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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20. 2019

습작

마흔여덟번째

“미안해, 나 때문에” 주희가 말했다. “기대 많이 했잖아, 여행……”     


“상황이 이런데 뭘, 별 수 없지” 나는 멍하니 차창 바깥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날은 오후를 넘어 저녁으로 접어들었다. 한강변에 있는 수목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고, 전구색의 가로등이며 공원의 하얀 불빛들이 대신 그 자리를 메웠다. 택시는 이제 막 서울에 진입한 참이었다. 적이 차가 막히는 구간이었다.     


“좀 조심할걸 그랬어” 주희는 혼잣말처럼 되뇌며 몸을 뒤척였다. 아직은 왼쪽 발목에 감겨있는 초록색깁스와 보호신발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너무 바보 같아. 공항까지 다 가서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애초에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간 내 잘못이지. 어차피 공항에서도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데. 괜히 들떠가지고……”     


“여행가는 데 안 들뜨는 사람이 어딨어? 이미 벌어진 일을 갖다가……”     


“아니야” 주희는 날 보지도 않고 내 말을 끊었다. 자주 없는 일이었다. “네가 말했던 대로 해야 했어. 옷이랑 좀 안 맞더라도 운동화를 신고 와야 했는데. 니가 걱정해줘서 한 말인데 나는 듣지도 않았잖아. 내가 다 망쳤어, 내가”     


“……주희야. 괜찮아” 나는 최대한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개를 돌려 주희 쪽을 쳐다봤다. 주희는 앞좌석 머리받침에 이마를 들이받은 채 말없이 있었다. 간헐적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걸 보니 조금 울먹이는 모양새였다.      


나는 문득 안쓰러워 손으로 주희의 등을 몇 번 쓸었다. 파르르한 떨림이 손가락 마디사이로 느껴졌다. 올림픽대로는 여전히 막혔다. 이따금 멀고 가까운 곳에서 경적 울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오직 우리가 있는 택시 뒷좌석만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오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주희는 고개를 그대로 처박은 채 말을 꺼냈다. “멍청한 짓이나 해서, 여행도 못 가게 만든 병신 같은 년이라고……”     


“싫어” 내가 말했다.      


“왜?”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사실이 아니긴 왜 아니야? 공항입구에서 구두신고 뛰다가 발목이 작살났는데. 이게 병신이 아니고 뭐야?”     


“그런 의미로 쓴 거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다쳐가지고 비행기 표도 날리고, 응급실 가느라 병원비 날리고, 여행 준비하는 시간이랑 열심히 만들었던 계획도 나 때문에 아무 쓸모도 없어졌어. 이게 병신이 아니고 뭐야?”     


“아니라니까. 이런 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아무 표정도 없이 말했다.     


“싫어. 본심도 아니면서!” 주희가 더럭 소리를 키워 말했다. “날 욕하고 싶은데 참는 거 아니야? …… 차라리 솔직하게 욕도 하고, 타박도 했으면 좋겠어. 나도 내가 너무 싫은데, 괜찮은 척 하는 니 눈치 보느라 더 힘들단 말이야!”     


“솔직하게 말하라고?”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말했다.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너랑 같이 떠나는 첫 여행이었으니까, 가서 즐겁게 돌아다니다 오고 싶었어. 그래서 네가 발목을 다쳤을 때는…… 조심 좀 하지 그랬어, 하고 타박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 맞아”     


“거봐” 주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괜찮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그런데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우리 같이 떠나는 여행인데, 못 떠나는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 심지어 너는 다치기까지 했어. 거기에 나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 더 힘들겠지. 상황이 이렇게 돼서 제일 힘든 건 너야. 그런 사람에게 책임소재를 묻고, ‘내 그럴 줄 알았지’ 같은 말이나 하는 게, 당사자로서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냐고.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런 얘길 들으면 미쳐서 돌아버릴 걸? 막말로,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일부러 다치는 사람이 어딨어?” 주희가 말했다. 나는 입술 앞쪽을 조금 들어보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네가 발목을 삔 건 그냥 실수야. 사람은 언제든지 실수를 할 수 있지.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 하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어”     


“맞아. 그래서 너무 힘들어. 너한테 상처를 줘서……”     


“근데 실수한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물론 여행을 못 간 건 실망스럽지.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여행은 언제든지 다시 떠날 수 있어. 그렇지만 네가 받을 어떤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두 번 다시 나랑은 여행을 안 가겠다고 할 수도 있을 거고…… 나한테 최악의 상황은 그거야. 지금 여행을 못 가는 것 따위가 아니라”     


“난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너랑 또 여행가고 싶어. 정말이야. 약속해. 꼭”     


“그럼 됐어” 나는 진심이었다. “이제 책임지고 발만 빨리 나으면 되겠네. 아, 아저씨. 그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네. 저쪽으로 빠져주세요”      


“어디 가려고?” 주희는 앞좌석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날 쳐다보며 물었다.      


“바다 대신 강이나 보러가자고. 날씨도 좋은데. 맥주도 한 캔 하자”     


“나 다쳤는데.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주희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약 처방도 안 받았는데 뭘, 깁스에 흘리지만 마”     


“좋아, 그럼”     


택시는 한강변의 가로수가 있는 도로에 멈춰 섰다. 강으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작은 편의점 건물이 있었다. 낡은 파라솔이며 플라스틱 테이블과 간이 의자들이 그 주위로 펼쳐졌다. 선선한 날씨 덕분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반팔 차림이었고, 한 손에는 편의점에서 사온 육포 또는 맥주캔이 들려 있었다.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 주희는 밤이 깊어가는 한강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다들 여행 가려다가 다쳐서 온 사람들이겠지” 내가 말했다.      


“아, 짜증나게!” 주희가 돌연 내 등을 한 대 치더니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육백미리 캔맥주 두 개와 군밤 한 봉지를 사서 나왔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이름 모를 교량이 강 너머로 길게 연결돼있었다. 교량 아래쪽에는 십 수 개의 조명이 일렬로 서서 빛을 발했다. 강 표면에 반사된 빛이 아스라이 반짝이며 이내 흘러지나갔다.       


나와 주희는 그 풍경 바로 앞에 걸터앉아 먹고 마셨다. 강 너머 멀리에서 침침한 불빛과 바람이 뜨문뜨문 찾아왔다. 우리는 맥주 한 캔 가지고 두 시간 넘게 마셨다. 그리고 집에 돌아올 무렵이 되자, 나는 너무 멀리 떠나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정확히 한 달 뒤 찾아간 제주도는 무척 맑은 가운데 곳곳에 유채꽃이 피어 몹시 아름다웠다.      


<무책임한 사랑에 대해>,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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