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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21. 2019

습작

마흔아홉번째

“여기, 여기―” 진주는 이미 혀가 반쯤은 꼬인 모양이었다. “아! 소주 두 병만 더 갖다 주세요!”     


“이제는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주앉은 친구는 진심으로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이거늘…… 금요일이라고, 씨발,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번 한 주를 버텨왔는데” 진주가 말했다.     


금요일 밤의 신촌은 어딜 가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진주가 단짝친구와 함께 찾은 곱창집도 마찬가지였다. 저녁나절이 시작되는 일곱 시 반부터 미리 자리를 잡아놓지 않았더라면, 그 좁아터진 구석자리 테이블에 앉기 위해 한 시간은 기다려야했을 것이다.      


“ㅋㅑ……” 진주는 술잔을 비우자마자 감탄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달다, 달어! 스무 살 때는 술이 달다는 얘길 전혀 이해를 못했었는데…… 아, 여기 곱창 어때? 내가 혼밥 딴 거는 다 하겠는데, 곱창집은 혼자 오기가 참, 그렇더라고?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맙다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친구는 참 잘 뒀단 말이야, 히히……”     


“고맙기는, 나도 곱창 좋아해서 온 거야” 친구가 말했다. “근데, 진주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어, 음, 아니? 그건 왜?” 진주는 벌개진 얼굴로 소주잔을 채우며 되물었다.      


“되게 뭐랄까, 좀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말로 설명은 잘 못하겠는데. 우울한 기운이 주위에 막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서 물어본 거야”     


“흥, 회사원한테 무슨 일 있어봤자 뭐가 있겠어…… 크으, 갈수록 달달해지네 이거. 누가 여기 꿀에다 술 탔나?” 

     

“그만 마셔” 친구는 진주 곁에 있던 소주병을 빼앗아오며 말했다.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그래?”     


“세상에, 우리 진희씨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내가 걱정 같은 걸 할 것 같애? 웃기는 소리를 다 하구 있어, 아주” 진주는 진희에게서 소주병을 낚아채 다시 잔을 채웠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진희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을 말하는 건데? 아, 일주일 내내 디자인, 디자인…… 이름만 디자인인 잡다한 작업 다 떠맡아서 한 거? 거래처에서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몇 번이나 빵꾸를 내서 비슷한 작업 열 번은 더 한 거? 등신 같은 팀장이 속도 모르고, ‘진주님이 처음부터 제대로 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같은 얘기나 해댔던 거? 참내, 전날 밤 열시까지 야근한 사람한테 할 소리냐고, 그게. 눈치가 그 모양이니 마흔 다 되도록 장가도 못 갔지. 어휴…… 그래, 이중에 무슨 일을 말하는 건데?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응?”     


“주정도 이런 주정이 없어, 아주” 진희는 말하자마자 진주가 채워놓은 술잔을 덥석 집어 마셨다. 진주는 얼빠진 표정으로 진희의 얼굴을 쳐다봤다.     


“뭘 봐, 이 디자인 노예야” 진희가 말했다.     


“어쭈…… 회계 노예가 어디 입을 놀려?” 진주도 지지 않았다.     


한동안 별 의미 없는 농담이 오고갔다. 시계는 이제 막 열 시를 가리켰다. 밤이 무르익어 곱창집은 더 시끄러울 수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가게 문은 신촌 길거리를 향해 활짝 열려있었고, 바깥에선 선선한 밤공기와 이따금 취한 남자가 행패부리는 소리 같은 것들이 흘러들어왔다. 늘 같은 금요일의 소란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말없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을 골라가지고, 참내” 마침내 진주가 말을 꺼냈다. “겨우 들어온 회산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진짜 웃기지? 나 자소서 쓸 때 제발 붙게 해달라고, 너 불러가지고 질질 짜고 그랬었잖아”     


“맞아, 그랬었지” 진희가 술잔을 재껴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넌 전공이랑 비슷하기라도 하지. 나는, 엑셀만 몇 시간이나 만지다보면…… 사 년 동안 그 짓거리를 왜 했나 싶다니까”     


“야, 웃기지마. 회화랑 디자인은 진짜, 아무 관계도 없어. 학교에서 배운 거 하나도 안 쓴다니까? 나도 똑같애”     

“회화도 그림이고, 디자인도 그림이고. 관계 충분히 있구만, 뭘” 진희가 놀려대듯이 말했다.     


“염병하고 있네…… 꼰머들이 하는 말 그대로 하지 마. 존나 현기증나니까”     


“아니, 정말. 회화랑 디자인이 관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불어전공해서 엑셀하는 것보다는 관계가 있지 않냐?”     


“아니, 진희야, 들어봐” 진주가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난 수요일에 현대미술관에 갔다 왔거든” 

    

“아, 마지막 수요일? 그래서?”     


“거기서 꽤 유명한 놈이 전시를 했거든. 자세한 건 알 거 없고…… 아, 걔도 프랑스인이네. 하여튼 영화도 그렇고 겉멋만 존나 들었다니까, 씨발”     


“파리가고 싶다고 생난리 칠 때는 언제고?”     


“그건 별개고! 아무튼 말이야. 전시를 쭉 보는데 있지, 내가 이래봬도 미대졸업자잖니? 그런데, 진짜 이 새끼의 예술세계가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옆에 걸려있는 설명을 봐도 모르겠고, 존나 오디오까지 빌려서 귀에 꼽고 지랄을 다 했는데 뭔 개같은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이게 말이 되니? 응?” 

    

“뭐, 그 사람 예술이 너하고 안 맞았을 수도 있지”     


“그래, 그건 그럴 수 있다 치자. 근데 거기서 다른 사람들이 어쩌고 있었는지 알아? 또 문화가 있는 날이라고. 그 좁아터진 미술관에 사람이 바글바글한데, 그 사람들이 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말이지. 세상 진지한 얼굴로다가 


‘흠, 이거 참 상징적이군……’ 같은 말이나 혼자 해대고 있더란 말이야. 뿔테 낀 남고생도, 루이비통 매달고 다니는 아줌마도, 등산복에 배 불룩 튀어나온 아저씨까지, 전부 다”     


“야, 방금 설명은 참 상징적인데”     


“내가 그 전시회에서 들었던 생각이 뭔지 알아? 이 새끼 참 그림그리기 귀찮아했구나,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 실제로 좀 유명해지고 나선 예술이고 뭐고 다 귀찮아서, 지 혼자 개뻘짓하고 다닌 걸 행위예술이니 뭐니 하고 포장해놓더란 말이야. 그걸 보고 사람들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네, 현대미술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혔네, 같잖지도 않은 지랄들을 하더라고. 존나 웃기지 않아?”     


“뭐, 웃기긴 하네……” 진희는 깊게 고민하는 체 얼굴을 찌푸려보였다.     


“웃기긴 하네……가 아니라 존나 웃긴 거지, 이건. 나는 일주일 내내 그 엿같은 팀장한테 진주씨, 이거 다 좋은데 가독성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보는 사람이 한 번에 와 닿지 않으면 디자인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딴 소리나 들어가면서 같은 작업을 십수 번이나 했다고. 씨발, 그놈의 가독성이 대체 뭔데? 그 개같은 가독성이 대체 어디서 나온 개념이냐고? 이 프랑스 금수저새낀 지 좆대로 아무거나 그려놓고 해석은 보는 사람들더러 알아서 하라는 식인데. 제목도 존나 병신같이 짓는다고. 그딴 건 나도 지을 수 있어. 지금 니 초상화랑 배경을 유화로 대충 그려놓고, <늦은 밤, 홀로 식사하는 여인과 약간의 웅성거림> 이라고 짓는 식이지”     


“그게 너와 그 예술가의 차이가 아닐까? 나는 잘은 모르지만, 예술이라는 건 단순히 기술적인 것 보다는……” 

    

“이론은 나도 알아, 안다고. 다다이즘이니, 아방가르드니 하는 거. 배웠으니까 당연히 알지. 그런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이론을 적용할 거면 그 프랑스 금수저새끼든, 대한민국의 흔한 디자이너 최진주든 똑같이 적용해야할 것 아니냐고. 어떻게 그 씨발 것의 이론은 죄다 금수저에 평론가들이랑 존나 친해서 유명해진 새끼들한테만 적용이 되는 거야? 응? 왜 그러는 건데?”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네. 하긴 네임밸류를 빼고 보면 ‘이게 뭐지?’ 싶은 것도 많으니까…… 아니, 사실 대부분이지” 진희는 한쪽팔로 팔짱을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대꾸했다. “근데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일관성 아닐까? 그 예술가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예술을 끝까지 밀고 갔잖아. 그러다보니 평론가든 대중이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야. 어때?”     


“그 일관성이라는 게 어디서 나오는 지 알아?” 진희는 적이 흥분한 상태로 말하고 있었다. “수저로부터 나오는 거야. 금수저니까 그런 일관성이 나오는 거라고. 돈이 없으면 예술이 다 뭐야? 나도 엄마아빠 다 있고, 집안에 돈도 많고 그랬으면 매일 그림 그릴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그림만 맨날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 반응 같은 거 신경도 안 쓰면서 계속 할 수 있다고. 근데 현실은 어때? 몇 년 동안 쫓던 걸 포기하고 적당한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해버렸어. 왜? 그렇게라도 안 하면 굶어죽으니까! 학교랑 다르게 사회에선 열심히 한다고 장학금 같은 거 주지 않으니까!”     


“……진주야”     


“됐어, 씨발. 나는 원래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니까 그런 거겠지, 뭐, 그러니까 흙수저로 태어나 평생 흙수저인 거고. 이러다가 어떻게 결혼이나 해서, 낳은 애를 계속 키운다고 해도 흙수저로 밖에 못 키우겠지. 만약 내 딸이 ‘저는 순수예술을 하고 싶어요’ 하면 난 뭐라고 해야할까? 내가 씨발, 장기를 팔아서라도 너 돈 대줄테니까 마음대로 원하는 미술을 하렴, 이럴 수 있을까? 현실을 똑바로 보고, 적당한 곳에 취직이나 하라고 말하지 않을까? 응? 진희야……”     


“……진주, 진주야. 울지마” 진희는 테이블에 엎드려 우는 진주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내가 얘기했던 거 기억나? 진주 너는 정말 흙속의 진주같은 존재라고. 너는 너조차 모르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존재고,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니 가치를 인정받을 거라고. 나는 니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어. 누가 뭐라고 하든지, 진심으로 난 그렇게 생각해”     


“응, 근데 진희야……” 진주가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말 진주여도 있지…… 죽을 때까지 흙에 파묻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평생 흙바닥 밑에, 깊숙한 곳에 잠겨서 빛 한 번 못보고 그대로 썩어 가버리면 누가 알아주겠어?”     


“적어도 나는 알지” 진희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게 뭐야? 넌 내 친구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할 말이 없네. 우리 불쌍한 진주. 흙에 파묻혀가지고, 지가 진주인줄도 모르고……”     


“히히…… 진희야, 내가 그래서 고흐를 좋아하는 거야. 적어도 고흐는 죽을 때까지 흙속에 있었거든……”     


“물론 죽고 나선 빛을 봤지만”     


“어떻게 보면 사후에 운이 따랐던 거야. 본인을 묻어놨던 흙이 어떻게 걷어내졌으니까. 근데 또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죽고 나서도 운이 안 따라서…… 우주가 끝장날 때까지 아무도 못 찾는 진주들이”     


“넌 안 그럴 거야”     


“……”     


진주는 그새 잠들어있었다. 진희 역시 적잖이 취한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진주를 길가로 끌어내 택시를 태우는 데는 성공했다. 매번 이런 식이니 진희로서는 색다를 것도 없었다. 택시는 거나하게 취한 진주와 진희를 태운 채 뻥 뚫린 강변북로를 가로질렀다.      


다만 진주는 그날따라 취기가 무척 심했다. 집 현관문 앞까지 잠자코 따라가던 진주는, 뒤늦게 ‘벌써 집에 들어가기 싫다’며 고집을 부렸다. 진희는 가까스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이미 바닥에 펼쳐져있는 매트리스며 이불더미에 진주를 던져놓았다. 진주는 그대로 드러누운 채 혼잣말을 지껄이다가 얼마지 않아 잠들었다. 네 살짜리 딸아이는 그 와중에도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해님아, 엄마가 많이 힘든가봐. 네가 이해해줘. 알았지?”     


진희는 방모서리에 퍼질러있는 담요를 집어 들어, 곤히 잠들어있는 모녀에게 덮어준 다음 조용히 빠져나왔다. 밤이 깊어 동네는 사방이 조용했고, 깜깜한 고시촌 골목너머로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진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었다.      


<인어공주>,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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