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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l 15. 2019

습작

예순두번째


 “저놈 저거,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뭔가 일을 낼 것 같더라니! 쯧쯧……” 그 사건에 대해 할머니가 꺼낸 첫 마디는 이랬습니다. 그때 저는 할머니 곁에 서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죠. 하기야 겨우 일곱 살 된 꼬마아이에게 환멸이라는 감정까지는 너무 어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막내손자인 제게 한사코 좋은 것만 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어요. 당시 물리적인 성장을 모두 마친 형과 누나는 방에 들어가 나오는 법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십 수 년 만에 태어난 손자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을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같이 저를 업고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걷는 법을 느리게 배웠습니다. 저는 다섯 살이 돼서, 그래서 몸무게가 제법 나가게 될 때까지 포대기 속에서 둥둥 떠다녔죠. 하다못해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할머니는 늘 당신 무릎에 절 앉혀놓곤, 밥이며 반찬을 직접 손으로 싸서 먹여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젓가락질을 배울 필요가 없었고, 생선가시를 발라먹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할머니는 제게 절대적으로 선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예의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죠.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적어도 그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는 건 일곱 살짜리 아이로서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실로폰 연주를 했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집에 계신 할머니며 교복을 입은 누나, 그리고 밤늦게 가게에서 돌아올 아빠와 엄마에게 ‘반짝반짝 작은별’을 들려줄 생각으로 몹시 들떠있었죠.     


 하지만 제가 집에 돌아갔을 때, 이미 모든 일은 벌어져 봉합할 수 없는 상태가 돼있었습니다. 집안에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복을 입은 커다란 경찰 아저씨 두 명이 와있었고, 웬일인지 지금쯤 가게에 있어야할 부모님도 거기 있었습니다. 경찰과 부모님은 얼마간 이야기를 하더니, 안 쪽 방에 들어가 형에게 수갑을 채운 다음 현관 밖으로 함께 걸어 나갔습니다.     


 한편 제가 가장 이상하게 여긴 것은 누나였습니다. 이 일련의 시간동안 누나는 거실 한 쪽 구석에 엎드려 있었거든요. 그리고 얼마지 않아 부모님을 따라 밖으로 나갔습니다. 경찰서에 조서를 작성하러 갔던 거였죠. 그와 중에 할머니는 누나가 나갈 채비를 하던 현관 앞에 서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겁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그때 막 군대에 다녀온 스물네 살 형이, 수험공부를 하던 열아홉 살 누나를 강간했다는 사실은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다만 제가 더 놀랐던 것은 경찰에 체포된 그 날 처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는 것, 그동안 할머니가 집안에 늘 계셨다는 것, 그리고 견디다 못해 신고한 것이 피해자였던 누나 본인이라는 것이었어요.  

   

 교도소에 송치된 형은 3년 뒤 출소했습니다. 그 이후 부모님은 이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할머니는 이따금 혼잣말처럼 ‘하필 그런 일이 벌어져가지고’ 같이 운을 떼기 시작해서 아무렇게나 말한 뒤 마무리 짓곤 했는데, 가만히 듣다보면 ‘어떻게 가족끼리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 보다는 ‘혈기왕성한 나이에 그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건데 운 나쁘게 걸려버렸다’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누나는 방으로 달려 들어가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고,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또 다시 혀를 차셨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할머니는 오래 앓던 지병으로 임종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집 근처에 있는 한 종합병원에서,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죠. 다행히도 할머니는 죽기 직전 몇 마디 남길 만큼의 기력은 남아있으셨는데, 그 대상은 놀랍게도 별달리 슬퍼보이지도 않던 누나였습니다.     


“은설아, 이제 그만 용서하거라. 용서해……”     


 이 말을 듣고 저는 기뻤습니다.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기뻤어요. 이제 막 죽음의 순간에 임박한 할머니가, 비로소 자신의 죄를 마주하고 누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줄로만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검게 짙어가는 누나의 표정, 그런 누나와 멀뚱히 서있던 형을 번갈아보는 할머니의 눈짓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는 당신 최후의 순간, ‘네 오빠가 한 짓을 용서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죽음으로 도망쳐버렸던 겁니다. 그 날 우리 가족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각기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돌아가 잠들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말도 들은 적 없다는 듯이.     


 누나는 그 날부터 일주일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도, 발인에도 가지 않았죠.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밥도 먹지 않았고,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어요. 저는 저러다 누나가 죽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 가운데 그 누구도 누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할머니의 비겁한 유언을 감당하는 것이 그 누구도 아닌 누나 혼자여야 한다는 것처럼요.     


 그래도 그 때 누군가는 말했어야 했어요. 야위어 죽어가는 누나에게 다가가서, 그 무엇도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줘야 했어요. 누나에게 그 어떤 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으며, 그 어떤 사건이나 말도 누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는 걸 이야기해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죠.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모든 걸 알 순 없었을 것입니다. 한 달 뒤 누나가 자고 있던 형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십칠 층 아파트 베란다로 뛰어내릴 거라는 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저는 뭐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그 때 어떤 수라도 써서 죽을 각오로 막아냈어야 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은 그렇게 한 사람들에게나 겨우 허락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아서 최선을 다했는데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처럼요.     


 제가 할머니를 찾아오는 일은 이제 두 번 다시없을 겁니다. 저는 스스로가 미운만큼이나 할머니가 밉거든요.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는 않을 겁니다. 부모님께는 이제 제가 마지막 남은 자식이니까요. 후천적 외동아들이라고나 할까요. 어쩜 할머니는 이렇게 될 줄도 다 알고 계셨을까요?     


 아무튼, 저는 뒤늦게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제가 할머니를 통해 제대로 배운 것이라곤 그 뿐이니까요. 부디 제가 지은 묘비명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2019. 7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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