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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말은 흰 쌀 밥과 익은 김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

by 투오아

외할머니. 이 말에서 느껴지는 아득함, 그리움, 죄송한 마음. 아마도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할머니는 언제나 내게 큰 슬픔으로 남아있다. 요즘도 아들놈들이 할머니와의 기억을 물을 때면 돌아가신 지 거의 삼십 년 정도 되신 당신이 생각이 나 아직도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내가 현재의 생명과학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어떻게 하면 할머니의 병을 낫게 해 드릴 수 있을까에서 시작되었다. 파킨슨병으로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던 할머니는 길에서 몇 번 넘어지기도 하시고 또 앉아서 도마질을 하실 때도 당신의 칼을 누르는 힘을 못 이기시고는 뒤로 그대로 누워버리시기도 하셨다. 그러다 결국 아예 누워만 지내시다가 몇 년 뒤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 6.25 전란 속에서 외할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가 전쟁터로 가시게 되었고 거기서 돌아가셨다. 그때 우리 어머니의 나이가 고작 3살 이셨다고 한다. 그렇게 홀어머니 아래에서 컸던 우리 어머니는 같은 마을 오빠인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던 때와 연예 하실 때의 두 분의 기억이 달라 (서로 상대방이 더 관심 있었다고 기억하신다) 가끔 혼자 생각하며 웃곤 한다.


외할머니는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을 대신하여 우리 형제들을 키워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에 할머니 손가락의 쌍가락지를 보고 여쭈어봤던 적이 있다.


할머니는 왜 반지를 안 빼?

응 오랫동안 끼고 있었더니 이제 살이랑 합쳐져서 빠지지 않아야


할머니 돌아가시고도 한 참 뒤인 내가 결혼할 때서야 쌍가락지가 전통 결혼 패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 손가락의 쌍가락지가 가진 무게가 그제야 내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았다.


나는 어린 시절 참 잘 체하였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내 배를 쓸어주시며 아픈 것은 전부 나를 다오 우리 손주 얼른 낫게 하시면서 정말 밤새 배를 쓸어 주셨는데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도 애를 낳고 아이들이 아픈 것을 경험하면서야 제대로 알았다. 이뻐 죽겠는 자식이라도 밤새 배를 쓸어 준다는 것은 본능을 넘어가는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살이 되어버린 쌍가락지를 한 할머니는 내가 아플 때면 죽을 해 주셨는데 쌀 싣는 통에 쌀을 넣으시고는 맨손으로 불린 쌀을 빡빡 씻으셨다. 그래서 할머니께 물어보았었다.


할머니 왜 이렇게 쌀을 빡빡 문질러?

응 그래야 쌀이 갈려서 소화가 잘 되는 것이여


할머니께서는 내가 배가 아플까 봐 당신의 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임을 그래서 손이 그렇게 거치셨던 것임을 할머니께서 파킨슨병으로 쓰러지시고 내가 죽을 끓여드리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도저히 할머니처럼 쌀을 빡빡 문질어 갈 수가 없었다. 손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끓이기만 하면 되는 죽 재료들을 슈퍼에서 사 와서 해드렸는데 해 드리면서도 참 많이 부족하여 죄송했었다.


그렇게 배 아픈 게 거의 다 나을 때쯤이면 할머니는 물에 흰쌀밥을 말아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할머니의 익은 김치를 꺼내다가 작게 손으로 찢어서 밥 한 숟가락에 올려서 주시곤 하였는데 그때의 그 감칠맛은 잊히지가 앉는다.


다른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흰쌀밥을 하시고 물에 만 뒤에 익은 김치를 손으로 찢어 주시는 것인데 아직까지 가 제일 좋아하는 밥과 반찬의 조화이다. 한국인 밥상의 가장 기본인 김치와 쌀밥. 그리고 국의 가장 기본 형태인 물로만 이루어져 있는 단출한 밥상은 아파서 잘 먹지 못했던 나에게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서 감칠맛 나게 밥을 먹은 뒤로는 꼭 병이 다 낫고는 했었다.


할머니께서 몸이 매우 불편해지시고 하지만 아직은 앉아서 계실 정도는 되었을 무렵 할머니의 모든 유산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게는 대부분이 다소 어려운 과제였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김치 담는 법 등은 배우지 못하고 현재 나에게 남은 것은 할머니께 배운 다림질 하는 법뿐이다.


그래도 다림질은 나름대로 익히어 군대 2년 2개월 동안 다림질은 내가 다하고 후임들 다림질도 내가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집에서 가능하면 다림질을 하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께서 셔츠의 이음새를 특히 잘 다려야 옷이 다려진 느낌이 난다고 하셨던 것과 바지는 먼저 밑을 다리고 그 위에 반대 다리통을 포개어 다린다는 등 나에게 가르쳐 주시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제 외할머니의 모습을 우리 어머니와 장모님에게서 본다. 나도 누나네도 다 맞벌이이다 보니 장모님도 우리 어머니도 외할머니 노릇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다. 고생스러움에도 손주들을 끔찍이도 사랑해주시는 그분들을 보며 나에게 감칠맛 가득했던 물에 만 흰 쌀 밥과 익은 김치와 같은 기억이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에게도 쌓이고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리고 이 땅의 수많은 전란 속에서 우리네를 먹이고 입혔던 어머니들과 할머니의 손에서 전해지던 마법 같은 음식들이 끊기지 않고 계속 전해져 내려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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