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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27. 2019

습작

쉰두번째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시험에 합격하고 말았다. 이젠 꼼짝없이 공무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국가에서 주는 녹봉을 받을 것이다. 정년이 될 때까지 적당한 휴가며 복리후생을 누릴 것이다. 난 문득 이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표정이 왜 그래? 기분이 좋지 않아? 합격했는데…” 수정이가 내 얼굴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연히 기쁘지. 합격했는데… 드디어 이 생활도 끝이 났나 싶어서. 그냥…”     


 “하하, 그럴 수 있지. 가끔 컵밥이나 먹으러 와. 좀 멀어서 힘든가, 아무래도?”     


 수정이는 이불안에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담배를 꼬나물었다. 담배를 물고 있으면 대개는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가끔은 내가 담배를 피우는 이유라는 것이, 그저 스스로의 침묵을 가장 쉽게 합리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오래된 자취방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회색 연기 틈으로 낡은 책장이 보였다. 내가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기본옵션으로 있던 책장이었다. 삼 년간 사놓은 두꺼운 교재며 사전이며 공책들이 무질서하게 꽂혀있었다. 난 불현듯 슬픈 표정으로 책방에 교재를 가져다 팔던, 지난해까지 나와 가장 친했던 선배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선배는 합격했는데 기쁘지도 않느냐, 같은.     


 “그러고 보니 김교수님이 좋아하시겠다. 너 많이 챙겨주셨었잖아. 승훈이는 금방 합격할 거라고 하시더니…… 신통방통하네, 참”     


 “안 씻어?” 나는 느닷없이 물었다. 더 이상 수정이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몰라도 그랬다.     


 "아, 맞아.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 그래도 밑에 물이 너무 많이 나왔거든? 너랑 하고 나면 항상 이래. 아하하..." 수정이는 짐짓 유쾌하다는 양 말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곧 벽 아래 수도관에 흐르는 소리, 문 너머 수정이의 맨몸이며 화장실 타일에 물방울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수정이가 떠나고 어질러진 침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섯 평 남짓한 자취방, 그 좁아터진 싱글사이즈 침대에서 지난 삼년간 얼마나 많은 여자와 몸을 섞어 왔는지를 생각했다. 줄잡아도 스무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던 때도 있었지만 열 명이 넘어갈 즈음부터는 그만둬버렸다. 오늘 외운 단어도 내일이면 잊어버리는 마당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하릴없이 노량진에 들어와서도 나는 여자와의 관계에 부단한 공을 들였다.    

  

 “사 년 동안 공부하면서 여자끼고 합격하는 놈 못 봤다. 정신 차리고 공부해. 누구 꼬실 생각 말고”     


 처음 들어간 학원에서 가장 먼저 친해진 형이었다. 형의 경고가 무색하게 나는 이미 몇 명의 여자들을 자빠뜨린 뒤였는데, 그렇다고 딱히 멈출 생각은 없었다. 경고를 무시했다거나 가치 없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형만큼 합격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정작 이 말을 한 형은 그 해 시험에 떨어진 직후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더니 몇 달 안 돼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왔다. 근처 여의도에서 식을 올린다는 모양이었지만 난 가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수정이는 계속해서 샤워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콧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같이 자던 남자가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면 제법 생각이 복잡할 법도 한데, 수정이에게선 영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러 숨기는 눈치도 아니었다. 애초에 감정을 능숙하게 숨길 수 있는 종류의 위인도 못됐다.      


 수정이는 천박한 여자였다. 학원에는 항상 삼십분 늦게 도착했고, 그런 주제에 화장이며 옷차림은 같은 강의실의 남자들을 매혹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채였다. 걸머진 가방에선 책 냄새 대신 향수 냄새가 났다. 볼펜 두 자루에 불과한 필기구에 비해 화장품은 갖가지 색의 틴트와 컨실러까지 들고 다녔다. 그런 천박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내 속에선 견딜 수 없을만큼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 미래에 대해 그 어떤 진지한 걱정도 없는, 오직 순간의 쾌락과 코앞의 남성에 잠겨 굴복하는, 순수하게 천박하며 순수하게 어리석은 수정에게 매료되기를 수백 번은 반복해왔다.      


수정이는 자신은 고작 이러려고 노량진에 온 게 아니라는 것을, 나름의 원대한 꿈과 목표를 갖고 왔다는 것을, 내 방에 와 옷을 벗고 나와 관계한 게 그저 하룻밤의 일탈 또는 실수라는 것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 말하던 여자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이런 싸구려 변명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여자들은 대개 섹스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때문에 나는 같은 학원에서 몇 번이나 반을 옮겨야 했고, 종국에는 학원까지 적을 옮겨야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다시 떠올릴 때마다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 합격통지를 받고나보니 꽤 괜찮은 얘깃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식으로 공무원이 되고 나면 이런 해프닝도 잦아들 것이고, 그렇게 이골이 났던 상황마저 그리워지고 몰래 추억하게 되는 시기가 올 것이었다.     


 때마침 화장실에서는 샤워 소리가 잦아들었다. 수정이는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는 모양이었다. 나는 도연히 쓸쓸해졌다. 이러다 나이가 적당히 나이가 차면 결혼이나 하겠지. 심심한 마당에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겠지. 갈 곳 없이 자식 교육에 목메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보다 어린 애인을 몰래 만나다 걸려 별거라도 하겠지. 그럼 난 매일같이 똑같은 일을 하고, 매달 같은 금액의 양육비를 전처에게 부쳐주고, 가끔 자식들을 만나 별 것도 아닌 얘기를 나누며 눈물을 쥐어짜고, 그러다 정년이 되면 은퇴해서 연금이나 받으며 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느닷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보내온 시간이 고작 그 정도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존재했다니. 명문대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목 놓아 울었던 그때, 높은 학점을 받아 장학금을 탔을 때의 기쁨과, 이젠 아득해져버린 첫 사랑의 추억이며 군대에서의 개삽질, 이름 모를 여자들과의 소모적 정사 뒤 새벽 고시촌을 누비며 불 켜진 포차를 찾곤 하던 시간들이 모두 그 지루한 결말을 위한 과정이었다는 걸, 난 도저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어쩌면 나는 노량진의 꿉꿉한 공기에, 역 인근을 몽땅 집어삼키고 있는 젊은이들의 패배감에, 합격을 향한 기대와 정서불안에, 그 좁아터진 도시와 소소하게 일탈하는 삶에 적이 만족하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그래서 노교수의 따분한 강의며,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의 샴푸냄새며, 그 머리카락과 보드라운 살결에 파묻혀 쾌락에 잠겨드는 것이며, 다시금 수정이에게로 돌아와 삶에 대한 욕망을 재충전하는 일까지를 전부 일종의 매트릭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확인한들 합격자 명단에는 내 수험번호가 그대로 있었고, 난 수정이와 함께 어디든 바다가 있는 곳으로 떠나버리는 상상을 했다. 바닷가 해변을 거닐면서, 늘 그랬듯 터무니없는 대화나 주고받는 모습을 그려봤다. 그래. 수정이는 공허한 표정으로 내게 “어때, 넌 공무원이 적성에 맞을 것 같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물을 것이고,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체 하다가 대답하겠지.


 “글쎄, 난 일단 합격한 뒤에 생각하려고.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도 없어. 너도 그렇잖아? 하하……”     


<닫힌 결말>, 2019. 6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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