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아도 괜찮아

프로젝트 : 아이들에게 책장을 돌려줘02

by 이달


<소설처럼>의 다니엘 페나크는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로 제일 처음 '책을 읽지 않을 권리'를 꼽는다. 그는 '무릇 준수되어야 할 모든 권리장전이 그렇듯이, 독서에 관한 권리도 맨 먼저 그것을 행사하지 않을 권리부터-여기서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권리장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엉큼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다. 연탄불을 갈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동생 운동화를 빨거나 방을 닦으라고 하거나 걸레를 빨라고는 했지만 '책을 읽으라' 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다. 아니 읽을 책이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첫 책은 교과서였다. 글자를 읽는 것은 황홀했다. 한 단어도 버릴 것이 없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나의 아버지, 태극기, 우리 태극기. 그렇게 한글을 배우던 문장들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시어였다. 오래도록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한 단어, 한 문장. 더없이 소중했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언어가 책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가난한 아이가 무지하고 무심한 부모를 만나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무지할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가난 덕분에 세상을 책처럼 읽어낼 능력을 갖출 것을 믿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 뛰어날 것이고 어떤 아이는 시간을 읽는데 뛰어날 것이고 어떤 아이는 분위기를 읽는데 뛰어날 것이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풍경이 그림책이었다. 때문에 엄마 무릎에 안기어 그림책을 보지 않고 자라난 아이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그림책을 읽고 자라지 않은 대신에 세상의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벽지의 무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의 이야기를 듣고 동물의 울음소리를 시로 읊을 것이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규칙이 없어서, 누워서도 읽고 소리 내어서도 읽고 친구와도 읽고 손으로 적어 내려 가면서도 읽고 읽은 것을 만화처럼 떠올려보고 영화처럼 떠올려보고 내 일처럼 떠 올려 보고. 그렇기에 어떤 아이가 의자에 기대어 책을 읽거나 바닥에 뒹굴며 책을 읽거나 굳이 불을 끄고 랜턴을 밝히고 책을 읽거나 소리를 높이거나 눈으로 찬찬히 읽거나 구부정하게 읽거나 바르게 앉아 있거나 걸어 다니며 읽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세상에 책을 읽는 방식이 사람 수만큼 많다는 것을 알고 그래야 재밌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책을 읽고 돈을 벌고자 하지만 나는 돈을 벌어 책을 사고자 한다. 그리고 산 책을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줄 수도 있다. 책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더 할인을 받기 위해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기보다는,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어떤 책을 사야만 할 때 인터넷 서점을 이용한다. 가끔은 책값보다 더 비싼 택배비를 지불하고 한 권의 책을 사기 위해서 다섯 시간을 달려갈 수 있다. 아무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 권하지 않는다. 나는 책들이 아이들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아이들이 책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린다. 책은 안다. 자신들에게 주인이 있다는 것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들은 누군가에게 읽힐 운명을 타고났다. 그러나 '책을 읽으라'는 그 말 때문에, '읽어야 한다!'는 그 말 때문에 아이들이 책을 호출하려던 손을 멈출 때, 책은 스스로의 운명을 실현하지 못하고 먼지가 쌓이다가 어느 날 먼지가 되어 버린다. 그 말은 마음을 사그라들게 하는 주문이 되어, 책과 아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는다. 보이지 않는 강을 흐르게 한다.

벽이 쌓이면, 강이 흐르면 그때는 벽을 타고 넘을 사다리가 필요하고 강을 건널 나룻배가 필요하다. 사다리를 붙잡아줄 누군가가,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아이들은 사다리를 타고 벽을 넘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지만, 그 벽 너머에는 아이들이 원하는 세상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사다리가 나룻배가 하나의 벽을 넘고 하나의 강을 건너게 했지만 또 다른 "책을 읽으라"라는 말이 새로운 벽을, 새로운 강을 이룰 수도 있기에.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대에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원할 때 책의 이름을 부르면 그 책이 당신에게 갈 것이다. 그 책은 당신에게 읽힐 운명을 타고났고 당신은 그 책을 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을 읽더라도 당신의 운명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 그렇지 않나? 사랑하라고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지 말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과 평생을 살기도 하지만 우리는 수시로 애인을 바꿀 수도 있다. 평생 짝사랑으로 마음에 품을 수도 있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때이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관계 맺음이 폭력인 줄을 잘 안다. 강한 법으로 그러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아이들에게 책을 강제로 사랑하게 하려 하는가?

사랑은 본능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책을 고를 수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알려주지 않아도 책을 보면 그 책이 내 운명인 줄 안다. 그러니 결혼을 대신하고 아이를 대신 낳아주고 키워줄 게 아니라면, 연애를 많이 해보고 스스로 짝을 고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게 책은 아이들이 고를 수 있게 두어야 한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내게 책을 골라주지 않았기에, 나는 책을 읽고 스스로 책을 골랐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편집자로 기획자로 기획사 대표로 명함을 바꾸는 동안에 내 서재에는 책이 2만 권쯤 되었다. 집에 다 두지 못해서 시골 할머니 댁에, 외삼촌댁에 보내 놓았었다. 그렇게 책이 많았지만 나는 그 책을 읽으라고 아이들에게 강요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도 그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엄마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책을 가지고 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재미있게 읽어주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힘껏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새로운 책을 찾아오고는 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책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내가 지쳐 쓰러지도록 책을 가져온 적은 없었다.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당당하게 책을 읽지 않았지만 책을 읽어달라고 요구했고 어느 날인가는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침대 밑에 책상에 화장실에 책을 가져다 놓고 읽었다. 책이 귀한 줄 모르고 살았던 아이들은, 너무도 당연한 집안 풍경이었던 책들이 실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박스에 담겨 도서관이라는 공간으로 옮겨지고 어느 날부터 친구들이랑 공유하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내가 다 읽고 난 뒤에 같이 보겠다"며 절박하게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라" 강요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연탄불을 갈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동생 운동화를 빨거나 방을 닦으라고 하거나 걸레를 빨라고는 하지만 "책을 읽으라"고 하지는 않는 엄마가 그 책들을 모조리 도서관에 기증하는 바람에, 며칠 밤을 지새우며 읽었다. 그리고도 다 읽지 못하자, 도서관에서 읽었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과 어울려 읽었고 소리 내어 읽었고 뒹굴며 읽었고 그림을 그리며 읽었고 시를 쓰며 읽었고 노래를 부르며 읽었고 연극을 하면서 읽었다. 만화책도 읽었고 동화책도 읽었고 시집도 읽었고 역사책도 읽었고 경제책도 읽었고 공부법 책도 읽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는 자신들의 책의 무늬를 만들어갔다. 마치 애벌레가 나뭇잎을 파먹고 지나간 자리에 지문이 남듯이 아이들이 읽어치운 책들은 아이들에게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그것이 사람의 무늬라고 읽는다.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강요하지 않았기에.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 강요하지 않았기에.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 마지막 장에 나오는 '무엇을 어떻게 읽든_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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