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직장적인, 너무나 직장적인 14편

by 서안

찌든 담배냄새

시커먼 얼굴색

거친 입담

와이셔츠를 찢을 듯한 뱃살


그는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이 곳에 발을 담근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의 영웅담을 들어야 했으며, 그에게 거친 욕을 들었다는 것은 이제 일을 제대로 시작했다는 표식처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수준에 맞지 않는 질문이라 생각하면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키우겠다고 작정한 이들은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정치적인 발언이나 상황을 호도하기 위한 교묘한 보고에는 불같았다.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그가 길러낸 실력자들은 호위대처럼 든든했고,

그는 자신이 길러내는 이들보다 더 빠르게 거대해져 갔다.

그는 방벽 같은 존재였다.



"그게 맞어?"

일순간 얼어붙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가는 대화는 매우 기본적인 내용이었고, 나는 그 대화와 관계없는 말 그대로 '우연히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그렇게 쉬운 질문을 나에게 할 리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이라 이 외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없었다.


"맞습니다"

겨우 꺼냈다. 그에게 답변이 늦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질문이 수준 낮아서도 안되고 답변이 추상적이어도 안 되는 그에게 겨우 꺼낸 한 마디였다.


엘리베이터는 진공이 된 듯 모든 소리를 빨아들였다. 1층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숨 막힐 듯한 진공이 깨어졌다. 그렇게 첫 만남은 긴장으로 시작되었다.




"준비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처음 만난 그 순간보다 더한 진공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었다. 그가 말하는 책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똑똑하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지시대로 준비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 머뭇거렸다. 힐끔 나를 쳐다본 그는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못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입을 떠난 소리가 그의 귀에 닿기도 전에 예상했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한번 못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하라고 했다. 이걸 못하면 다 같이 무너지니 준비하라고 했다.

차라리 화통을 삶은 듯한 호통이었다면 끝까지 버티기라도 했건만, 침울하지만 무한한 무게가 실린 소리에 짓눌리고 말았다.

진행되고 있는 개발을 마무리를 지어야 했고, 개발의 마지막 단계로 시제품을 만들고 시험을 해야 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술이었다. 완성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회사는 다른 회사를 인수했다. 기술은 개발이 아니라 구매로 생각하는 비즈니스 마인드에 충실했다.

개발 중단 명령이 떨어졌고, 모든 지원은 끊겼다.

실사를 다녀온 피인수 기업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번드르르한 배경을 가진, 있어 보이는 이들만 있었을 뿐.

팬시한 것을 좋아하는 이와 번드르르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만나 그럴듯한 딜을 해 보고 싶었을 뿐.

실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높은 분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개발이 중단되었다는 소리에 늘 열려있던 그의 방문이 닫혔다.

그리고 며칠 동안 덜 빠진 술냄새를 지닌 채 출근한 그가 나를 불렀다.

"준비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그의 고민의 무게에 짓눌리고 말았다.

진행하는 이 일은 직장에서의 그의 마지막 승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없는 것을 보이는 척 임금님의 옷이 멋지다고 말만 하면 직장인의 꿈인 이그제큐티브 타이틀을 몇 년간 더 달 수도 있었건만, 그는 끝까지 벌거벗었다고 임금님을 몰아붙였다.

공식적으로 조직이 해체되기 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짜내어 진행시켰다. 숨이 막힐 만큼 그가 떠나기 전 끝을 봐야 한다는 심정으로 밀어붙였다.

결국 시제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의 발주가 끝나갈 무렵 모든 것은 사라졌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한 자들은 모두 반역죄로 쫓겨났고, 그들을 따르던 자들은 공중분해되었다.

그는 책임을 졌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는 농사꾼이 되어서 좋다고 했다.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10여 년이 걸렸다.

임금님은 벌거벗었고, 가져온 보물상자는 텅 비어있었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동안 임금님의 옷을 칭찬했던 자들은 영전에 영전을 거듭하였고,

벌거벗었다고 이야기했던 자들은 무수히 쫓겨나가거나 남겨진 채 텅 빈 보물 상자의 보물을 채우기 위한 방편을 마련 중이다.


아무도 원래 그 보물상자는 비어져있던 거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벌거벗은 임금님은 여전히 보물상자에는 보물이 가득 차 있었다고 믿고 있다.



1. 불치병임을 알고도 출근을 했다.

2. 줄은 타고 싶다고 타는게 아니다.

3. 사람을 얻는 달콤함

4. 아스팔트에 뒹군건 누군가의 아빠다.

5. 월급쟁이 고수는 없다.

6. 떠난 후에야 영웅이 되었다.

7. 마차의 시대는 끝났다.

8. 실력은 평가 받는 것이 아닌 인정 받는 것

9. 돌아볼 것 없이 달릴 때, 일은 완벽하게 소멸된다.

10. 조직은 '그 누군가'를 원한다.

11.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일하는 자

12. 적과 경쟁자를 구별하라는 그 외침

13. 그렇게 어벤저스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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