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Sep 28. 2019

취향저격

평창의 어느 에어비앤비에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애인이 그동안 촬영하랴, 아이들 지도하랴 바빴는데 드디어 이 모든 게 끝나게 된 기념이었어요.

사실 중간에 촬영이 없는 날에도 바다에 다녀오긴 했지만, 어쨌든 이주만의 여행인 것도 신기하고 좋고 그랬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언제나 부담스럽고, 한 가지는 꼭 불편했어서 몇 년간 (남자 친구도 없는 김에) 혼자 여행을 하곤 했는데 지금 애인을 만나면서는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어디든 슝슝 잘 다닙니다. 참 고마운 일이에요.


추석 연휴가 있던 지난 주말에는 평창에 있는 산속으로 숲캉스를 갔어요.

에어비앤비를 통한 국내여행은 처음이었는데 물론 사진과 다른 사람들이 다녀온 후기를 보고 결정하긴 했지만, 발을 들이고 보니 더욱 나와 애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답니다. 특히나 저는 가끔씩 혼자 어딘가 처박히고 싶을 때마다 숲 속이어야 하고, 아늑해야 하고, 전경이 탁 트여야 하고, 밑으로는 계곡이 흐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그 대부분을 충족시켜주는 숙소였다고 할까요?

혼자 우울할 때,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을 때 그런 곳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긴 했는데 지금은 상황과 마음이 어렵지 않았고.. 그래서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온 것 같습니다.


가보고 싶었던 산속의 카페에 들러서 차를 마셨고요, 저의 본가가 있는 청평 어느 산속 또한 그렇지만 이곳에 있는 집도 해 지는 시간이 빨라서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숙소로 향했습니다.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파르고 정돈이 덜 되어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LP art house라는 아무 나무판자에 페인트칠을 하고 만든 간판들이 보여요.

그것도 몇 미터씩 거리를 두고 계속. 그래서 안심하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답니다. 무심한 듯 다정한 건 이런 것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얌전하고 늙은 검은 개와 누런 털을 가진 깨발랄한 어린 개,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길고양이가 지붕에 앉아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짐을 먼저 들고 올라와서 신발을 벗고 거실 가운데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짐을 아무렇게나 풀어둔 뒤 허리 정도 높이의 선반 위에 놓여있는 턴테이블로 직행했고, 위에 놓여 있는 LP를 바로 재생했어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OST를 틀어놓고 DSLR을 삼각대에 거치하고 음악 앞에서 같이 장난치고 춤추는 우리를 영상으로 남겨두었는데 참 귀여웠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재생해보는데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는지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더라고요. 


이제 여기는 하루 동안 우리 집이야.

티비도 없는 거실에서 수십 장 쌓여있는 LP들 중 대여섯 장을 돌려 들으며 저녁을 준비하고, 먹고, 두 마리의 순한 개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냈고, 집에 놓인 기타를 치고 놀면서 핸드폰을 벽난로에 거치하고 영상도 찍어봤는데 그 속의 우리가 뭐 하나 부자연스러운 것 없이 집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 참 예뻐 보였습니다. 어쩌면 거기가 그냥 우리의 집 같았어요. 제가 좋아했던 노래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노라 존스의 LP였는데 'dont know why'가 집안을 꽉 채우니 뭔가 마음이 간질간질하더라고요.


늦은 저녁 구름이 잔뜩 끼인 하늘에 조금이라도 구름이 걷히면 별이 보이지 않을까 몇 번이고 손을 잡고 오르내리던 배추밭, 그 위에 서면 시야가 탁 트여 맞은편 산봉우리만 보이는 조용한 곳, 그 길을 나설 때면 따라 나오던 든든한 개 두 마리. 그 장면이 너무 사랑스러워 당분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또 여행의 무엇이 좋았냐고 물으신다면, 호들갑스럽지 않아서 좋았다고 할까요. 여행하면 예쁘고 깔끔한 곳, 좋은 곳을 찾기 마련인데 그보다 편안한 장소였어요. 그래서 다음날 방을 나서면서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곳의 호스트도 취향을 따라가다 만나게 된 남편분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나도 취향을 따라가다 만난 사람과, 우리의 취향이 가득한 곳에 있으니 우리가 꿈꾸는 (마음에서라도) 집은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라구요.


취향은 나를 이루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내 주변의 사람과 환경까지 만들어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의 취향이 조금 소중해진 여행이었습니다.


일상을 여행처럼, 이란 말은 이런 곳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여행하세요. 여러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