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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09. 2019

습작

마흔한번째

“이건 그냥 실수야” 여자가 말했다. “일종의…… 해프닝 같은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모텔 창살 너머로 햇살이 치고 들어왔다. 여자는 말을 끝맺자마자 일어나서, 느닷없이 속옷을 찾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이불과 여자의 살결이 햇빛에 감응하듯 하얀색을 띠었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는데” 남자가 그대로 드러누운 채 말했다.     


“아,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말해야하지?”     


“뭐라고 말할 필요 없어. 어차피……”     


“아니, 나는 말해야겠어” 여자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끊었다.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너랑 잔건 순전히 실수야. 주말이고, 달리 약속도 없었고, 심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착각 안 했으면 좋겠다고? 난 그런 거 안 하는데” 남자가 대꾸했다.     


“내 얘긴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좀 정리하고 말해도 돼. 담배 피워도 되지?”    

 

“그래. 나도 한 대 줘”     


“음.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전자담배라서”     


“그럼 됐어”     


남자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한 뼘 정도 되는 전자장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윽고 입을 뻥긋거리자 짙은 회색 연기가 방 주위로 피어올랐다. 과일향이었다. 여자는 아직도 속옷을 못 찾은 모양이었다. 이내 지친 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 바쁜 거 없지?”     


“일요일이니까” 남자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시간 좀 내줄래?”     


“한 번 더 하자고?”     


“뭐, 그것도 좋지”     


남자는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고, 여자에게 다가가 키스한 뒤 혀를 섞기 시작했다. 열어놓은 창밖으로 까치 울음소리와 승용차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섹스를 마치고 옷을 입으니 때마침 퇴실시간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침 겸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다. 남자는 여자 뒤꽁무니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말없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기 시작한지 십 분이 지날 즈음이었다.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비교적 느린 템포의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창가자리에 앉아 이따금 유리 너머를 응시했다.     


“걔랑은 대학교 다닐 때 동기였어. 같은 과에, 같은 학번……” 여자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샌드위치는 반쯤 먹어치운 것 같았다.     


“아…… 그래” 남자가 뒤늦게 반응하는 체를 했다.     


“나이는 걔가 한 살 더 많아. 재수를 했거든. 근데 우리 학과가 학번제라, 말을 놓고 그냥 친구처럼 지냈었어”    

 

“음. 난 대학을 안 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대충 알았어. 그래서?”     


“걔랑은 벌써 육 년이나 됐어. 졸업하고 이 년이나 지났으니까. 무려 육 년 동안이나 친한 친구였단 말이야. 남자들 말로는 불알친구라고 하나? 거기서 우린 성별만 다른 수준이었다니까. 외로우면 같이 술 먹고, 많이 취하면 집에 데려다주고. 그러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걜 믿었고, 걔도 그랬거든. 그래서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친구였어. 군대 가 있을 때는 면회도 가주고, 손편지도 써서 보내주고. 물론 남자친구가 화내기는 했는데……”    


“당연히 화내지, 그건”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 그래. 이해는 해. 그런데 걔는 정말 달랐다니까. 날 이성으로 보는 눈빛이 전혀 아니었어. 정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우정? 정말 이성사이에 우정이 있다면 걔랑 나의 관계일거야. 그런데 있지? 졸업하고 나서는 거의 연락을 안 하게 되더라고. 나는 바로 인턴하러 회사 들어갔고, 걘 공무원 준비한다고 노량진에 처박혔으니까. 그렇게 친했어도 뭐, 학교 나온 뒤에는 자기 갈길 가는 거니까. 가끔 만나서 술이라도 한 잔 할 법한데 그런 일도 없었어. 워낙 바쁘기도 했고, 생각이 안 났을 수도 있지. 그런데……”     


쉬지 않고 말하던 여자가 돌연 말을 흐렸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여 여자의 안색을 살폈다. 혼란스러운 낯빛이었다.     


“최근에 연락이 온 거야. 같이 만나서 술 한 잔 하지 않겠냐고. 평소 같으면 잔업도 있고, 졸업하고 나서 데면데면한 사이니까 점잖게 거절을 했겠지. 그런데 내가 얼마 전에 사 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 그래서 좀……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정서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아하” 남자가 선뜻 맞장구를 쳤다. “대충 감이 오는데”     


“아니, 끝까지 들어봐.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그동안 회포도 풀고, 술도 안 마신지 오래 됐다 싶어서 좀 무리를 했지.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음, ‘실수’를 한 거야, 글쎄”     


“아, 그냥 섹스했다고 해. 답답하게”     


“아니, 그게 무슨 문제야? 나는 이미 솔로였고, 걔도 마찬가지였고, 젊은 남녀가 술 마시고 같이 자는 게 불법은 아니잖아, 안 그래?” 여자는 짐짓 흥분한 말투였다.     


“나는 문제라고 한 적 없어” 남자가 말했다. “그냥 솔직해지라는 거지”     


“이미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어. 아무튼” 여자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뭐…… 바람 핀 것도 아니고, 남녀사이에 섹스를 하는 게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지. 그런데 걔랑은 느낌이 참 이상하더라고. 난 걔랑 자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단 말야. 생물학적으로나 남자였지, 나랑 성관계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걔랑 자버린 거야”     


“뭐, 문제 있어? 외로운 사람들끼리 잘 만났구만” 남자가 빈정댔다.     


“그래. 나도 처음에는 내가 외로워서 한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건 순전히 실수고, 너랑은 계속해서 친한 친구로만 지내고 싶다, 이렇게 얘길 했거든? 그런데 걔가 느낌이 이상한 거야. 오랜만에 소주에 돼지껍데기 먹으면서 얘길 하는데, 졸업하면서 내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한 번도 날 잊은 적이 없었다고, 요즘도 술 마시다보면 내 생각이 난다고. 아,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했다는 말도 했어”     


“그럼 됐네. 뭐가 문제야?”     


“그래서 나는, 지금 사귀자는 거냐고 물어봤어. 근데 그건 또 잘 모르겠대. 왜? 일단 자기 마음을 잘 모르겠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계속 해야 하는 지도 고민인 상황이고, 무엇보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그래서 조금만 시간을 줄 수 있겠냐는 거야”     


“어, 그래서?”     


“그래서 얼마나 걸릴 것 같냐고 물어보니까, 한 달 정도만 있으면 될 것 같다고 했어. 난 그러자고 했지. 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니까.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나니까 나는 걔를 정말 좋아하게 됐어. 두 달이 지나니까 더 좋아졌고. 지금은 정말 하루라도 연락이 안 되면 미칠 것 같은데…… 아직도 마음 정리가 안 됐대. 내 생각에는 나한테 죄책감을 많이 갖고 있는 모양이야. 내가 회사 생활하는데 방해되는 것 같다고, 연락도 잘 안하고”    

 

“아……” 남자가 입을 벌리고 맹한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너는 걔가 진심으로 좋아졌는데, 걔는 선을 명확하게 긋고 있지 않다는 거지. 안 그래?”     


“음, 맞아. 그렇지”     


“그동안 계속 연락은 했고?”     


“했어”     


“섹스는?”     


“……했지”     


“얼마나 했는데?”     


“어, 음, 일주일에 한 번 내 자취방에 와. 내가 월차내면 그 날에도 와서 섹스하고……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좋아. 결론 났네” 남자가 책상을 탁, 치며 경쾌하게 말했다. “그 새낀 빼도박도 못하는 쓰레기야. 아주 확정적이지”     


“뭐라고?”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그 새낀 그냥 너랑 섹스하고 싶어서 연락한 거야. 처음부터. 인스타나 페북에서 니가 남자친구랑 헤어진 걸 눈치챘겠지. 헤어진 직후의 여자가 얼마나 공략하기 쉬운 대상인지 너도 알지?”     


“아니. 나는 공략당한 적 없어. 걔는 대학 때부터 내 친구였다고”     


“그러니까 연락을 한 거지. 친하고, 같이 술도 마셔줄 것 같고, 또 정서적으로 아주 취약하니까. 살짝만 긁어주면 얼마든지 자빠뜨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거겠지. 어때?”     


“아니야. 내가 봤을 땐……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     


“그런데 자고 나서는 어땠을까? 내가 같은 남자로서 확신하는데, 걘 사정한 직후부터 니가 귀찮아졌을 거야. ‘아, 이걸 어떻게 얼버무리지’ 같은 생각이나 골똘히 했겠지”     


“걔가 왜 그런 생각을 해? 걘 그런 애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솔직하게 말했을 거라니까”     


“그래? 막말로,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는데 내 주위 사람들 중에 나랑 섹스해줄 여자는 너 정도인 것 같아서 연락한 거였다, 나는 너랑 사귈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한 순간의 욕구를 위해 지난 몇 년간의 우정을 한 번 써먹어봤다, 뭐 앞으로 사회생활하면서 볼 일도 없겠다 싶고, 홧김에 해버렸다 쳐도 친구니까 대강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얘기할 남자가 있을까? 응?”     


“비아냥대지마” 여자는 겨우겨우 분을 삭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건 너 같은 쓰레기들의 발상이고”     


“차라리 그렇게 얘기하면 낫지. 솔직하기라도 한 거니까. 당분간 외로우니까 서로 파트너로 지내다가, 좋은 임자 만나면 깔끔하게 정리하면 될 거야. 근데 걔는 그렇게 말한 적 없잖아?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겠지. 욕구 때문에 옛 친구 따먹은 새끼가 되는 것 보다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순정남 흉내가 훨씬 나으니까.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안 된다 이거지. 내 입장에선 본인 욕구에 솔직한 게 뭐가 나쁜가 싶지만…… ”     


“걔랑 나는 파트너가 아니야. 우리는 그런 게 아니고……”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서 섹스하고 헤어진다며? 그 이외 시간에는 연락도 잘 안되고, 사귀는 것도 아닌데. 섹파가 아니면 뭔데?”     


“내 감정은 어쩌고? 나는 걔 때문에 거의 세 달간을……”     


“그거야 걔 알바 아니지. 그냥 ‘아, 너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사귀는 건 잘 모르겠다’ 같이 의미 불분명한 말이나 찍찍 해대면서, 여지를 계속 주면 너는 걔랑 연락을 하고 만날 수밖에 없는 거고, 너는 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겠답시고 계속 섹스를 해줄 테니까. 애초에 섹스가 목적이고, 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니 감정 같은 걸 신경 쓰겠어?”     


“아니, 그럼 그냥 파트너로 지내자고 말하지 않은 건 뭐 때문인데? 세상에는 FWB같은 것도 있는데”     


“그야…… 너랑 사귀고 싶진 않은데, 니가 다른 남자랑 섹스하는 건 못 견디겠다는 거지 뭐” 남자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일종의 소유욕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물건 중에서도 갖고 있어봤자 쓰진 않는데 남 주기는 싫은, 뭐 그런 거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페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번씩 커피머신이 작동하는 소리, 믹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뿐 대체로 조용했다.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깍지를 낀 채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대는 걸 보고 있었다.     


“그래, 인정할게” 여자가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한층 편안해진 목소리였다. “꽤 설득력 있는 의견이야”     


“고마워”     


“그런데,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관계는 단순하지가 않아. 얽힌 것도 많고, 아주 복잡해. 너한테 말 안한 것도 많지. 그냥 내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한 것뿐이니까. 너딴에는 최선을 다한 거라고 생각해”    

 

“음, 그래”     


“나는 그냥 솔직하게 물어볼 생각이야. 날 정말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말이야”     


“파트너로 지내자는 말은 안 하고?”     


“아, 걔가 그 정도는 아니야. 침대에선 니가 훨씬 나아. 가능하면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이것도 얘기할 거야? 걔한테는 되게 상처겠는데”     


“아니?”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런 걸 왜 얘기해?”     


“솔직하게 얘기한다며? 슬쩍 떠보기라도 해봐. 앞으로 바빠서…… 아니, 몸이 안 좋다고 하는 게 좋겠다. 염증이든 뭐가 병이 생겨서 너랑 섹스는 할 수가 없다, 대신 만나서 밥도 먹고 영화도 보러가고, 연락도 더 자주하면서 서로 감정을 정리해보자고 해봐. 네가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섹스는 못하겠다고 하면 돼”     


“……그런 짓을 왜 하는데?”     


“떠보는 거라니까. 널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고, 고민하고 있는 거라면 더 깊은 얘길 나눌 수 있겠지”     


“그게 아니면?”     


“사흘 내로 나가떨어질 거야”     


“정말 그럼 정말 못 견딜 것 같은데”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물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아, 잠깐만” 별안간 남자가 손가방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에 쓱쓱, 무언가 써서는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냅킨을 손바닥 위에 펼쳐놓았다. 남자의 휴대폰 번호였다.     


“정말 그렇게 되면 그리로 연락 줘” 남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럴 일 없어”      


여자는 주먹을 꽉 쥐어 냅킨을 구겨버린 다음, 카페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어디엔가 전화를 거는 시늉을 하며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남자는 그대로 앉아 남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고 마시면서, 가능하면 여자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길 바랐다.      


전화가 울린 건 그로부터 만하루가 지나서였다. 전화너머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같이 미술관에 가자고 말했다.     


<연극이 끝난 후>,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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