구로 향하는 길이었다. 폐장 직전의 놀이공원은 부산스럽고, 부산스러운 만큼 쓸쓸했다. 우리를 포함한 수백 명의 커플들은 그 분위기를 일 초라도 더 느끼려는 듯이 아주 느린 속도로 걷고 있었다. 그렇게 타원 모양의 코너를 돌아 계속 걸으면, 좌측 멀리 눈부시게 밝은 불빛이 눈을 찌를 것이다. 회전목마의 불빛이었다.


어두컴컴해진 가운데 회전목마만큼 밝게 빛나는 어트랙션도 없었다. 커플들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회전목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수십수백 개의 전구가 활활 타오르며 초여름밤의 낭만을 수놓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윽고 모든 어트랙션의 전원이 꺼지고 놀이공원이 문을 닫더라도 그 회전목마만큼은 계속해서 빛날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새벽을 지나, 창백하게 아침이 밝을 때까지 영영 타오르고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때 우리는 회전목마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불행히도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정확히 같은 장소에 서서 소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수족냉증이 있던 너와 달리 소현이의 손은 따뜻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따뜻한지 맞잡은 손에 물이 그렁그렁할 정도였다.


어떤 기억은 너무 행복했던 나머지 비밀에 부쳐야 한다. 난 우리의 추억을 마음속 가장 단단한 금고에 숨겨놓았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몰래 꺼내 보고는 같은 자리에 묻어놓았다.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은 금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가 아니라, 금고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혁아, 오늘 너무 재밌었어" 소현이가 말했다. "우리 또 오자"


"그래. 꼭 오자" 내가 대답했다.


나는 작별인사를 끝내고, 소현이를 꼭 안아준 다음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전철은 금방 도착했다. 내 몸은 만원 지하철에 부대낀 채 차창이 있는 문쪽으로 처박혔다. 창밖에선 잠실역의 불빛이 점점 멀어져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잦아들었다. 불빛에 있을 땐 어둠밖에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 있을 땐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과 열차는 불빛으로부터 떠나 다음 불빛으로 향했다. 점점 속도를 높여 다음 불빛으로, 그다음 불빛으로 치달았다. 평생을 타오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적 없었던 사람처럼.


<부나방>, 2019. 5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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