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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07. 2019

습작

마흔번째


엄마와 마트에 가면 늘 분홍소시지 한 줄을 사왔다. 천 원도 안 하는 그 소시지를 쑹덩쑹덩 잘라서, 계란 한 알 풀어 담근 뒤 지져먹는 것이 우리 집 나름의 특식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 나는 그 분홍소시지의 정체가 고기는커녕 어묵 냄새만 조금 나는 밀가루 덩어리라는 걸 알게 됐다.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대신 세상에서 이 분홍소시지가 제일 맛있다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 기특한 아이였다. 사실 분홍소시지의 정체를 알았다 한들 별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 분홍소시지 말고는 마트에서 우리 모자가 살 수 있는 소시지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돈이 없어도 소시지를 먹고 싶은 마음까지 없을 순 없다. 분홍소시지는 우리 모자의 가난한 욕구를 양껏 채워줬다. 심지어 집에 밥 한 톨 없을 때도 분홍소시지만큼은 남아 있었다. 난 그럴 때마다 냉장고에 꽁꽁 싸놓은 소시지를 꺼내서, 딱 손가락 두 마디만큼 잘라 우걱우걱 씹어 먹곤 했다. 더 잘게 썰어서 라면에라도 넣어먹을 때면 그 맛이 기가 막혔다.     


분홍소시지는 저렴한 가격치고 찾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비엔나소시지며 베이컨이 다 팔리는 경우는 있어도, 분홍소시지만큼은 마트 냉장 칸 맨 왼쪽 구석에 항상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늘 있던 자리에 분홍소시지가 없었다. 가격표는 그대로인데 상품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하도 안 팔려서 자리를 옮겼겠거니 하고 마트 직원에게 분홍소시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거기 없으면 없는 건데요. 있는 재고 몽땅 빼놓은 거라서”     


 뜻밖의 답변이었다. 나와 엄마는 잔뜩 벙 찐 표정으로 집에 돌아갔다. 장바구니에는 계란 세  알과 토마토케찹 한 통이 들어있었다.      


 한동안 분홍소시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마트 안쪽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때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재고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마구 사대고 있었다. 덕분에 엄마와 나는 몇 번이나 허탕을 쳐야했다. 우리는 누런 밥을 보리차에 말아서 김치와 함께 먹었다.     


 한편 주위의 친구들 집 내외에서는 분홍소시지를 계란에 부쳐 먹었더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하는 얘기가 들려오곤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대관절 무슨 조화가 있어서 사람들이 안 먹던 분홍소시지를 다 먹는단 말인가? 억울한 나머지 마트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다 TV드라마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한창 인기몰이를 했던 TV드라마였다. 재벌가의 아들로 태어난 남자 주인공이 어느 날 실종돼서, 달동네의 어느 흙수저 집안에 거둬져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다는 뻔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 분홍소시지를 계란에 부쳐 먹는 장면이 유독 인기를 끌었고, 그 덕분에 재벌가에 돌아가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한 나머지 옛날에 살던 집을 찾는다는 설정이 붙어버린 것이다. 이 바람에 우리 모자는 늘 먹던 분홍소시지도 못 먹게 됐고, 난 아침댓바람부터 반찬투정을 하다가 머리를 몇 대나 얻어맞았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별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유행이 다 지나가기까지 간장계란밥이나 몇 번 해먹었을 뿐이다.     


분홍소시지 열풍은 한 달도 안 돼 완전히 끝났고, 사람들은 또 다른 유행을 쫓아 떠났다. 재고는 딱 예전만큼 쌓였으며 가격도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우리 모자의 밥상에는 다시금 계란에 부친 분홍소시지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분홍소시지는 분명 예전의 분홍소시지와 달랐다. 가난해도 배부르고 싶은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이 실컷 먹다 남기고 간 가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늘 그래왔듯이 분홍소시지 한 점을 밥숟갈 위에 얹어 입에 넣었다. 씹을 때마다 밀가루의 질감과 저질의 냄새가 치고 올라왔다. 정말 더럽게 맛없는 소시지였다.

     

<빈곤 속의 풍요>,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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