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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19. 2019

습작

마흔일곱번째

"아무래도 틀린 말 같아" 남자가 말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거"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여자는 대뜸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열심히 어필을 해도 차지할 수 없는 사랑도 있다는 거지, 뭐. 요즘 든 생각인데..."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여자가 남자의 말을 끊었다. "멀쩡한 나무를 왜 넘어트려? 도끼로 찍긴 왜 찍고?"     


"이걸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남자가 되물었다. "속담이고, 평범한 연애 고민이잖아. 좀 끝까지 들어" 

    

"……그래. 요즘 만나고 있다는 걔 얘기 아니야?"     


"맞아" 남자가 말했다. "니가 말 한대로 했거든. 약속도 잡아보고, 대화도 좀 적극적으로 해보고, 아무튼 더 많은 시간을 점유하라고 해서 엄청 애썼는데"     


"어, 그런데. 열 번 찍어 쓰러트리라는 얘기는 아니잖아, 그게" 여자는 대강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아무튼, 잘 안 됐나보구나. 하긴 그럴 줄 알았지. 넌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숫기라는 게 없으니까. 허우대만 멀쩡해가지고……"     


"흠, 살 수 있으면 돈 주고서라도 갖고 싶네. 숫기라는 거……"     


"근데, 그것 보다 더 큰 문제는" 여자가 양 손으로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태도가 좀 글러먹은 면이 있다는 거지. 여자를 나무라고 본다든가"     


"그건 그냥 상징적인 말이야. 목표를 가지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걔 진심으로 좋아해. 농담아니라"     


"상징적이니까 중요한 거지. 거기서 네 멘탈리티라는 게 드러나니까"     


"그런가?"      


"잘 봐" 여자는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열 번 찍어서 나무를 넘어트렸다 치자. 그럼 네가 그 나무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못할 건 없지 않아? 일단 내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남자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니, 할 수 없어" 여자는 눈을 부릅 치켜떴다. "도끼로 쳐서 넘어트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야. 그런 걸 부르는 말은 따로 있지. 목재, 나무토막, 아니면 장작……"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렇게 잘라낸 나무로 난 집도 짓고, 불도 피우고, 따뜻하고, 행복해"     


"……그걸 나무라고 할 순 없어. 나무로 된 집은 그냥 집이지. 또 불을 피우는데 쓰인 나무는 한낱 잿가루일 뿐이야. 나무라는 건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하고, 계절에 따라 꽃잎이 맺히거나 단풍이 들고, 해가 내리 쬐면 길게 그늘을 드리울 수 있어야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는데.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남자는 좀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냥…… 스스로 물어보라고. 니가 갖고 싶은 게 대체 뭔지. 네가 사랑하는 것이 나무라는 존재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저 널 만족시킬 수 있는 자원으로서의 나무인지 말이야"     


"참내. 나무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무가 필요로 하는 건 시원한 비와 기름진 땅이야. 더 날카로운 도끼나, 전기톱 같은 게 아니라"     


"……어쩐지 대화가 너무 겉도는 느낌인데"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내가 받아들이기엔 조언이 너무 추상적인 걸. 그나마 넌 날 잘 알고 있는 여자니까 물어본 건데. 내가 궁금한 건 무슨 영화를 같이 봐야 좋은 분위기가 될지, 어떤 카톡을 보내야 날 좋아할지, 한적하고 분위기 좋은 데이트 코스가 어디에 많은지, 같은 거였어. 단순하잖아? 난 그런 건 하나도 몰라. 물론 섹스는 좋아하지만. 그래서 너랑은 여전히……"     


"닥쳐. 세상에 단순한 게 어딨어? 여자도, 나무도, 그 어떤 것도 단순한 건 없어!" 돌연 여자가 소리쳤다. "니가 몇 번이나 찍었다고, 자빠뜨렸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가질 순 없는 거라고, 알았어? 이 쓰레기야!"     


"진정해. 지금 너무 흥분했어" 남자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만 나가자. 카페는 시끄럽잖아. 어때? 방금 폰으로 대실 예약했거든. 요 근처니까 금방 갈 수 있어"     


"지랄하지마,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여자는 침이라도 뱉듯이 말했다. "더 이상 못해먹겠어, 이젠. 니 맘대로 해.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으니까"     


"하하…… 아쉬운 건 내가 아닌데. 그치?" 남자가 비아냥대자마자, 별안간 여자의 손이 뺨으로 날아들었다. 찰싹! 하는 소리가 오후의 카페와 수 차례 공명했다.      


주위에 앉아있던 십 수 명의 사람들은, 이제 한 명도 빠짐없이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가 돌아간 채 우두커니 서있는 남자와 수런거리는 소리들을 뒤로한 채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 길로 여자가 향한 곳은 인근의 경찰서였다. 몇 가지의 행정적인 절차가 몇 개월의 시간과 함께 스쳐지나갔다. 남자는 얼마지 않아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리고 어떤 구속도 없이, 늘 그랬듯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여자의 성관계 동영상이 해외의 유명 포르노 사이트, 토렌트와 파일공유 서비스에 그대로 유통되고 있을 즈음, 남자는 마침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서 첫 재판을 받았다. 변호사는 교묘하게 편집된 카톡 내역과 연락의 빈도, 그리고 카페 CCTV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여자의 일방적인 폭행(뺨 때리기)등을 바탕으로 해당 사건은 성폭행 및 공갈 협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피고는 재벌가의 자제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강요받고 있다’며, 도리어 여자가 남자의 부를 노리고 접근한 뒤 마음처럼 되지 않자 이 같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고 강변했다.      


남자는 음란물 유포죄 위반으로 징역1년을 구형받았다. 다만 여자의 주장에 일관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 명백히 협박으로 보이는 메시지 및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 성관계 동영상의 최초 촬영 주체가 여자였다는 점, 남자와 함께 모텔에 걸어 들어가거나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서 남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등 다소간의 자발성이 입증됐다는 점 등으로 말미암아 강간 및 협박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판사는 남자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전과가 없고, 진술서 등에서 자신의 죄를 충분히 뉘우치고 반성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선고가 있었던 그날 밤, 잠들지 못하고 있던 여자의 휴대폰에는 문자 한 통이 수신됐다. 


 「열 번 찍어봐;)」     


발신자제한번호였다.      


<숯>,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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