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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y 11. 2019

습작

서른세번째

"아! 씨발!" 젊은 여자의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가 열차 내부를 울렸다. "다음 역에서 내리라고요!"


지하철은 퇴근시간을 맞아 몹시 붐볐다. 강남과 역삼, 선릉으로부터 집으로 향하는 직장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 어학원생들이 무작위로 부대낀 채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갈 즈음이 되면 지쳐 있기 마련이므로, 만원 지하철이란 무척 높은 인구 밀도 치고 조용한 편이었다. 저들끼리 떠들어대는 학생들, 크게 통화하는 아저씨, 그리고 이때 같은 간헐적 소란이 없다면 여느 도서관과도 비슷할 것이다.


"아가씨, 흥분한 건 알겠는데……"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사십 대 중후반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말끔한 정장 차림에 검은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었다. 오래된 안 경하며 부스스한 머리, 살짝 풀려있는 넥타이를 보자면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직장인이라 할 수 있었다.


"누가 아가씨에요? 그따구로 부르지 마세요, 역겨우니까" 방금 전 소리를 질렀던 여자가 남자의 말을 잘랐다.

"아, 아니, 그럼 어떻게 부르나?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참내……" 남자는 여자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당혹감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이었다.


"지금 아저씨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휴대폰 달라고요! 빨리!"


"아, 안 찍었다니까 그래도……"


"그럼 보여주시면 되겠네요! 안 찍었다면서요?"


"내가, 왜 내 휴대폰을 보여줘야 됩니까? 여기는 내 개인적인 사진 밖에는 없어요. 왜 자꾸 엄한 사람을 갖고……"


"엄한 사람이요? 제 치마 아래쪽으로 몇 번이나 손 집어넣고, 휴대폰으로 동영상 녹화하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지금, 엄한 사람이라고요?"


끽해야 이십 대 중반이나 돼 보이는 여자였다. 위에는 네이비색 블라우스를, 아래로는 무릎 밑쪽이 다 보이는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잔뜩 공들인 티가 나는 화장 치고 매력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뚱뚱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제법 살집이 있는 몸매였는데, 까놓고 말해 흔히 '몰카의 대상이 될 정도의 미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빤히 쳐다보거나, 휴대폰 카메라로 상황을 찍고 있던 대부분의 승객들은 심리적으로 남자의 편을 들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생 커플은 "누가 자기 치마 같은 거 보고 싶어 하는 줄 아나 봐" 하며 저들끼리 키득대기도 했다. 이 커플은 싸우던 여자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쳐다보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말투와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호감이 가지 않는 인상에 그런 태도까지 겹쳐 더욱 꼴불견이었다. 한편 남자는 끊임없이 주위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등 보고 있기만 해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별안간 "아니, 학생!" 하고 호통을 쳤을 때는 지켜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최 날 이렇게 몰아넣는 이유가 뭐요? 왜 애먼 사람을 가지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욕지거리를 하냐고요. 내가 지금 집에 가는데, 가면 딱 학생만 한 딸이 있어요. 우리 와이프는 따뜻한 밥 해놓고 기다릴 것이고…… 내가 왜 젊은 아가씨 사진을 몰래 찍어요?"


"그러니까! 보여주면 될 거 아녜요? 거기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게 있다고 못 보여주는데요? 몰카 찍었으니까 못 보여주는 거 아니냐고요!" 여자는 지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어떻게든 끝장을 보겠다는 심산 같았다.


"내가 대체 무슨 이유로, 당신한테 개인적인 사진들을 왜 보여주느냐, 이 말이야!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이렇게 사람을 몰아붙이고…… 지금 여기, 열차칸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아요? 만약 휴대폰을 봤는데 사진첩에 당신이 말하는 몰카, 사진 같은 게 없으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책임? 지금 책임이라고 했어? 오냐, 그래, 너 이 새끼 말 잘했네. 니가 감방을 가든, 내가 감방을 가든 둘 중 하나겠지. 당당하면 휴대폰 내놔! 내놓으라고!" 여자는 남자의 안전에 손을 내밀면서 고함을 쳤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욕 좀 그만해요, 여기 당신만 있습니까?" "쯧쯧, 젊은 여자가 버르장머리하고는……" 같은 말이 들려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아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여자는 중년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몸싸움 비슷한 걸 벌이기 시작하더니, 주위 사람이 말리기도 전에 남자의 휴대폰을 빼앗아버렸다.


그러나 휴대폰은 남자의 지문으로만 열 수 있게끔 잠겨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휴대폰을 들이밀면서, "열어, 열라고!" 하며 쏘아붙였으나, 남자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묵묵부답인 채로 있었다.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관심도 잦아들어서, 그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열 명도 남지 않았다. 버럭 소리나 지르는 여자나, 까짓 거 보여주면 될 것을 괜히 버티기 바쁜 남자나 보기에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때맞춰 그 젊은 남자가 나서지 않았다면 영영 해결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봐요!" 젊은 남자가 난데없이 끼어들어 말했다.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음 역에서 내리든가 하세요. 같이 파출소든 어디든 가면 될 것 아닙니까?"


"저는 정말 그러고 싶은데, 이 아저씨가 버티잖아요!" 여자가 대뜸 소리쳤다. 아마도 그 젊은 남자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선생님. 억울하시더라도, 해결하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음 역에서 같이 내리셔서 가시죠. 제가 같이 갈 테니까요"


삼십 대 초반의 남자는 건장한 체격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말없이 버티고 있던 남자도 "저, 저는, 저어기 신대방역에서 내려야 되거든요……" 하고, 작게나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젊은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노골적으로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선생님. 신대방역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계속 이러고만 계실 겁니까? 아까부터 계속 들어봤는데, 억울하신 것도 알겠고 여기 여자분이 너무 화를 내는 것도 맞지만…… 지금 휴대폰 사진첩을 확인 못하면 달리 해결할 방법도 없는 거거든요. 제발 협조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두 분 때문에 여기 있는 승객분들이 다 불편해하고 있잖아요"


젊은 남자는 친절하면서도 고압적인 말투였다. 적어도 제삼자가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왜소한 체격의 중년 남자와 달리, 그 남자는 키가 백팔십 중반은 거뜬해 보였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는 자신의 체격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 뒤에 서있는 여자는 벌써부터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 중년 남자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에 닿았다. 여자와 젊은 남자는 잠금이 풀린 휴대폰을, 주위의 승객은 그 상황을 숨죽이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지하철 칸 구석까지 처박힌 중년 남자는 곧 얼굴이 창백해졌고, 마침내 여자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사진첩을 열어보는 순간이었다.


몇 초 뒤, 여자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곁에 있던 젊은 남자는 그 휴대폰 화면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픽 웃으면서, 중년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왜 안 보여주려고 했는지 이제 알겠네요. 좀 숨겨놓으시든가 하지 그러셨어요? 와이프분의 그런 사진은……"

젊은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곧 죽을 사람 같던 중년 남자도 혈색을 되찾더니,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내 신대방역으로 향하는 2호선 그 열차칸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오직 그 여자만이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 사진첩을 몇 번이나 돌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본들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사십 대 중년의 여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찍어 보낸 사진밖에는 없었고, 자신을 몰래 찍은 사진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정말 저는 오해를 해서……" 여자는 중년 남자 앞에서 돌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눈물범벅인 얼굴은 이리저리 번진 화장으로 엉망이 돼있었다.


"아, 됐어요, 됐어.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중년 남자는 무릎 꿇은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젊은 아가씨가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나도 이런 상황은 오십 평생 처음이라서, 너무 당황을 했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됐다니까 그래도, 이제 그만 사과해요. 나도 아가씨한테 못 할 말 많이 했으니 까는. 그래도 부모님 뻘 되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내 이렇게 나이 먹고, 지하철 타고 집 가다가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 아닌 모욕을 당했지만은, 당신 부모님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는 거에요. 부모님 된 입장이니까 봐주는 거지. 다음에 다른 사람한테는 이러지 말라고요…… 알겠어요? 취직은 언젠가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중년 남자는 전에 없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해도 무방한 상황인데, 용서는 물론 격려까지 건네는 훈훈한 상황에 박수까지 튀어나왔다. 젊은 남자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가 앉았고, 중년 남자는 여자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신대방역 플랫폼에 내렸다. 구석자리에 주저앉은 여자는 신도림역에 도착해 내릴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뒤로 한동안 '2호선 몰카 의심녀'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주요 포털사이트와 SNS 등지에서 화제몰이를 했다. 얼마나 많은 관심을 끌었는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리는가 하면 몇몇 온라인 매체를 통해 기사가 나기도 했다. 짤막한 기사 아래쪽에는 '생긴 대로 논다더니 꼴값도 제대로네ㅋㅋ', '저런 미친년한테 걸린 아저씨가 너무 불쌍하다... 힘내세요 아저씨' '쟤도 나중에 딸뻘되는 년한테 쌍욕 먹었으면' 같은 댓글이 차례대로 달렸다. 페이스북에서는 <'2호선 몰카 의심 사건'으로 보는 20대 여성들의 공격성> 이라는 제목의 긴 글이 올라와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각종 뉴스에서 '조직적으로 몰카를 촬영해 유포하는 불법 사이트가 적발됐다'는 보도를 쏟아낼 즈음에는 한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경찰은 지난해 말 개설된 그 불법 사이트에 이미 2천 건이 넘는 몰카 동영상이 업로드돼 있었고, 주요 타겟은 만원 지하철에 치마를 입고 탑승하는 이삼십 대 여성이었다고 발표했다. 사이트의 핵심 운영자들은 하나같이 사오십대의 평범한 직장인 남성들이었는데, 동영상을 촬영하자마자 '공유 클라우드'에 업로드한 뒤 사진첩에 있는 동영상을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응용 프로그램(원래는 기기 자체의 용량을 아끼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을 통해 주변의 의심을 피해왔다.


이 사건은 특히 아내와 자녀 등 가까운 가족까지 완벽하게 속였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공분을 샀으며, '존나 소름이다 어떻게 딸까지 있는 인간이 저딴 짓거리를 하지?' '회사에서 자르는 건 물론이고 죽을 때까지 콩밥먹게해야한다 사형도 부족함ㅉㅉ' '피해 여성분들은 얼마나 속상하실까? 정신적충격이 어마어마할듯;;' '저런 암적인 존재들이 우리 사회를 좀먹는 것이다 사형제도 부활이 시급함' 같은 댓글이 기사에 따라붙었다. 또, 페이스북에서는 <초대형 몰카 사이트의 몰락과 중년 남성들의 관음증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긴 글이 올라와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여자는 네 평 남짓한 자취방에서 목을 매달아 숨진 채 발견됐다. 다음날 아침 뉴스의 하단 바에는 '취업 실패한 20대 여성, 처지 비관으로 극단적 선택' 이라는 문구가 스쳐 지나갔으며, '정부가 하는 일이 대체 뭐냐... 나라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우리나라는 사는 게 사는게 아님. 일찍 간 게 오히려 나을지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 생에는 꼭 취직 성공하실거에요' 같은 댓글이 몇 줄짜리 기사 아래로 이어졌다. 또, 페이스북에서는 <취준생 여성의 자살이라니! 현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라는 제목의 긴 글이 올라와 수백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할로윈 파티의 마녀>, 2019. 5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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