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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26. 2019

습작

쉰한번째


“저, 손님, 이 카드 결제가 안 되는데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젊은 여자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다시 결제 단말기에 갖다댔다. 삐-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결제에 실패했다는 문구가 나타났다.     


“이게 왜 이러지, 잔고가 부족할 리 없는데”     


“시간 때문인 거 같은데...”     


택시기사가 앞좌석에 붙은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자시계가 밤 열두 시 십칠 분을 표시했다.     


“아, 전산작업....”     


“이거 기다리려면 꽤 걸릴 것 같은데... 현금 없어요?”     


“잠시만요, 아마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가 황급히 지갑을 열었다. 지갑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있었다. 미터기에 표시된 요금은 오천오백이십 원. 열두 시가 넘어 할증요금이 적용됐다. 여자는 속으로, 잔돈이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돈을 꺼냈다.     


“고맙습니다. 어디보자, 지금 요금이... 오천, 육백, 사십 원”     


그새 미터기가 한 번을 더 돌았다. 택시기사는 느긋하게 잔돈을 챙겼다. 여자는 입술을 포개 살짝 물었다.   

  

“사천삼백육십 원이네요, 사천 원은 여기 있고, 삼백, 육십 원, 자, 됐죠?”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요”     


여자는 양 손으로 쏟아지는 잔돈을 받고 택시에서 내렸다. 통굽 구두가 아스팔트에 닿으면서 작고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꽃담황토색의 택시는 유유히 움직이다가, 이윽고 노란색 헤드라이트로 가로등 불빛을 헤집으며 사라졌다.     


‘추워… 얼른 들어가야겠다’     


여자는 코트 끝을 허리까지 잡아 올리며 생각했다. 지난 며칠 사이에 날이 확 추워졌다. 오늘 아침 급하게 꺼내 입은 코트에선 여전히 옷장냄새가 났다. 옷장 속의 다른 옷들도 비슷할 것이다. 여자는 다가오는 토요일에는 코트와 패딩 그리고 자켓들을 꼭 세탁소에 맡겨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천 원 짜리 네 장을 추려 지갑에 넣고 걸었다. 집을 향해 걸어가는 주머니 속에서 이따금 동전 부딪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여튼, 카드 결제 할 때마다 전산점검이래, 은행 직원들은 뭘 하길래 전산 작업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십 분 정도로 끝내면 좀 좋냐구, 괜히 현금까지 쓰고, 십 원짜리 동전은 쓸데도 없잖아’     


플라스틱 전등이 원룸 건물들 사이를 뜨문뜨문 밝히고 있었다. 여자는 가로등이 뿜어내는 오렌지색에 젖었다 말랐다하며 계속 걸었다. 통굽 소리와 동전 소리가 번갈아 났다. 여자는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슬리는 소리의 근원을 집어 꺼냈다. 오십 원짜리 동전 하나와 십 원짜리 동전 하나였다.  

   

‘요즘 육십 원이면 어디 쓸 데도 없지 뭐, 오천 번 모으면 한 달 월세쯤 될 텐데, 난 그전에 죽을 거야’     


이른 새벽의 학원과 오밤중의 집에서는 도무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집을 향하는 길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곤 했다. 이번 달의 월세, 지난달의 학원비, 꾸준히 빠져나가는 후불교통카드 요금, 가끔 너무 지쳐서 쓰는 택시비, 삼각김밥과 컵라면들의 가격표들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여자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손 안에 들어있던 동전을 멀리 던져버렸다. 육십 원어치의 동전들은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골목 끄트머리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여자는 더 이상 동전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만족스러웠지만, 웬일인지 뭔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기분의 정체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가 돼서야 떠올랐다.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시절, 지금보다 작았던 소녀는 십 원짜리 동전 다섯개 혹은 오십 원짜리 하나를 들고, 고소한 냄새 풍기는 길가 노점을 쫄래쫄래 찾아가 땅콩빵 한 개를 사먹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 겨우 오십 원치 사는 데도 짜증 한 번 안 내셨지... 여자는 이내 깊이 잠들었다.     


이튿날 새벽, 여자가 전보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겨울이 바싹 다가와 해는 짧아졌고,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풍경이 익숙해졌다. 바삐 걸어가던 여자는 어떤 골목을 지나쳤다. 어젯밤 동전을 던져버렸던 골목이었다. 이 년 째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그 골목으로는 한 번도 걸어간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 골목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여자는 동전을 너무 먼 곳에 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늘 다니던 길을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제보다 더 추운 날씨였다.     


<거스름>, 2018. 10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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