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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12. 2019

습작

마흔세번째

“그러고 보니 남자들은 그런 생각을 꼭 한 번씩 한다던데” 여자가 말했다.      


저녁의 공원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주황색 전등 아래로 수십 명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속도로 걷거나 뛰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공원 호숫가를 빙 돌아 걷는 중이었다.     


“뭐? 무슨 생각을?” 남자가 되물었다. 입고 온 옷이 얇아 다소 떨리는 모양이었다.     


“여자친구나 아내를 진심으로 때리고 싶다는 생각 말이야” 여자가 대답했다. “너도 그런 적 있어?”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자는 설핏 남자의 눈치를 살피려다가, 아랑곳 않은 체하며 앞으로 계속해 걸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듣긴 들었어?” 견디다 못한 여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들었어” 남자가 말했다. “내가 너 때리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냐고 물은 거 아니야?”     


“맞아”     


“있어”     


“……뭐라고?” 여자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 선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지금 그 말 진심이야? 날 때리고 싶은 적이 있었다고?”     


“그래. 몇 번 있었어”     


“몇 번이나?” 여자의 표정과 말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나왔다. “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지금……”     


“왜? 내가 널 때리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때리고 싶은 적이 있었냐고 물은 거잖아. 난 솔직하게 대답한 거야” 

     

“그 말이 나한테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알고 있어? 넌 대체……”     


“잠깐만” 남자는 양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쏘아붙이던 여자의 말을 끊었다. “일단 저기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자. 지금은 사람들 진로를 막고 있으니까……”     


두 사람은 호숫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는 무척 짜증스러워 보였다.     


“난 니가 그렇게 폭력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어”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나한테 많이 실망했어?”     


“솔직히 말하면 그래” 여자가 대답했다. “내가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한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잘 알면서…… 그렇게 말한 거잖아. 난 더 이상 너를 똑같이 볼 수가 없을 것 같아. 언제든지 날 때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테니까”     


여자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벌레소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로 시끄러운 가운데 여자의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이어졌다. 남자는 말없이 여자의 등을 쓰다듬었다. 몸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아빠는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지는 습관이 있었는데” 남자가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난 그게 정말 싫었어. 뭐, 누가 좋아하겠어? 유리컵이고, 책이고, 눈에 보이는 건 다 갖다 던져서 부숴대는데. 한 번은 현관에 걸쳐놓은 내 야구배트를 집어던졌는데, 그게 TV에 맞은 거야. 당연히 박살이 났지. 그래서 한두 달 동안은 아예 TV를 못 봤어”     


“……” 여자는 말이 없었다. 남자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친구들이 포켓몬스터 얘기할 때 못 끼는 건 문제도 아니었어. 엄마가 집을 나가서 따로 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거든.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오고, 물건부터 날아가는 남자랑은 도저히 못 살겠다면서……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래놓고 아빠는 엄마가 왜 집을 나갔는지 이해를 못했다는 거야. 자기가 언제 물건을 그렇게 많이 던졌냐면서, 몇 개 부수지도 않은 걸 갖다가 엄마가 엄청 과장한다고 했어. 내가 볼 때에는 정말 집안에 남아나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이 내던졌는데도……”     


“……그래서?”     


“아무튼, 난 아빠가 너무 싫어서 빨리 독립했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친구도 사귀고…… 그런데 있잖아. 사람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자기가 보고 배운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힌다는 거……”     


“너도 물건을 던졌어?” 여자가 물었다.     


“응. 던졌어” 남자가 대답했다.     


“……충격적이네”      


“나도 그랬어. 내가 제일 싫어했던 사람이 하던, 제일 싫어했던 그 짓을 내가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 그러면서도 나는 몰랐어.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사실은 내가 아빠와 다를 바 없이 폭력적인 인간이라는 걸”     


“……”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훌쩍이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잃고 나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만큼은 되기 싫었어. 내가 아빠와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적어도 알고 있다는 거야. 내게 잠재된 폭력성이 있다는 거.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튀어나와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둘 앗아갈 거라는 거……”     


남자는 벤치 뒤쪽의 호숫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주위는 어느덧 조용해졌다. 바람이 잦아들어 추위도 한층 덜했다.     


“말하는 거야 얼마나 쉽겠어? 나는 널 때릴 생각도, 물건을 던질 생각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그런 폭력적인 생각이라곤 일절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정말 너무 쉽지. 그런데 있잖아. 내가 안전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만큼 안전하지 못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적어도 날 때린 적은 없잖아. 내 앞에서 물건을 던진 적도 없고” 여자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거야. 다만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착해질 수도, 얼마든지 사악해질 수도 있어. 나는 나름대로 선한 사람이라고,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가 잘못된 행동을 할 가능성을 무시한다면 나아질 가능성도 없어지는 거 아닐까……”     


“그건 동의해”     


“난 널 때리고 싶지 않아. 상처주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가끔 심하게 싸울 때는, 네가 내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 너무 미워서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해. 그렇지만 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도 참고 견디는 거야. 잘못된 행동 하나가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는지 알고 있으니까……”     


“……응” 여자는 남자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너랑 싸우거나 일이 엄청 밀리거나 하면 담배 생각이 간절해. 끊은 지 이 년도 넘게 지났는데”     


“그랬어? 전혀 몰랐네”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가끔 우울해져. 다시는 담배를 안 피겠다고 너한테 약속했었는데. 완전히 끊었다고 생각했거든”     


“아직 지키고 있잖아”     


“그래도 계속해서 생각이 나니까, 나라는 인간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차피 완전히 끊는 건 없어. 우리 삼촌도 담배 끊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생각이 난다더라고. 그냥 계속해서 참을 뿐이지”     


“그래?”     


“중요한 건 잘못된 생각을 아예 떠올리지 않는 게 아니라,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그게 차이를 만드는 거겠지. 사람의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끊임없이 바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바뀐 거랑 마찬가지 아닐까…… 어차피 바뀌지 않으니까 노력도 안 하는 건 싫어, 나는”     


“그럼, 나는 널 위해 평생 참을게” 여자가 말했다. “아무리 담배 생각이 나도”     


“정말이야?”     


“응, 정말로”     


“그래봤자 깨끗한 폐가 되돌아오진 않을 텐데”     


“그건 니 전 여자친구도 마찬가지지” 여자가 이죽거렸다.     


“필요없어, 이제는”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던져버린 건 어쩔 수 없잖아. 앞으로 던지지 않는 게 중요하지”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 출구를 향해 함께 걸었다. 검게 탄 호수의 표면에 가로등 불빛이 깜빡거렸다. 바람은 점차 잦아들다 이내 멈췄다. 무더운 초여름 밤이었다.          

     

<다음 사랑의 극한값을 구하시오>,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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