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없는 아이들의 책장

by 이달


스스로 책을 고를 권리,

아이들에게 돌려주세요!




지난해 봄, 전라도 광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운명인지, 그날 나는 세 집을 연거푸 방문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서로 다른 동네에 살며, 아이들의 연령이 다르고 알고 지내지 않는 사이의 세 집 책장의 싱크로율이 90프로 남짓이라는 것. 그것도 한 출판사 책이 서가의 90% 이상을 채우고 시리즈도 거의 일치했다. 전집 족보라는 게 있어서, 비슷비슷한 전집류로 채워진 개성 없는 책장은 흔히 봐왔지만, 이처럼 한 출판사 전집으로 도배한 집을 하루 사이 세 곳이나 볼 줄이야.

마지막 집에서 그 놀라운 우연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A출판사의 영향력이 광주 지역에서 상당히 높으며, 정기적으로 유명 강사를 초빙해 부모 교육 강좌를 꾸준히 해왔다는 것. 나머지 두 집도 A출판사의 부모 교육 특강을 들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추측 건데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후 추가적으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광주 지역 부모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무적의 A 출판사는 아파트 단지 안에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작은 도서관까지 운영하고 있다 했다. 포장은 작은 도서관이지만, 내용물은 총판이 아닐까 싶다.

"일하느라 바빠서 애들 교육에 신경을 못 써요. 그래도 주말에 짬을 내서 그런 강좌라도 듣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전국에서 유명한 선생님들이 오셔서 강의를 해주시는데, 한두 번 울고 온 게 아니에요. 크게 깨우치고 아무리 바빠도 애들한테 최소한의 부모 노릇은 하려고 애쓰다 보니, 책장에 책이 좀 많아졌어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 볼 수 있는 책들이고, 애도 셋이라서. 셋이 보니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애들이 잘 안 읽어서 속이 탈 뿐이죠."

너무도 열심히 사는 부부였다. 아이들은 책이 아니더라도 저희들끼리 재미있게 놀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원에는 아이들의 옷이 봄볕에 바싹하게 말라 빨래에서는 햇볕 냄새가 나는 집이었다. 저녁이면 작은 도서관처럼 꾸며진 거실 가운데 벽에 아빠가 선정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부이기에, 나는 책장이 조금 더 슬펐다.



광주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꽤 많은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화두로 삼았다. 한 때 나도 전집을 만들었으며, 지금도 캐이블 방송을 켜면 십수 년 전에 내가 만든 명작 읽기 시리즈 100권짜리가 600만 부나 팔렸다는 카피와 함께, 세계 여러 나라와 저작권 계약을 맺었다는 설명과 함께 판매되고 있으며,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면 한 때 내가 만든 전집들이 단행본으로 바코드를 갈아 여전히 판매가 되고 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책을 만들어냈던 기획자가 또 기획사의 사장이었던 내가 이따위 이야기를 꺼내면 몇 분은 잠깐 나 좀 보자고 부르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부에서 콩세알 도서관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만난 뒤로,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 엄마들이 좋아하는 책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이 만화책만 고르고 수준이 떨어지는 책을 고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수없이 확인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좋은 책을 고를 능력이 있다. 그렇게 책을 골라 읽은 아이들은, 독서력도 있고 책 보는 안목도 갖추기 마련이다.

콩세알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책을 사랑하는 숱한 순간들을 목격하고야 만 나는 그 뒤로 더 이상, 어떤 책을 읽으라고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일을 멈췄으며 더는 '필독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엄마들 입맛에만 맞춘 책을 쓰거나 만드는 일을 멈추게 되었다. 진심을 담아 썼다고 하지만, 엄마들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만든 나의 책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말'이 버젓이 오늘도 팔리고 있음에도. 이 책을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때, 그 순간 나와 그 아이 사이에 홍실이 맺어진다고 느낀다. 그런 홍실을 맺기 위해, 내가 그 책을 들고 아이들 앞에서 파란 고양이 피터 모자를 쓰고 스스로를 책 읽어주는 고양이 아줌마라고 말하며 한 없이 애교를 떨더라도 말이다. 그게 옳은 길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고를 수 있게, 책을 들고나가 읽어주고 알리는 일.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강제로 '읽어라'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시대보다 책장에 책이 풍요로운 시대가 되었음에도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책을 찾지 못해 책장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바로, 아이들에게 책장을 돌려줘의 시작이다.




어른들의 서가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한 사람이 읽어온 책은 그 사람 고유의 무늬를 새긴다. 그것이 바로 인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책은, 실물 책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교류와 생각의 줄기가 뻗어나가는 것도 사람에게 무늬를 새긴다.

때문에 나는 누군가를 인터뷰하러 방문을 하거나, 한 사람의 초대로 집을 방문하게 되면 서가에서 책의 흔적을 읽고는 한다. 책은 어김없이 그 사람이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이며, 어떤 책들을 깊게 읽었고 어떤 책들을 사놓고 모아놓은 채 읽지 못하고 있는지를 속삭여준다. 이렇게 한번 쓱 바라본 서가의 속삭임을 듣고 초대한 분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제법 일치한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다룬 책이 2016년 7월 카모마일북스에서 출간된 임수식 선생의 사진집 '책가도'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민화로 즐겨 그려졌던 책가도에는 한 선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니까 글을 읽던 방에 놓여 있던 책장에는, 그 책장 주인이 아끼는 물건들이 하나둘 책과 함께 쌓이며 주인의 삶을 넌지시 보여준다. 내가 그런 재미로 즐겨 바라보기만 했던 책장을, 임수식 선생은 수년에 걸쳐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우리는 이 책장의 주인이 어떤 책을 즐겨 읽으며, 어떤 습성을 가졌는지 프로파일러처럼 읽어나가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아이들 책장에서도 가능할까.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여러 어머니들 앞에서 꺼낼 수 있게 해 준, 과천 타샤의 책방 김현정 대표는 지난해 여름 처음 만났다. 봄부터 알았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가 나의 이상한 광주 여행기를 듣고 과감하게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렇게 시작된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은, 마을 공동체 사업이 되어 얼마 전까지 여러 집을 다니며 직접 아이들의 책장을 분석할 기회도 얻었다.

과천은 환경이 특수했지만, 책장을 통해 아이들에 대한 힌트를 찾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 과정으로 내가 얹고 싶었던 것은 단 몇 명의 어린이만이라도 스스로 책을 골라 즐겁게 읽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어머니들이 나에게 도서 목록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나는 일명 셀프 북큐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그 바통을 엄마들에게, 아이들에게 넘겼다. 다이어리 형태로 만든 셀프 북큐레이션 일지는 엄마들을 서점으로 보내고, 도서관으로 보냈고 아이들에게 도서구입비를 지불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이미 있는 책 중에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책장을 꾸미게 했다.

이 과정을 마친 어머니들 중에 "책장을 정리하려고 책을 거실에 벌려 놓은 순간, 아이들이 책을 읽었다."거나 "아이들의 책장에 내 욕심이 담긴 것을 보았다"거나 "아이들이 고른 책을 보고서야, 아이들이 보였다."거나 하는 고백을 해주셨다.


아이들에게 책장을 돌려줘!


어쩌면 나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을지 모르지만, 최근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고르게 하라는 아이들의 책 고를 권리를 논하는 책들이 속속 발견되어 반갑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도 단 한 사람이,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힐까 고민하기에 앞서, 우리 아이는 어떤 책을 읽고 싶어 할까를 고민하며 아이에게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게 기회를 허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