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진심인 사람이 건네준 온기

인쇄소에서 만난 일터의 장인 이야기

by 진심과 열심

마감한 다음 날 떠나는 감리 여행

얼마 전 책을 마감하고 인쇄 감리를 다녀왔다. 보통 책 데이터를 마감하면 바로 다음 날 인쇄소에 간다. 감리 가는 날 내 마음에는 ‘이번에도 유형의 물질을 완성해냈구나’ 하는 안도감과 ‘뭔가 작은 실수라도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동시에 인다. 그래도 감리 가는 걸 좋아한다. 업무 중간에 합법적인 여행을 다녀오는 기분도 나고, 인쇄기와 잉크가 가득한 인쇄소 특유의 분위기와 냄새도 좋다.

일 년에 5권 정도 책을 만들고 있으니 보통 2~3달 간격으로 인쇄 감리를 간다. 인쇄소가 살짝 외진 곳에 있어 이전에는 버스에서 내린 후 택시를 타고 갔는데, 이번에는 걸어서 가야지 하고 오기를 부렸다. 그래서 11시 감리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디자이너님이 먼저 본문 감리를 보고 계셨고, 다행히 모든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고 색상도 예상했던 것과 비슷하게 나왔다. 본문 인쇄를 담당해주신 기장님께 ‘이렇게 가겠다’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디자이너님과 대기실에서 약간의 담소를 나눴다.

잠시 후 가장 신경 써야 할 표지 감리가 준비되었다고 하셔서 다시 인쇄실로 향했다. 책 표지는 책의 인상을 좌우하는 만큼 가장 신경 써서 보게 되고, 확정하고 나면 2,000~3,000개의 표지 부수가 생각보다 빠르게 인쇄되어 나오기에 결과를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표지 인쇄를 앞두고는 원하는 색감이 잘 나올까 특히 긴장하게 된다.


챗GPT 시대에도 누군가의 감에 의해 색감이 맞춰진다

표지 디자인이 결정되면 인쇄 교정 업체를 통해 인쇄되었을 때의 느낌을 미리 파악한다. 이 인쇄 샘플을 감리 전에 인쇄소에 전달해서 맞춰 달라고 말씀드리는데, 어떤 분이 그 샘플 교정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계셨다. 이 인쇄소에 거의 2년 이상 드나들고 있는데 처음 뵙는 기장님이셨다. 인사를 드리고 출력된 표지를 보는데, 색감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밝았다.

이번 표지는 약간 붉게 보이는 노란색 배경인데, 쨍한 형광 빛의 노랑이 담겨 있었다. 기장님께서는 우리 회사가 평소에 형광이 들어간 노랑을 많이 써서 이 잉크에 맞추셨다고 한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노란색 잉크는 형광이 도는 것과 붉게 보이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기본 바탕이 되는 잉크를 잘못 선택하셨다고 한다. 애초에 잘못된 잉크 위에 새로운 잉크를 덧입혀 색을 맞춰야 하는 살짝 난감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인쇄 교정 샘플에 맞춰 노란색을 좀 더 진하게 올려달라고 말씀드렸다. 기장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곤 새로운 잉크를 붓으로 덜어 원래 잉크 위에 넣으셨다. 어떤 정량화된 수치나 데이터 없이 오직 본인의 감각에 의해서 잉크를 제조하셨다. 챗GPT와 AI가 일상화되고 있는 지금, 특정 개인의 능력에 의해 색감이 맞춰진다는 게 신기했다. 오래 경험하며 깨우친 사람만이 가능한 장인의 경지라고 생각했다. 이번 표지 디자인 중간에는 살짝 펄감이 느껴지는 동그라미가 들어가는데, 펄감이 안 산다고 웃으며 말씀드리자 펄 잉크도 조금 넣어주셨다.


인쇄기가 돌아갈 때면 2~3개월 쥐고 있던 작업의 결과물을 비로소 실물로 만나게 돼 기쁘고 설렌다.


그분의 성함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렇게 네 번째 수정된 결과물을 보자 이제 얼추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색이 비슷하게 나왔다고 만족하면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하고 오케이 의사를 전한다. 조금 더 욕심내서 수정했다가 되돌리게 되면 오히려 색감이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많아도 세 번 정도 수정하는 선에서 오케이를 한다. 디자이너님과 “이걸로 갈게요” 하고 기장님께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자꾸 기장님은 인쇄 기계 위에 올라가셔서 이것저것 살피셨다. 그러곤 다시 인쇄 교정 샘플을 보시면서, “살짝 다르네” 하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우리가 따로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 후 여러 번 데이터를 조정하시고 새로 출력하셨다. 이런 분을 처음 뵈어서 무슨 상황인지 당황스러웠다. 어느새 한 발 물러서서 기장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렇게 기장님은 본인이 만족하실 때까지, 샘플 교정지와 색감이 거의 완벽하게 비슷해질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셨다. 표지 인쇄 데이터가 최종 확정될 때까지 총 8~9번 출력하셨고, 인쇄소 한편엔 테스트한 종이가 가득 쌓였다.

이렇게 열심인 것에 모자라 기장님은 우리에게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거듭 말씀하시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그 겸손한 미소에도 감동했다. 나는 저절로 ‘엄지척’ 해드리며 두 손 모아 감사하다고 인사드릴 수밖에 없었다. 성함이라도 알고 싶어 혹시 작업대에 기장님 성함이 적혀 있지는 않은지 두리번거렸다. 인쇄소 문밖을 나오면서 내 몸 전체에 감동의 온기가 퍼져가는 걸 느꼈다.


색감이 다르게 나온 표지들. 버려지는 종이라 평소엔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정성이 가득 담긴 결과물이니까.


일터의 장인이 된다는 것

디자이너님 차를 타고 회사로 복귀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기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 업력이 몇 배나 되는 디자이너님께서도 자신도 이런 분은 처음 뵈었다고, 근처에 편의점이라도 있었으면 음료수라도 사드리고 싶었다고 하셨다.

이번 책을 작업하며 여러 만족하지 못하는 지점 때문에 스스로를 힐난했는데, 기장님 덕분에 이번 책이 기분 좋은 책으로, 의미 있는 책으로 내게 기억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전에 받은 이 충만함으로 이미 하루가 다 채워진 느낌이었다.


머리를 새로 할 때도, 식당에 갈 때도, 대중교통을 탈 때도 수많은 일터의 장인을 만난다. 맡고 계신 일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이분들께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한결같이 최선을 다한다는 거,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하나에 진심이라는 거, 결국 사람들은 그 정성에 감동하게 된다는 거…. 단정하고 사려 깊고 진중한 태도를 보고 싶고 또 본받고 싶어서 나 역시 그들을 다시 찾게 된다. 언젠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이분들께 받았던 감동처럼, 누군가 나의 태도에서 건네받은 온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되돌려주는 그런 선순환의 과정을 만들고 싶다. 언제나 든든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일터의 장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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