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스럽게 생겼는데 진취적인가봐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밝아요?”
“그래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인스타에서 보면 또 엄청 진지해.” 옆 사람이 거든다.
“생각없어보였는데 생각이 깊어.”
8년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생각이 없어보인다니? 알고 보니 밝게 잘 웃는 모습을 ‘생각 없어 보인다’와 동일시한 것이었다. 그게 상처로 남아 생각이 깊어보이는 외면이란 뭘까,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 걸까 고민했다.
어젯밤 친구와 통화하다가 말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왜이렇게 밝녜.”
“그래?”
“그 사람들은 모르잖아. 내가 얼마나 불만과 불안과 불편으로 가득찬 사람인지, 작은 자극에도 쉽게 깨지고 바스러지는 사람인지.”
“알기 쉽지 않지.”
오랜 시간이 쌓일수록,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사상과 감정을 덜 검열하며 대화하는 사람일수록, 섣불리 밝음을 대표 키워드로 꺼내지 않는다. “너 좀 이상하긴 해.” 라는 말로 대신한다. 우리는 서로를 단면이 아닌 입체로 인식한다.
누군가 “당신 이런 사람이죠?”라며 판단할 때, 이제는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조용히 경계하며 어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관찰하기를 택한다. 남들은 모르지만 혼자 낯가리는 기간이다. 허허실실하는 동안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내가 얼마나 안전할지, 무엇이 자유롭고 또 제한적일지 파악한다. 스스로를 공간에 비유하며 ‘대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방문은 쉽게 열지 않는 집’ 이라 말하는 이유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한다는 강박은 내려놓았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보여주고 싶은 면을 보여준다. 나도 너를 다 알지 못하듯, 너도 나를 다 알 수 없다.
입체적인 대화를 선호하나 단면적인 시선이 주는 단순함이 그리워질 때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연초에 나간 소셜 모임에서는 첫 순서가 ‘첫 인상 키워드 토크’였다. 각자 종이를 하나씩 뽑아 테이블에서 가장 어울리는 사람에게 키워드를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그날 받은 키워드는 내가 요즘 어떻게 포장되어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준다. 그들이 본 단면은 내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돌아본다. 단면은 단면대로 입체는 입체대로 존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