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번째
언젠가 꿀에 유통기한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벌이 옮겨다놓은 분자구조가 어쩌고저쩌고 해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썩는 법이 없고, 이론상으로는 고조선 때 만든 꿀을 오늘 먹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도 온통 달기만 하다면 영원할 줄로 알았다. 단물을 모조리 빨아먹고, 쓰고 매캐한 건 몽땅 네게 뱉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넌 내 머슴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헤어진 날 밤에, 나는 난데없이 마트에서 꿀을 한 통 사왔다. 왠지는 잘 모르겠다. 그땐 이별 직후의 아이스크림이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우울한 사람의 입에다 아카시아 꿀을 마구 집어넣는 건 꽤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자연이 선물한 단맛. 세상에 그렇게 인공적인 방해물 없이, 순수하게 날 위로해주는 존재란 늙은 강아지와 꿀 뿐인 것 같았다.
사흘이 지난 뒤, 나는 오백 미리짜리 꿀통을 반도 비우지 못한 채 내다버렸다. 수시로 먹어 대다보니 물릴 대로 물려버린 것이다. 그냥 찬장에 놔둬도 될 일이었지만, 그쯤 되니 꼴조차 보기 싫어 집 앞 전봇대 앞에다가 쭈우욱 짜버린 다음 빈 통만 들고 돌아왔다. 그 꿀통은 깨끗이 씻어서 클렌징오일을 담아놓는데 썼다. 그땐 정말이지 마땅한 통이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무심코 화장실에 놓인 꿀통을 입에다 쏟아 부을 뻔 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마터면 클렌징오일을 먹을 뻔 했다는 건 차라리 나았다. 내다버릴 정도로 물렸던 것이, 겨우 하룻밤 지나고 나서 다시 당긴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서 편의점으로 갔다. 내다버린 것이 아까워 새 꿀은 살 수 없었다. 애초부터 자취생 입장에선 사치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천오백 원짜리 초콜릿이나 하나 사서 나왔다.
집 근처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해가 부쩍 내리쫴 눈이 부셨다. 문득 어제 내가 버린 꿀은 어떻게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더운 날, 바깥에 그렇게 싸질러놓았는데도 썩지 않았을까? 길바닥에서 더러운 오물이라도 옮겨 붙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개처럼 핥아먹는 게 좋을까? 흠.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편 내가 꿀을 부은 자리에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다. 전날 뭔가를 버린 흔적조차 없었다. 벌이나 개미가 다녀간 건지, 비가 와서 씻겨 내려갔는지, 아니면 내가 꿀을 사먹고 내다버린 사실까지가 모두 꿈이었던 건지. 그 때부터 달달한 맛은 그리움처럼 찾아왔고, 갈증을 못 이길 때면 하릴없이 나와 카톡하고 껴안아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벌이라는 걸,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왕 벌>, 2019. 5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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