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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18. 2019

습작

마흔여섯번째

서울 모처에 있는 A대학교에 새로운 총장이 부임했다. 총장은 A대 재학생들의 니즈나 불만사항을 재빨리 파악해 학교 운영에 반영하고자 했다. 그래서 A대 캠퍼스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광장에 건의함을 설치하고, 한 달마다 가장 많았던 요청에 대해 조치하기로 했다.     


건의함을 설치한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이제 건의함을 관리하기로 된 행정부장이 총장실에 찾아와서, 지난 한 달간 가장 많았던 건의사항에 대해 보고하기로 돼 있었다.      


“그래,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많았던 요청은 뭐였나요?” 총장이 물었다.     


“확인해본 결과, 캠퍼스 내에 남학생 휴게실을 설치해달라는 건의가 가장 많았습니다” 행정부장이 대답했다. 

     

“응? 남학생 휴게실이 우리 캠퍼스에 없었나요?” 총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여학생 휴게실은 세 곳 쯤 있지만요”      


“그런가? 난 왜 몰랐죠?”     


“그야, 교수 휴게실은 따로 있으니까요”     


“아. 그렇군. 그런데 남학생들 휴게실이 따로 필요한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여학생들은 휴게실에서 낮잠도 자고,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는 등 여러모로 활용을 잘 하고 있습니다. 남학생들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으면 나쁘지 않겠죠. 예산상으로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거구요. 남학생들에게는 아무래도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있나봅니다”     


“흠.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가는 예산이 구분돼있나요?”     


“아뇨. 그럴리가요”     


“것 참 희한한 일이군…… 뭐, 그렇게 어려운 요청은 아니니까요. 캠퍼스에 빈 공간이 많기도 하고, 시공업체랑 계약해서 최대한 빨리 마련할 수 있도록 합시다. 또 요즘은 학내 성평등 문제가 화두니까요. 학교 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반영해야죠”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행정부장이 대답했다.     


머잖아 A대 캠퍼스에는 세 곳의 남학생 휴게실이 마련됐다. 남학생 휴게실에는 간단한 다과, 편하게 쉴 수 있는 침대와 탈의실, 샤워실 등 여학생 휴게실에 있는 건 전부 갖춰졌다. 그러나 A대 남학생들의 휴게실 이용은 보름이 채 안 돼서 차츰 시들해졌으며, 휴게실 내에서의 위생문제(땀냄새와 발냄새, 뭇 동아리에서의 음주파티)가 불거지는가하면 심한 코골이로 인한 남학우들 간의 주먹다짐 같은 사태가 있은 뒤로는 그나마 있던 발길마저 뜸해지고 말았다.      


A대는 남학생 휴게실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각실에 CCTV설치를 시도했지만, 학생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결국 A대는 남학생 휴게실의 각별한 위생관리를 위해 별도 청소 인력을 편성했다. 다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학생들의 휴게실 이용 빈도는 여학생과 비교해 삼분지일 수준도 되지 못했다. 한 교내언론은 <“예산먹는 하마” 애물단지로 전락한 남학생 휴게실!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기획기사를 발행했는데, 한 익명의 남학생이 “생각 좀 해보십쇼. 냄새나는 남자들만 잔뜩 있는 휴게실에 누가 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차라리 벤치에 누워서 쉬는 게 나을 걸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이 뭇 남학생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

다.     


-     


한 달이 지났다. 행정부장은 건의함에 들어있던 학생들의 요청을 서류에 정리한 다음, 총장실을 찾아갔다.     


“얼른 와요. 여기 앉아서 이야기 합시다” 총장은 들뜬 표정으로 행정부장을 맞았다. “이번에는 학생들이 어떤 건의를 했던가요?”     


“저, 그게” 행정부장은 조금 곤혹스럽다는 눈치였다.     


“자, 빨리 말해요. 현기증 나니까”     


“음…… 그러니까…… 이게 좀……”     


“아, 대체 뭐길래 이렇게 질질 끌어요? 제가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압니까? 학생들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할 겁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요. 그게 총장의 일이고, 학교의 일 아닙니까. 자, 말해주세요. 학생들이 어떤 요청을 해왔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행정부장은 못내 말을 꺼냈다. “현재 캠퍼스에 있는 운동장, 그러니까. 중앙 운동장에서 남학생들이 많은 체육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축구며 야구 경기 같은 것들을 할 때 온통 남학생들 또는 남학생 위주의 동아리가 운동장을 독점하는 경우가 잦다는 거죠. 여학생들이라고 운동을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워낙 남학생들이 이용하는 빈도가 높다보니 이용에 불편을 겪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학생 전용의 운동장을 별도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인데요”     


“……음” 총장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런데, 중앙 운동장에 여학생 출입이 안 되나요? 아니면 여학생 위주의 동아리가 사용하기 어려운 규정이 있다거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요 근처 동네 주민에 개랑 고양이까지 돌아다니는 데요”     


“아니, 그런데 여학생 전용 운동장이 왜 필요하다는 거죠? 그냥 쓰면 되잖아요”     


“뭐, 규정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아무래도 분위기나 그런 것들도 있고…… 왜, 운동장이 좀 마초적인 분위기다 보니 여학생들은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그런가 봅니다. 또 일 년에 운동장 관리에 드는 예산이 상당한 편인데, 그런 예산의 혜택을 남학생들이 독점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음, 불공평하다 이거죠?” 총장이 물었다.     


“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캠퍼스에 있는 운동장 하나를 여학생 전용으로 지정하고, 관리 인력을 투입하기로 합시다. 사용 예약도 여학생들만 받기로 하고요. 접근성도 개선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행정부장이 대답했다.     


머잖아 A대는 캠퍼스 후문 근처에 있는 중간 크기의 운동장을 ‘여학생 전용 운동장’으로 지정했다. 일반통행로며 차로를 부가로 연결, 확장하는 등 접근성도 중앙운동장 못지않게 개선했으며, 새 축구골대와 농구코트, 배드민턴 네트를 구축해 구기종목도 즐길 수 있게끔 했다. 그러나 A대 여학생들의 운동장 이용은 보름도 안 돼 시들해졌으며, 운동 경기나 행사를 위한 운동장 예약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운동할 곳을 찾아 헤매던 남학생들이 몰래 출입하며 이용하는 탓에 경비인력을 마련해야 했다.     


A대는 여학생 전용 운동장의 관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인근 주민 동호회의 유료 대여를 허용하려고 했지만, A대 여학생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무산됐다. ‘여학생들의 권익을 위해 조성된 운동장을 어떻게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는 이유에서였다. 나아가 ‘이같이 쫌생이처럼 굴어대는 학교의 태도는 과연 진심으로 성갈등을 해소하고자하는 의지가 있긴 한 건지 의심하도록 만든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한 교내언론은 <“예산먹는 코끼리” 애물단지로 전락한 여학생 전용 운동장!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기획기사를 발행했는데, 한 익명의 여학생이 “생각 좀 해보라구요. 학교 오는 날에는 다들 화장하고, 고데기도 하고, 옷도 좀 신경 써서 입고, 신발도 굽 있는 거 신고 오고 그러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어떤 여자가 땀 뻘뻘 흘리면서 운동을 하고 싶겠냐고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이 뭇 여학생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     


또 한 달이 지나 행정부장이 총장실을 찾았다. 총장은 다소 바빴는지 귀찮은 내색을 했다.     


“아, 뭐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제기랄…… 아, 아닙니다. 이건 다른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가지고, 하하, 이번에는 무슨 요청을 하던가요? 우리 학생들이 말이죠. 또 어떤……”     


“음, 그게”     


“아니, 왜 이거 할 때만 말을 더듬는 겁니까? 평소에는 따박따박 말 잘 하잖아요?”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행정부장이 멋쩍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건의가 반반으로 나뉘었거든요. 그래서 한 가지만 고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학교가 있는 건 돈밖에 없어요. 빨리 처리합시다. 뭔데요?”     


“최근 뉴스에서 화장실 몰카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습니까? 우리 학교에서는 아직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많은 여학생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어……”     


“양쪽 화장실 다 전수 조사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세요. 다음”     


“네, 그럼……” 행정부장은 서류를 몇 장 넘기며 말을 이어갔다. “한 삼 년 쯤 전부터, 학생대상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학생용 보건실에 예산이 배분됐었는데요. 캠퍼스 안에서 갑작스런 생리나 부정출혈 등으로 보건실을 찾는 여학생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해당 예산으로 매월 생리대를 사이즈별로 구비해놓고, 필요한 여학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 씨……” 총장은 불쑥 짜증이 치솟았다. “그래서, 남학생들이 뭘 해달라고 하덥니까? 콘돔이라도 달래요?” 

    

“글쎄요. 혹시나 해서 보건실에 콘돔도 구비해놓긴 했는데, 그나마 몇 개씩 받아가는 것도 다 여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럼 어쩌란 겁니까?”     


“그냥 뭐, 비슷한 예산으로 할 수 있는 걸 해달라고……”     


“애초에 보건실 찾는 남학생이 몇 명이나 된다고!” 총장이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없긴 합니다. 애초에 남학생들이 뭘 하다가 다치면 응급실로 곧장 실려가는 케이스가 대부분이고…… 보건실 갈 정도의 찰과상이면 치료를 안 받거든요”     


“야, 이…… 아, 알아서 해요. 그냥, 알아서 잘” 총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진짜 못해먹겠네……”     


머잖아 A대는 전문점검업체와 계약해 캠퍼스 내에 있는 모든 남자, 여자화장실을 대상으로 몰카수색작업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몰카는 학교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A대는 한동안 학내커뮤니티의 익명게시판에서 “남자가 바지 벗고 똥 싸는 걸 누가 보고 싶어 한다고 남자화장실까지 조사하냐ㅋㅋ” 같은 내용으로 조롱당해야 했다.     


행정부장은 보건실 측에서 생리대 구매에 사용해온 예산을 정돈해, 새로운 예산 카테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남학생들의 요구는 제각각인데다 일관성이 없었으며, 경험적인 통계로 봤을 때 뭘 나눠준다고 해봤자 받아가지도 않는 것이 대부분의 남학생이었다.      


행정부장은 이 문제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한 채 거실에서 고민에 빠져 있곤 했다. 그러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오던 고등학생 아들과 마주쳤는데, 마침 교복을 벗던 아들은 아버지의 고민을 듣자마자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학생 형들 졸라 심심할 텐데, 그냥 게임기나 사줘”     


얼마지 않아서, 행정부장은 해당 예산으로 몇 대의 TV모니터와 게임콘솔을 구매해 각 남학생 휴게실에 배치했다. 게임팩도 이것저것 구비해놓으려던 것을 ‘어차피 위닝 밖에 안할 것’이라는 아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축구게임만 하나씩 마련해놓았다.      


그러자 예산 불균형에 대한 남학생들의 불만은 마치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삽시간에 잠잠해졌다. 대신 남학생 휴게실에서는 매일같이 즉석 위닝 토너먼트가 열렸다. 나아가 몇몇 남학생은 관련 동아리 개설허가를 요청하는가 하면, ‘사람은 많은데 화면이 하나라 답답해죽겠다’며 직접 돈을 모아 중고 모니터와 콘솔을 사서 갖다놓기까지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총장은 ‘정말이지 기가 찬다’는 반응과 함께 이 달 내로 광장에 있던 건의함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행정부장은 이 조치로 인해 딱 한 건 불만사항을 접수했는데, 확인해본즉 ‘엑박에서 위닝 안 돌아가는 것도 모르냐? 싹 다 플스로 바꿔라’는 내용이었다.      


<합리적 불평등>,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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