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Jun 02. 2019

습작

서른여덟번째

나는 사흘 전에 자살했다. 죽고 나니 시간감각이 영 없어서, 사실은 사흘이 아니라 일주일은 더 됐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은 장소는 열 평짜리 임대아파트, 두 평짜리 화장실 구석에 있는 욕조 속이었다. 그곳에 물을 가득 받고서, 오른팔을 팔꿈치 안쪽부터 손목 끝부분까지 주욱 그은 뒤 깊게 담갔다. 그러자 잠긴 수돗물 속으로 혈액이 연기처럼 번져나갔다. 난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해서, 이내 완전히 죽었다.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자살한 것에 대해 자책하거나 후회하는 마음 같은 건 없다. 시간을 다시 되돌려 죽기 직전으로 가더라도 난 똑같이 자살했을 것이다. 물론 그 땐 깨진 소주병 대신 부엌칼이든 뭐든 날이 잘 드는 도구를 쓰고 싶다. 같은 곳을 세 번 네 번이나 그어 혈관을 터트리는 건 나처럼 굳게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게도 존나게 아팠기 때문이다.      

좀 웃긴 사실은, 당일 아침만 하더라도 난 자살할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나의 자살을 아주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식할 것 같다. 다만 지금부터 설명할 이야기는, 적어도 내겐 아주 오랜 시간에 걸친 비극이었다. 몇몇은 ‘이쯤이면 충분히 자살할 만하군’ 하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그 날은 주말이었다. 아마 오후 두 시 쯤 됐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아침부터 붙잡고 있던 자기소개서를 내려놨다. 찬장에는 라면이 두 개 남아있었다. 끓는 물에다 면과 스프를 넣고 삼 분을 더 끓였다. 팔팔 끓는 물에 면을 삼 분이나 익히면 금방 퍼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는데, 어머니는 나더러 그런 면을 어떻게 먹느냐고 유난을 떨었다. 나로서는 설익어 꼬들꼬들한 면을 먹는 쪽이 더 이상한 일 같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진 한참 남아있었다. 나는 라면 끓는 냄비를 부엌 식탁에 올려다놓고, 냉장고에서 적당히 익은 김치를 덜어 그릇에 담았다. 그렇게 첫 젓가락질을 하려던 찰나, 똑,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 때였다. 다만 이때가 비극의 시작이라고 하긴 좀 그렇다. 굳이 말하자면 비극이 완성되는, 피날레의 시작이었다고는 할 수 있겠다.     


급하게 츄리닝 바지를 입고 현관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현관 바깥쪽에 알 수 없는 인기척이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적어도 다섯 명쯤이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좀 더 자세히 들을 생각으로 문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그러자 똑, 똑똑 하는 소리가 한 차례 더 나더니, 젊은 남자의 말소리가 크게 울렸다.     


“안녕하세요! 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댁에 계시면 혹시 촬영협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나는 당황했다. 방송에 나올만한 일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군대에 막 다녀온 스물다섯 살 백수에게 뭐 특별한 것이 있다고 촬영을 나온단 말인가. 의구심이 샘솟았지만, 난 결국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쳤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문을 열어젖히면, 뭔가 기적적인 일이 하나 일어나서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사건으로 내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 사라지는 것도 일종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면.     


방송국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나와 어머니 단 둘이 사는 아파트에, 열댓 명이나 되는 촬영 스태프들이 꽉꽉 들어찼다.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라고 물어보려던 순간에 마주해 버렸다. 스태프 무리를 비집고 주인공처럼 나타나는, 지우의 얼굴을 발견했다. 지우는 예전보다도 더 커진 키에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있었고, 포마드인지 뭔지로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데다 잘 다려진 수트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하도 입어 누렇게 뜬 민소매 나시와 펑퍼짐한 츄리닝을 입고 있었을 뿐이다.     


“오우~ 브라더! 잘 지냈어?”      


지우는 날 보자마자, 해맑게 말을 건네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 순간 나는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우가 어깨동무를 한다는 건 남몰래 내 귀에 속삭일 말이 있다는 것이고, 난 단 한 번도 그 귓속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우는 어깨동무를 한 팔로 날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 앞에서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잘해, 알겠지?> 하고.     


약 한 시간 동안 지옥이 이어졌다. 차라리 지옥이 더 나았다. 거긴 불에 태우는 고통을 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활짝 웃으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한편 지우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한껏 들뜬 모양이었다. 마치 소중한 추억에 잠긴 것처럼.     


“제가 웅이를 많이 놀리긴 했어요. 물론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죠. 어떻게 된 거냐면, 이게 당시 유행하던 만화에서 나오는 캐릭터 이름이랑 저희 이름이 똑같았거든요. 포켓몬스터라고. 주인공 이름이 지우였고 걔를 따라다니는 친구가 웅이였어요. 다른 친구들도 막 놀리고 그랬는데…… 아무튼 그래서 같이 많이 놀았고 때론 다투기도 했죠. 서로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고요.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전 소속사가 생기고 본격적으로 데뷔를 준비하게 되면서 연락 한 번 못했죠. 저 나름대로는 엄청나게 필사적이었거든요. ……그래도 그 때 웅이에게 준 상처가 계속해서 생각이 나곤 했어요. 그렇게 좋은 친구에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했던 제 행동이 웅이에게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정말이지, 더 일찍 사과해야했는데……”     

지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정말로 울고 있었다. 어찌나 눈물을 펑펑 쏟던지, 마치 내가 상처주고 사과하는 입장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대여섯 개의 카메라 렌즈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이지 속았을 지도 모르겠다. 난 배알도 없이, 눈물을 질질 흘리며 엎드려 우는 지우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원래부터도 몸이 건장한 놈이었는데 연예인이 되고나서는 아예 운동선수처럼 단단해졌다. 그 때 나는 지우가 그 커다란 주먹으로 날 한 방에 때려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학창시절에 두 분만이 갖고 있던 추억 같은 건 없으세요? 같이 했던 놀이나 게임이라든지……” PD처럼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나는 돌연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지우가 느닷없이 튀어나와선, 몬스터볼이라고 서로한테 공 던지는 게임을 같이 했었어요, 하곤 운을 떼는 것이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포켓몬 주인공 일행 이름이랑 같잖아요? 그래서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드렸는데, 거기서 착안한 게임이라고나 할까요. 서로 작은 공 같은 걸 준비해서, 쉬는 시간에 서로한테 던지면서 놀았어요. 몬스터볼 안에 들어가라고 하면서, 막, 하하……”     


나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난 교실 뒤에 사람을 뒤돌려 세워놓은 다음, 등과 엉덩이에 축구공을 던지고 차서 맞히는 일을 도저히 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지우가 온 힘을 실어 걷어차거나 던진 공에 맞아 나자빠졌다. 그러면 반 친구들은 먼발치에서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참 신기하게도 그렇게 맞고 나면 멍도 흉터도 남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그랬다.     


이 대화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살해 죽기 직전의 기억만큼이나 몽롱하다. 다만 지우가 빨간 불이 켜진 카메라 앞에서, ‘웅아, 니가 받았을 상처에 진심으로 미안해. 부디 내 사과를 받아주겠니?’ 하고 울먹였던 일,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내가 ‘응. 당연하지…… 우린 친구잖아’ 하고 멍청하게 대답했던 일만큼은 기억이 난다. 이 대답은 뚜렷한 영상으로 기록됐으며, 비교적 규모가 작은 케이블 방송에서 <속죄와 반성>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이로써 나는 공식적으로 지우를 용서한 사람이 됐다. 지우는 나에게 가했던 모든 학대와 죄책감,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뒤로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대로다. 내가 죽은 그 다음 날에는 날 다룬 기사가 열두 건이나 떴다. <‘취직실패로 인한 처지비관’ 서울 노원구에서 김 모씨(25)가 자택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는 짤막한 기사가 한 건, <최근 불거진 몇 연예인들의 학교폭력 논란, 이른바 ‘학폭미투’가 화제가 된 가운데 모 보이그룹의 모 멤버가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모 멤버는 오래된 친구들과 주고받은 상처를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영상을 SNS에 업로드 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해당 멤버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것 같다’ ‘학폭 논란에 휩싸인 뭇 연예인들이 본받아야할 행동이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열한 건 있었다.     


어쩌다보니 말이 길어졌는데. 죽은 사람은 혼잣말 말고는 별달리 할 일도 없으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주제에 왜 따로 유서를 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세상엔 끝까지 할 말과 못 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두겠다. 제 아무리 고통스러운들 몇 달간 투병생활을 하다 이제 겨우 돌아온 어머니에겐 못 할 말들이 더 많다. 그나마 암세포를 조기에 발견해서 망정이지, 미리 제거해두지 않았다면 나보다 먼저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씨 말리기>,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하단 링크에서 해당 글과 그림을 구매해주시면 작업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 글과 그림 구매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