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는 멀어서 선뜻 가기 어려운 곳이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직접 보면서 느껴보고 싶었다. 자유여행을 선호하지만, 예약해야 할 항공편과 숙소가 너무 많고,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 변수에 대비해야 했으며, 치안 문제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결국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여행하면서 패키지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한 현지 가이드였다. 그는 남미의 역사와 문화를 30여 년 동안 공부하며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마치 논문 수준으로 체계적이면서도 적절한 유머와 예시를 곁들여 전혀 지루하지 않게 풀어냈다.
잉카인들의 돌 문화는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시멘트나 접착제를 전혀 쓰지 않고, 돌을 정교하게 깎아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쌓아 올린 석조 기술은 지진에도 끄떡없었다. 스페인 식민 시기, 진도 7의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스페인 식 건물들은 무너져 내렸지만, 잉카의 석축은 멀쩡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먹고사는 문제도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감자와 퀴노아의 원산지답게 감자에서 전분을 추출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했고, 집 안에서는 기니피그를 키워 필요할 때마다 잡아먹으며 단백질을 보충했다. 이런 지혜와 기술을 가진 문명이었지만, 결국 소수의 스페인 군대 앞에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번에 방문한 나라들은 모두 전쟁과 연결되어 있었다. 세계 최대 폭포인 이과수는 원래 파라과이 영토였으나, 전쟁을 통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빼앗겼다고 한다.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해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구를 잃고 내륙 국가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볼리비아 해군은 호수에서 훈련을 한다.
자연과 문화를 즐기러 떠난 여행에서 엉뚱하게도, 나는 ‘국방의 중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것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면 오래갈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힘, 다시 말해 쉽게 침략당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한 힘이 필요하다. 지금도 세상은 약하면 당하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러 남미 국가를 여행하면서 “우리나라의 몇 배, 몇십 배”라는 표현을 수없이 들었다. 땅만 넓은 것이 아니라 지하자원도, 관광자원도 풍부했다. 그런데도 가난했다. 볼리비아의 현지 가이드는 대학을 졸업한, 그 나라에서는 ‘지식인’에 속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국의 만성적인 가난이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예전에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전문가와 함께 일했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 역시 부패가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작은 나라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며 여기까지 온 우리나라의 모습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국력이란 게 숫자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공항에 적힌 환영 문구나 항공사의 언어 선택에서도 스며 나온다는 걸 알았다. 멕시코 항공사의 언어 선택 항목에 7개 국어 중 하나로 한국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뿌듯해졌다.
나는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역사와 문화보다 압도적인 자연에 더 큰 감동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남미 여행은 달랐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로 불리는 '우유니'의 풍경보다, 잉카인들의 놀라운 돌 문화와 지금까지도 가난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정치 부패가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부패는 나라를 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약해진 나라는 외부의 침략과 전쟁이라는 위험 앞에 더 쉽게 노출된다. 부패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물리학의 중력처럼, 힘은 질량과 에너지가 모여 만들어진다. 개인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해 보이지만, 그 힘이 모이면 생각보다 훨씬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장거리 여행이어서인지 몸은 많이 지쳤다. 그래서 앞으로는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휴식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가까운 곳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남미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나라와 힘, 그리고 부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